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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31년…, 뒤돌아보지 않고 떠납니다

by 낮달2018 2019.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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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떠나며 ①

오는 2월 마지막 날짜로 저는 지난 31년의 교단생활을 마감하게 됩니다. 어떤 형식의 끝이든 감회가 없을 수 없지요. 지난해 세밑에 쓴 기사(서른넷 풋내기였던 나, 학교에서 잘리다)에 저는 떠나기 전에 정리가 필요할 듯하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학교에 머물 날이 한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저는 여전히 궁싯거리고만 있습니다. 정리하고 마무리하자고 자신에게 되뇌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지요. 무엇을 정리하고 무엇을 마무리해야 하는지가 다만 어지러울 뿐입니다.

 

31(1984.3.1.~2016.2.28.)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셈법입니다. 19899월부터 19942월까지의 공백, 4년 반은 기실 우리에겐 잃어버린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거리의 교사니 어쩌니 했지만, 법은 매정하게도 그 부재의 시간을 경력에 넣어주지 않았습니다. 서른넷에 떠난 학교에 돌아온 것은 서른아홉, 저는 실로 가장 열심히 살아야 했던 때에 교단에서 배제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해직교사로 살았던 시절

 

교사들에게 삼십 대 중후반은 교직 생활에 서서히 적응하면서 가르친다는 일의 이상과 현실, 그 성속(聖俗)의 경계를 하나씩 깨우치는 시깁니다. 아이들과의 교감에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여러 가지 교육적 실천에 겁 없이 달려들 수 있는 나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 시기를 이른바 해직교사로 살았습니다.

 

학교를 떠났지만 늘 일상을 학교 시정(時程)으로 환산해서 바라보던 시절이었지요. 그러다 길거리에서 하교하는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괴로워질 때쯤에야 우리는 어정쩡하게 복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느라 삐걱거리다가 40대에 진입했고요. 그래서 저는 인정받지 못한 호봉과 경력보다는 그 잃어버린 젊음이 억울하고 원통했습니다.

  

40대의 7~8년은 합법화된 전교조 활동을 하느라 무척 바빴습니다. 하루를 일주일처럼 살았던 시기였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시간이었지요. 그러나 미친 듯이 살았던 그 시기는 이내 마치 공황처럼 엄습한 무력감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게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고 난 결과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저는 조합 전임 근무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십 년, 저는 없는 듯이 무명의 교사로 살았습니다. 젊고 유능한 후배들이 활동을 이어갔고 저는 오직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만 전념했습니다. 청년 시절과 또 다른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나이 덕분이었겠지요. 자라나는 아이들 모습에서 제 아이들의 성장기를 읽을 수 있었으니까요.

 

떠날 때가 되었다는 걸 깨달은 건 5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였습니다. 교육 환경이 어떻든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간만은 행복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아이들과의 교감이 제가 의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아이들의 눈높이와 내 그것이 본질에서 어긋나기 시작하고 있다는 걸 새삼 깨우치게 된 것이지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의 문제 풀이 교육도 넌덜머리가 났지요. 입시교육에 이골이 나 소년다운 고민조차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실망도 적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 교육적 고민을 잊어버린 듯 보이기도 하는 후배 교사들을 바라보는 일도 마뜩잖았지요. 어느 날부터 수업하는 시간도 행복하지 않은 날이 늘어갔고요.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차라리 행운입니다. 이미 지나간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공연히 후배를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고작 밥그릇에 불과한 자기 경력의 방패 뒤에 숨는 일은 미욱한 정도가 아니라 미련한 노릇이지요.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민폐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차라리 다행한 일이었다는 말씀이올시다.

 

떠나고자 하는 뒷덜미를 붙잡은 건 지난 조합 활동이었습니다. 10여 년 전에 진보 정당을 후원하다가 법이 바뀌어 위법하다 해서 중단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팔자에 없는 송사에 말려 꼼짝없이 삼 년을 허송했습니다. 공무원은 기소 중인 상태에선 퇴임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다시 법외노조’, ‘빈손으로 떠납니다

 

한 차례 미끄러진 끝에 지난 연말에 저는 명퇴 확정을 통보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지난 121일에 법원은 전교조가 제기한 법외노조 통보 처분 취소항소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습니다. 199971, 합법화된 지 꼭 17년 만에 전교조는 다시 법외노조로 되돌려졌습니다.

 

이 나라의 명민한 법률가들은 6만여 조합원 가운데 열 명 미만의 해직 교사를 조합원으로 두고 있음을 위법하다 하여 역사적 진보의 물줄기를 되돌렸습니다. 그런 야만적인 조치를 한 나라는 우리 말고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밖에 없다던가요. 이명박 정부부터 시작된 역사적 퇴행은 이 판결로 가히 화룡점정을 한 셈이지요.

 

오래 예견하고 있었던 일이기에 동료들은 대부분 재판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지요. 풋내기 교사 시절에 전교조 창립에 동참한 이래 10년 동안의 비합법 시대를 끝내고 합법노조로 누린 세월은 고작 17, 저는 다시 법외노조의 조합원으로서 교직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십여 년 싸워서 얻은 합법 지위를 잃고 빈손으로 떠납니다.

 

분노하기엔 우리가 겪은 세월이 참 무상합니다. 그것 말고도 분노하고 통탄할 일이 한둘이 아니니 차라리 실소할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어떤 민주주의 원칙도, 여하한 시민의 상식도 권력의 의도와 복심을 넘지 못하는 이 뒤집힌 현실 앞에서는 말입니다.

 

남은 동료 조합원 교사들이 그러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교직을 떠날 것입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남은 교사들은 다시 조합원으로서 일상을 지켜갈 것입니다. 19895월 전교조 출범 이후 모진 탄압 속에서도 의연하게 조직을 지켜온 것처럼 말이지요.

 

퇴행과 야만의 역사를 넘어서

 

15백여 명이 넘는 교사들을 내쫓은 1989년의 대규모 해직사태에도 불구하고 전교조는 늠름히 살아남아 10년 만에 합법화의 역사를 이루어냈습니다. 오만하고 시대착오적인 정치 권력이 잠시 역사의 물길을 거스르긴 했지만, 이 퇴행의 역사는 절대로 오래가지 않을 터입니다.

 

그걸 말없이 가르쳐 주는 건 역사입니다. 역사의 교훈은 인류의 발전, 그 문명사의 요체임을, 그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것은 청맹과니 권력의 패악이고 무지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고스란히 17년 전의 과거로 퇴행하는 역사를 확인하면서 떠나는데도 이 걸음이 허전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전교조에서 만든 나는 전교조 조합원이다라는 교육선전 자료 가운데 그림 한 컷을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얌전하게 책가방을 메고 보조 가방을 든 여자아이 앞에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여교사의 미소가 아름답습니다. 가슴이 잠깐 뭉클해지지만 저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고자 합니다.

 

 

2016. 2.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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