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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좋은 이웃, 혹은 제자들(2)

by 낮달2018 2019.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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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 이후의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

▲ 복직 후 만기를 채운 시골 고교. 이 시기가 내 삶에서 가장 빛나던 때가 아니었을까.

해직 5년은 내 삶에서 일종의 변곡점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른바 아스팔트위의 교사로 쪼들리며 산 세월이었지만 마음만은 부자였던 시절이었다. 복직도 승리의 전망도 별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시절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젊음 때문이었다.

 

5년 만의 복직, 다시 만난 아이들

 

19943월에 나는 경북 북부지역의 한 시골 중학교에 복직했다. 막상 학교로 돌아왔지만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동료가 중증이라고 표현할 만큼 내 의식과 현실은 어긋나기만 했다. 그러나 거기서 지낸 2년도 잊을 수 없다. 고비를 넘을 수 있었던 것은 동료들의 지지 덕분이었던 것 같다.

 

서른아홉, 젊다면 젊었고 아이들은 순수했다. 첫해는 담임 없이 수업만 했고 이듬해는 학기 중간에 1학년 담임을 맡았다. 그러나 대체로 중학교란 어정쩡한 곳이다. 시기도, 아이들의 발달 정도도 어중간하다는 얘긴데 이는 물론 입시 위주의 파행적 고등학교 과정 탓이다. 그래서인가. 아이들은 고교에 진학하고 나면 중학교 따위는 금방 잊어버린다. 중학교엔 제자가 드물다는 얘기는 그래서 생긴 것이다.

 

고교에 근무하다 중1, 초딩티를 벗은 아이들을 다루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골아이들은 착하고 천진했다. 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성적과 무관하게 아이들을 두루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나는 두고두고 이런 자신을 대견해 했다.

 

그해 여름 아이들과 함께 학급문집 씨앗들의 행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나는 다시 인근 지역의 고등학교로 옮겼다. 문집에서 확인하는 이름들은 낯익다. 그러나 그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17년의 세월을 고려해야 한다. 아이들은 지금 서른을 넘긴 씩씩한 청년으로 자랐을 것이다.

 

학교를 옮기고도 오래 연이 이어진 여자애가 하나 있다. 첫해에 가르쳤던 3학년 아인데, 명민했고 예의 발랐다. 경기도로 진학했는데, 객지에서 외로워서였을까. 어느 날부터 한 통 두 통 편지를 보내와서 답장하다 보니 그 나눔이 대학을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주고받는 전자우편이 아니다. 편지지에다 꼭꼭 눌러 쓰고 봉투에다 우표를 붙여서 보내는 그런 편지다! 그 애의 편지는 지금도 내 책상 서랍 어디엔가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엔 그 아이의 여고 시절의 아픔과 기쁨이 오롯이 담겨 있으리라.

▲ 5년 만에 복직한 시골 중학교. 교정이 아름다운 이 학교에서 나는 2년을 머물렀다.

 어느 날부터 편지가 뜸해지더니 연락이 끊어졌는데, 아이는 초등학교 보건교사가 되어서 소식을 전해 왔다. 나중에 확인했더니 그 애는 스스로 전교조에 가입, 보건교사 조합원이 되어 있었다. 교사가 된 제자들에게 나는 소속 교원단체를 묻지 않는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선택을 그런 방식으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다.

 

아이는 나름의 교육적 고민을 조직을 통해서 해결하고 있는 듯해서 나는 적이 마음을 놓았다. 당위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자기 고민의 결과로 조직을 선택했다는 것은 고무적이었기 때문이다. 짧게나마 조직 활동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감회가 퍽 새로웠다. 그 아이는 어쩌면 내 고민을 가장 따뜻하게 받아 안은 제자일지도 모르겠다.

 

관계를 통해 이어지는 삶

 

대학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참여하다 교직에 나가 열심히 교육운동을 하는 친구는 또 있다. 해직된 남학교에서 문학동아리의 회장을 맡았던 친구다. 타 시도에서 활동하고 있어 잘은 모르지만, 그는 매우 적극적인 활동가로 성장한 듯하다.

 

모두 제자로서가 아닌, 자기 몫의 삶을 가꾸어가는 교사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제자가 아니라 당당하고 어기찬 한 사람의 동료일 뿐인 것이다. 그것이 한 학교에서 만날 수는 없지만 내가 그들이 가진 교육적 고민과 경륜을 나누어 갖고 싶은 이유다.

 

앞에서 직접 내게 배운 아이는 아닌데, 기꺼이 내 제자가 된 아이 이야기를 했었다. 해직을 전후할 무렵, 나를 찾았던 이웃 여학교의 학생이었다. 그 애는 학생운동을 거쳐 지금은 지역 시민운동의 건실한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 두 아이의 어머니로, 해고 노동자의 아내로서 만만치 않은 삶을 꾸려가고 있는 이 친구를 보면서 나는 내 삶이 제자들을 비롯한 이웃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관계 가운데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 애는 언젠가 자신이 선택한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가 나였다는 사실을 고백했으니 그걸 감당해야 할 내 삶은 또 얼마나 무거운가.

