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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그 아이들과의 10년, 1998년에서 2008년까지

by 낮달2018 2019.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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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대로 10년 만에 다시 만난 제자들

▲ 고교 졸업 10년 만에 다시 만난 사제는 밤새워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10년이란 시간 속에 담긴 변화와 그 의미는 어떤 것일까. 10년 전(1998)에 나는 한 시골 고등학교의 3학년 담임을 맡았다. 인연이 닿아서였겠지만, 1학년 때에 이어 두 번째로 나는 그 아이들을 만났다. 이미 서로를 알 만큼은 아는 사이여서 우리는 아주 편안하게 한 해를 함께했다.

 

이듬해 2월 아이들이 졸업할 때, 10년 후쯤에 꼭 한번 만나자며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이태쯤은 아이들과 내왕을 했다. 5월 스승의 날이 되면 아이들은 추렴하여 나를 안동의 삼겹살집으로 초청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사내아이들이 입영을 시작하면서 연락이 뜸해지더니 4, 5년 전부터는 아예 연락이 끊어졌다.

 

고1, 고3 두 차례나 담임으로 만난 시골 아이들

 

이 아이들의 안부가 궁금해진 건 지난 5월 스승의 날에 작년과 올해의 아이들로부터 겹으로 축하를 받고 나서였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과 ‘10년 후 운운하는 이야기를 나눈 걸 떠올린 것이다. 무엇보다 그해 말에 오토바이 사고로 머리를 다쳤던 아이의 안부가 몹시 궁금했다.

 

묵은 학생 요람을 꺼내놓고 몇 차롄가의 통화 끝에 이미 결혼한 여자아이와 연락이 닿았다. 모두의 안부가 궁금하다고 전했더니, 여러 군데서 걸려온 아이들의 전화를 받았다. 하나같이 그새 10년이 되었냐고 반문하면서 지난 시절을 추억했다. 흐르는 세월은 매정하고 삶은 고단한 법이다. 아이들은 제각기 꾸려온 시간 속에서 10년 전을 따뜻하게 떠올려 주었다.

 

여학생 중 여럿은 결혼해 어머니가 되었고, 모두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염려했던 아이는 많이 회복된 것을 확인하면서 걱정을 덜었다. 문경 쪽에 혼자 산다는 그 녀석에게 다녀오려고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서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났다.

 

지지난 주, 이미 정년 퇴임하신 옛 은사를 뵈러 가는 길에 나는 1, 3학년 계속 반장을 맡았던 아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16일 안동 인근의 펜션에서 동기들 모임을 하기로 했단다. 말하자면 그게 10년 전 우리가 어정쩡하게 나눈 약속의 만남인 셈이었다.

 

글쎄, 몇 명이나 모일는지, 각각 어떻게 변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가 자못 궁금해서 나는 며칠 전부터 설레었던 것 같다. 당일 오후 6시께 아이들 2학년 때 담임이었던 후배 교사와 함께 약속 장소에 나갔다. 미리 와 있던 예닐곱 명의 아이들과 만났을 때의 반가움을 어떻게 다 표현하겠는가.

 

밤 열 시가 넘을 때까지 아이들은 계속해 왔고, 펜션의 야외에서 삼겹살과 갈비에 소주를 곁들인 성찬은 자정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모인 아이들은 나중에 꼽아보니 남녀 각각 9명씩 모두 열여덟 명이었다. 서울서 내려오다가 차편이 없어서 대전에서 되돌아간 아이, 오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고 전화를 걸어온 아이들이 또 대여섯이었다.

 

사내아이들은 소주를 거의 물 들이켜듯 했는데 나는 아이들이 건네는 술잔을 사양하거나 한 방울씩 꺾어서 마시느라 무진 애를 썼다. 여럿이 모이다 보니 곳곳에서 얘기꽃이 만발했다. 아이들의 이야길 이리저리 듣다 보니 기실 내밀한 얘기를 깊이 나누지는 못했다.

 

10년 후에도 건강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들

 

스물아홉 살. 한창 일을 하거나 사회 진출을 모색하는 시기다. 공학 계열의 학교를 나와 기계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들, 대학원을 다니는 친구, 간호사, 구미와 안동, 대구와 서울에서 각각 직장 생활을 하는 아이들, 아이 둘을 기르는 주부, 미용실을 열고 있는 아이, 내년도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친구, 8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온 쌍둥이 중 큰아이…….

 

결국,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아침 6시까지 밤을 홀딱 새웠다. 모두 그제야 쓰러져 잤는데 10시 반께 일어나니 아이들 반은 이미 돌아가고 없다. 저마다 사는 게 바쁜 것이다. 몇몇은 일을 나가고 몇몇은 볼일이 바쁜 모양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인근 부용대와 병산서원을 돌아보기로 했다. 외지에서 온 손이 있으면 늘 밟는 여정이다. 아이들의 승용차 두 대에 9명이 나누어 탔다. 부용대 아래 겸암정사 마루에 앉아 쉬다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아래 사진이 그거다. 사적 공간인 블로그긴 하지만 내가 자신을 드러내는 걸 꺼리는 것은 어쩐지 난 데에 벌거벗고 서는 기분이 들어서다. 아이들 속의 내 모습이 생뚱맞아 보이진 않는지 모르겠다.

▲ 아이들은 모두 제 나름의 건강한 삶의 모습을 유감없이보여주었다.
▲ 안동 겸암정사 마루에 앉아 쉬다가 사제가 사진을 한장 박았다.
▲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하나씩 렌즈에 담았다.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우리는 오래 머물며 쉬었다. 잠깐 한줄기 비가 지나간 뒤였는데, 누각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였다. 우리는 이런저런 삶 주변의 이야기를 가볍게 나누었다. 그리고 만대루 난간에 기댄 아이들의 모습과 그들의 풋풋한 미소를 여러 장 렌즈에 담았다.

