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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140

너희들도 때론 내게 ‘스승’이어라 스승의 날, 아이들로부터 축하케이크를 두 번 받다 아이들에게 오래된 교단의 기억들을 얘기한 적이 있다. 20년 전 ‘열등반 담임의 추억’ 말이다. 그러면서 그 녀석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겠다고 했더니 아이들은 자신들의 얘기도 글로 써 달라고 주문했다. 이 글은 아이들의 주문에 대한 답인 셈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라는 쑥스러움을 무릅쓰는 까닭도 순전히 거기 있으니 독자들께서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면 좋겠다. 교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아이들은 교사들을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젊은 총각 교사와 처녀 선생님들에게 아이들 마음이 끌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반대로 교사들은 의식적으로 아이들을 이성으로 인식하지 않으려 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교육적 필요 때문이면서 한편으로 인간적 자기 통.. 2019. 3. 23.
그 아이들과의 10년, 1998년에서 2008년까지 약속대로 10년 만에 다시 만난 제자들 10년이란 시간 속에 담긴 변화와 그 의미는 어떤 것일까. 꼭 10년 전(1998년)에 나는 한 시골 고등학교의 3학년 담임을 맡았다. 인연이 닿아서였겠지만, 1학년 때에 이어 두 번째로 나는 그 아이들을 만났다. 이미 서로를 알 만큼은 아는 사이여서 우리는 아주 편안하게 한 해를 함께했다. 이듬해 2월 아이들이 졸업할 때, 10년 후쯤에 꼭 한번 만나자며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이태쯤은 아이들과 내왕을 했다. 5월 스승의 날이 되면 아이들은 추렴하여 나를 안동의 삼겹살집으로 초청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사내아이들이 입영을 시작하면서 연락이 뜸해지더니 4, 5년 전부터는 아예 연락이 끊어졌다. 고1, 고3 두 차례나 담임으로 만난 시골 아이들 이 아이들의.. 2019. 3. 22.
좋은 이웃, 혹은 제자들(2) 복직 이후의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 해직 5년은 내 삶에서 일종의 변곡점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른바 ‘아스팔트’ 위의 교사로 쪼들리며 산 세월이었지만 마음만은 부자였던 시절이었다. 복직도 승리의 전망도 별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시절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젊음 때문이었다. 5년 만의 복직, 다시 만난 아이들 1994년 3월에 나는 경북 북부지역의 한 시골 중학교에 복직했다. 막상 학교로 돌아왔지만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동료가 ‘중증’이라고 표현할 만큼 내 의식과 현실은 어긋나기만 했다. 그러나 거기서 지낸 2년도 잊을 수 없다. 고비를 넘을 수 있었던 것은 동료들의 지지 덕분이었던 것 같다. 서른아홉, 젊다면 젊었고 아이들은 순수했다. 첫해는 담임 없이 수업만 했고 이듬해는 학기 중간에 1.. 2019. 3. 22.
좋은 이웃, 혹은 제자들(1) 이웃이 된 제자들(1) 한 5년쯤 될까. 교직에 들어 한동안은 ‘제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어쩐지 ‘제자’라는 말을 올리는 게 민망해서였다. ‘제자’라는 말의 상대어는 당연히 ‘스승’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제자’라고 말하려면 내가 ‘스승’이 되어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통 없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교사들 대부분은 그런 자격지심과 무관한 일상어로 이 낱말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무심히 제자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예사롭지 않은 자격지심이 멀쩡한 동료를 능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다. ‘스승과 제자, 혹은 교사와 학생’ 사이 그래도 ‘스승’을 입에 올리는 것은 서른 해를 훌쩍 넘긴 지금도 여전히 쉽지 않다. 모든 교사에게 ‘스승의 날’은 언제나 부담스러워 피하고.. 2019. 3. 17.
31년…, 뒤돌아보지 않고 떠납니다 학교를 떠나며 ① 오는 2월 마지막 날짜로 저는 지난 31년의 교단생활을 마감하게 됩니다. 어떤 형식의 끝이든 감회가 없을 수 없지요. 지난해 세밑에 쓴 기사(서른넷 풋내기였던 나, 학교에서 잘리다)에 저는 떠나기 전에 정리가 필요할 듯하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학교에 머물 날이 한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저는 여전히 궁싯거리고만 있습니다. 정리하고 마무리하자고 자신에게 되뇌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지요. 무엇을 정리하고 무엇을 마무리해야 하는지가 다만 어지러울 뿐입니다. 31년(1984.3.1.~2016.2.28.)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셈법입니다. 1989년 9월부터 1994년 2월까지의 공백, 4년 반은 기실 우리에겐 ‘잃어버린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2019. 2. 25.
나의 전교조 25년, 그 옹이와 매듭 25년 만에 사학 재단의 사과를 받다 지난 15일, 스승의 날 저녁에 나는 친구인 장(張) 선생과 함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갔다. 수도원장 박현동 아빠스*가 우릴 초대했던 것이다. 우리는 물론 그를 모른다. 친구는 그래도 한때 거기 신자였지만 나는 가톨릭과는 아무 인연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거기 간 것은 오래전의 어떤 ‘인연’ 때문이었다. 25년 전 - 아, 그새 그렇게 세월이 흘러 버렸다. 1989년 8월 23일에 나는 친구와 함께 그 수도원 산하의 학교 법인에서 해임되었다. 그해 5월 28일, 온 세상을 달구며 돛을 올린 ‘교원노조’ 때문이었다. 전국에서 교원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난 초중등, 공사립 교사들은 무려 1천6백여 명이었다. 1989년 우리를 해임한 재단의 초대를 .. 2019. 2. 21.
문제아는 발길질과 따귀로...내가 왜 이러지? ‘체벌의 진실’ 가르쳐 준 ‘열등반’ 50명 아직 정년은 한참 남았다. 그러나 조만간 교직을 떠나는 게 옳다는 생각을 굳히면서 서른 해 가까이 머문 ‘교사의 자리’를 무심히 돌아볼 때가 더러 있다. 떠난다 해도 퇴임식도 퇴임사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자신에게 건네는 ‘퇴임의 변’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다. 그게 내 존재와 삶의 확인일 터이므로. 아이들, 사랑, 삶, 인간, 성장, 존엄성 따위의 단어로 조합된 몇 개의 글귀가 떠올랐지만, 고개를 젓는다.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참회록이 아닌가 싶어서다. 시인 윤동주는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의 삶에도 참회록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교단에서의 내 삶에는 그보다 더 길고 무거운 참회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교직에 오래 있을수록 죄가 많다’던 .. 2019. 2. 20.
가지치기, 혹은 거름과 물 주기 졸업식, 아이들을 보내며 학년 말이다. 한 해 농사를 다 지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 농사는 사람 농산데, 요즘 이 농사꾼은 고단하다. 이 작물은 제멋대로 자라는 성질이 있어서 농사꾼은 제풀에 지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을 기르는 이 농사꾼 중에 으뜸은(말하자면 ‘꽃’은) ‘담임’이다. ‘생살여탈권’에 준하는 권한을 무제한 행사했던 옛날과는 다르지만, 아이들과 가장 가까이 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내밀한 교감 같은 것도 가능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3년을 내리 쉬고 지난해 3월, 스스로 원해서 3학년 담임을 맡았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비담임으로 지내면 ‘몸의 평화’와 ‘정신의 이완’을 맞바꾸어야 한다. 조·종례에서 해방되고 반쯤은 ‘강시처럼’ 살아도 된다. 종이 울리면 무조건 반사로 교실.. 2019. 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