▲ 복직 후 만든 학급문집들. 2006년에 낸 것이 마지막 학급문집이 되었다.

옮겨간 시골 남녀공학 고등학교에선 5년 만기를 채웠다. 거기서 전교조 합법화 원년을 맞았고, 2년이나 같은 아이들 담임을 맡아서 그들과 남다른 교감을 나누었다. 그 시절의 제자들 이야기는 지난 2008, 헤어진 지 10년 만의 만남 이야기 속에 잘 녹아 있다. [관련 글 : 10, 1998에서 2008까지]

 

반드시 시골아이들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정이 깊었고 순박했다. 40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그 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어쩌면 내 삶에서 가장 안정되고 그러나 빛나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수업 대신에 아이들과 들에 나가 쑥을 뜯어 와서 그걸로 쑥떡을 빚어 먹었던 기억도 새롭다.

 

지지난해 그 아이들 가운데 한 여학생 결혼식에 주례를 섰다. 자주 부탁을 받지는 않았지만, 주례라면 나는 가능하면 손사래부터 치고 본다. 젊은이들의 새 출발의 신성하고 엄숙한 자리를 주재할 만한 인품이나 자격이 없음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쑥을 뜯던 아이들

 

그러나 간청에 못 이겨 해직된 학교의 제자 결혼식에 주례를 맡은 게 2001년이었는데 10년 만에 다시 주례를 섰다. 그 결혼식에 달려온 제자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내 편한 이웃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30대 중반이지만 여제자들에게는 이미 어머니의 편안한 모습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학교는 이웃 시군의 한 시골 여학교였다. 거기서 보낸 2년은 내게 가장 아쉬웠던 시기다. 첫해는 담임을 맡았고, 이듬해는 비담임이었다. 조직 활동에 골몰하다 온전히 아이들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았던 걸까. 이 여자애들은 지금까지 나와 이렇다 할 연을 만들지 못했다. 이태 만에 나는 학교를 옮기면서 노조 전임자로 근무했다.

 

조직 활동에 지쳐서 서둘러 돌아온 학교는 시내 중학교였다. 거기서 세 해를 보냈다. 이태는 담임을 맡았는데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에 떠밀려 학급문집을 거푸 만들었다. 그리고 그게 내가 만든 마지막 학급문집이 되었다. [관련 글 : 가지치기, 혹은 거름과 물 주기]

 

그리고 초임교를 떠올리면서 시내의 여학교에서 5년을 보냈다. 해마다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아이들이 보여준 다정다감,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한 태도는 잊히지 않는다. 무엇 하나 뚜렷하게 거두어 준 적이 없는데도 담임이라고 챙겨준 아이들의 사랑에 나는 자주 느꺼워하곤 했다. [관련 글 : 너희들도 때론 내게 스승이어라]

▲ 제주도에 사는 제자가 보내준 감귤. 지난여름에 이 친구의 결혼식을 주재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남학교다. 전임 학교에서 만났던 여자애들에 비교하면 가까워지기가 훨씬 어려운 상대들인데 어느새 한 해를 마무리할 시점이 가까워졌다. ,쎄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이 아이들과는 곧 이별이다. 굳이 3학년을 맡을 생각은 없으니 말이다.

 

담임을 맡지도 않고, 그저 수업에만 만났던 아이들이다. 지금껏 내가 아이들을 만나고 연을 맺었던 상황과는 아주 다르다는 얘기다. 이 아이들은 고교 시절에 잠깐 문학을 가르쳤던 중년의 교사로 나를 기억할 것이다. 황석영 식으로 표현하면 이들은 성년의 길목에서 만났던 바람이나 안개의 한 부분으로 나를 끼워 넣을 것이다.

 

소박한 우정으로 이어지는 사제동행

 

어제 제주도에 살고 있는, 해직된 학교 출신의 제자가 귤 한 상자를 보내왔다. 올해 갓 마흔이 되는 친구다. , 이 친구도, 간청을 뿌리치지 못해 지난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결혼식을 주재했다. 귤이 싱싱하고 썩 달다고 치하했더니 해마다 보내주겠단다. 말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이래저래 나는 별 신통찮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연을 맺은 제자들의 과분한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참으로 빚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베푼 서푼 어치 사랑에 비기면 그들의 경의는 넘치는 것이었다. 하여 나는 그들을 내가 마무리해 갈 내 삶의 착하고 아름다운 이웃으로 여기며 살아갈 작정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사제동행이 소박한 우정으로 내내 이어지길 바라면서.

 

 

2013. 1. 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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