 

복직하고 이태째, 몸과 마음의 부조화와 돌아온 교단에 대한 부적응으로 힘들었던 시기였다. 1996, 변화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나는 내신을 냈고 새로 전입한 학교에서 1학년 담임으로 아이들을 만났다. 면 단위의 시골, 성적이 썩 좋거나 집안이 넉넉한 아이들은 인근 시군으로 진학하고 그도 저도 아닌 아이들 마흔다섯 명이 올망졸망 기다리는 교실이었다.

 

일찌감치 를 놓았지만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애들을 체벌하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여학생 셋이 말썽을 부려 학생과에서 벌을 받고 내게 왔다. 나는 나직하게 왜 그랬냐고 물었고 아이들은 죄송을 거듭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잘하겠다거나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형식의 약속을 강요하지 않았고, ‘모두가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1, 때때로 나는 고함을 지르고 호되게 꾸중을 하긴 했지만 아무도 내게 매를 맞지 않았다. , 있다. 3학년 2학기 때였던가. 사내아이 대여섯 명이 염치도 없이 교실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 내게 걸렸다. 나는 그 녀석들을 엎드리게 하고 들고 다니던 교편으로 엉덩이를 서너 대씩 불이 나게 갈겨 주었다. 금도를 지키라 했지? 아이들은 죄가 되어 머릴 들지 못했다.

 

순박하고 정 깊은 아이들, 같이 만든 문집

 

순박하고 정이 깊은 아이들이었다. 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믿었고 아이들도 말없이 그걸 증명해 주었다. 씩 멋쩍은 미소를 깨물면서 뒤통수를 긁적이는 아이들, 쳐다보기만 해도 서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고 말하면 허풍일까.

 

여름방학에 사내아이 둘과 함께 인근 소백산으로 12일의 산행을 했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앞서 이야기한 오토바이 사고로 다친 아이가 그 산행을 같이했다. 아주 밝고 유쾌한 아이였는데 녀석은 이번 모임에 오지 않았다. 한 녀석은 이번 모임에 와서 그때 그 산행이 마지막 등산이었다면서 12년 전을 함께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돌아가며 모둠별로 일기를 썼고, 학년 말에 우리는 문집을 한 권씩 나누어 가졌다. <열일곱 살의 비망록>1996년 마흔한 살짜리 교사와 열일곱의 소년 소녀들이 함께 가꾸어 낸 사계의 기록이었다. 수업을 마치고도 시외버스 편으로 받게 될 문집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더벅머리 소년들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이듬해 나는 담임을 맡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가는 설악산 수학여행에 동행했다. 마치 내가 저희들의 삼촌이나 맏형님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주 무관한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내가 다시 아이들을 맡으리라고는 나도 아이들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부득이한 일이 있었다. 나는 기꺼이 아이들을 맡았고 담임 발표를 하던 날 아이들은 기분 좋게 팔뚝을 흔들어댔다. 그리고 1, 여학생들은 그들 특유의 다정다감으로, 사내 녀석들은 또 그들만의 두터운 의리와 인정을 내게 유감없이 나누어 주었다.

 

반드시 순탄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아이들 몇몇이 이른바 삐딱선을 타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속이 잔뜩 상했던 만큼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이번 모임에 그 아이들도 왔다. 글쎄, 그래서 그랬는지, 그 애들은 서먹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 자기 몫의 삶을 열심히 꾸려가고 있었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불과 서너 달을 앞두고 사내아이 하나가 온갖 만류를 뿌리치고 학교를 그만둔 것과 앞서 얘기한, 오토바이 사고로 한 녀석이 크게 다치게 된 일이었다. 나는 이번에 그들을 만날 수 있길 기대했지만, 녀석들은 이번 모임에 나타나지 않아 섭섭했다.

 
이제 동시대인으로 연대의 시간을 살아간다

▲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아이들과. 이 아이들은 나와 24살 차 띠동갑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아이들은 대부분 전문대학을 선택해 진학했다. 그리고 10. 아이들이 졸업하고 난 이태 뒤에 나도 그 학교를 떠났다. 인근 시군의 두 개 학교를 거쳐 나는 현재의 학교로 전입했고, 아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했고, 연애하거나 배우자를 만나고 몇몇은 또 부모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열심히 자신의 삶을 가꾸어 왔다는 점은 아무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이 보여주는 건강한 삶의 모습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안동 시내에 들어와 냉면으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그들이 10년을 돌아보게 했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아이들은 말했다. 지난 10년의 세월, 때론 회한이 없지 않지만, 그 시간이 소박하게 빛나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아이들의 건강한 마음과 미소 탓일 터이다.

 

자주 연락드릴게요. 건강하셔야 해요. 그래, 좋은 날을 받으면 꼭 연락해다오. 우리는 길거리에서 악수하고 헤어졌다. 꼬박 밤을 새운 지난밤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자주 만나자고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삶은 만만하지 않다. 마음과 달리 전화 한 통 하기도 쉽지 않고 그러다 보면 몇 해가 쏜살같이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게 뭐 문제겠는가. 우리네 삶을 스쳐 간 숱한 봉별(逢別) 속에 아이들은 나이를 먹고 나 역시 늙어갈 것이다. 비록 만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내가 동시대인으로서의 연대의 시간 속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말이다.

 

 

2008. 8. 1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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