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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문제아는 발길질과 따귀로...내가 왜 이러지?

by 낮달2018 2019.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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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의 진실’ 가르쳐 준 ‘열등반’ 50명

▲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학생들이 체벌을 받고 있는 모습. 이런 장면은 7, 80년대에는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아직 정년은 한참 남았다. 그러나 조만간 교직을 떠나는 게 옳다는 생각을 굳히면서 서른 해 가까이 머문 교사의 자리를 무심히 돌아볼 때가 더러 있다. 떠난다 해도 퇴임식도 퇴임사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자신에게 건네는 퇴임의 변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다. 그게 내 존재와 삶의 확인일 터이므로.

 

아이들, 사랑, , 인간, 성장, 존엄성 따위의 단어로 조합된 몇 개의 글귀가 떠올랐지만, 고개를 젓는다.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참회록이 아닌가 싶어서다. 시인 윤동주는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의 삶에도 참회록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교단에서의 내 삶에는 그보다 더 길고 무거운 참회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교직에 오래 있을수록 죄가 많다던 이야기는 시쳇말로 불편한 진실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이들 성장의 길목을 지켜보는 이들이 교사다. 아이들이 겪는 질풍노도의 시간 속에 교사들도 함께 있다. 아이들이 그것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하는 주체라면 교사들은 그 시간을 지켜보는 증인이다. 교육 이론은 교사란 모름지기 조력자여야 한다고 하지만 기실 교사는 감시자통제자이기가 더 쉽다. 당연히 그 훈육의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눈짓과 몸짓 하나도 아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정작 교사들은 알지 못한다.

 

교사들이 저지르는 오류 가운데 으뜸은 역시 체벌이다. 개중에는 교육적 체벌이라고 용인할 수 있는 것들도 있긴 하다. 그러나 실제로 신체에 대한 가학인 체벌을 교육적인 것과 비교육적인 것으로 가를 만한 기준이나 잣대 따위는 없다. 그 경계가 명확하기만 하다면야 체벌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체벌에 대해서라면 정말, 나는 할 말이 꽤 있다. 그러나 나는 교과부의 간접체벌 허용방침에 대한 원론적인 글 한 편을 썼을 뿐, 말을 아꼈다. 지난해부터 여러 번에 걸쳐 체벌을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서두를 떼는 게 쉽지 않았다. 내가 불러내는 과거의 어떤 순간들이 뜻밖에 완강하게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면 변명이 될까. [관련 글 : 간접체벌 허용? ‘묘수’보다 ‘원칙’이 필요하다]

 

20여 년 전 맡은 열등반담임감당할 수 없던 아이들

▲ 이 사학에서 보낸 시기에 나는 교사로서 새롭게 태어났다. 아이들이 내 스승이었다.

1988년에 나는 한 남자 고등학교 열등반의 담임이었다. 4년 동안 근무한 여학교를 떠나 50명의 더벅머리 사내아이들과 함께한 그 1년은 내게 이 땅에서 교사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준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서른셋, 아이들 앞에서 사랑보다 객기가 앞섰던 혈기 방장한 초짜교사였다.

 

그 남학교는 짧은 기간이나마 내가 적을 두었던 모교였으나 나는 정작 학교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었다. 32, 나는 2학년 인문반의 담임으로 아이들 앞에 섰다. 교실을 가득 채운 열여덟 살 사내애들의 호기심과 적의가 뒤섞인 시선 앞에서 나는 내가 맡을 한 해가 만만치 않으리라는 걸 대번에 눈치챘다.

 

학교에 부임하고 나서야 나는 학교가 우열반 편성을 통해서 살릴 자식버릴 놈을 가려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한 학기가 지나지 않아 그게 열등생을 문제아로 만들어 내는 시스템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마치 경쟁하는 것처럼 결석과 무단이탈, 폭행과 절도 따위의 말썽을 거듭하던 열등생들과 밀고 당기며 한 해를 보냈다. 나는 그 일 년간 지독한 감시자였고, 노회한 통제자였다. 내게 주어진 재량이란 아이들이 저지른 일정 정도의 비행을 체벌로 덮을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거대한 입시공장과도 같았던 학교의 우열반 체제를 추인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첫날부터 이 열등생들의 만만찮은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4년 동안 여학교에서 다소곳한 여자애들을 가르쳤던 내게 이 선머슴아이들은 불감당이었다. 여자애들은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만다.’ 개중에 엇길로 가는 애가 없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를 흩트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교사에게 아이들은 충용한 신민일 뿐이었다.

 

그러나 사내아이들은 달랐다. 나는 예의도 갖출 줄 모르는 거친 아이들 앞에서 내가 가진 교사의 권위를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도 몰래 나는 아이들을 언제라도 내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잠재적 문제아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들을 대하는 내 태도가 매우 적대적으로 바뀌어 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월 결석 총일수 70상상을 뛰어넘는 아이들의 생활

 

아이들의 일상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밥 먹듯이 지각을 하고, 무단이탈을 하고 결석을 해댔다. 마땅한 이유 따윈 물론 없었다. 아이들은 무심히 늦잠을 자고, 밥 먹으러 갔다가 잠들어 학교 돌아오는 걸 생략해 버리곤 했다. 왜 결석했냐고 물으면 녀석들은 뒤통수를 벅벅 긁어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기도 했다.

 

덕분에 매월 출석부 정리에 한 시간 이상을 끙끙거려야 했다. 학급의 월 결석 총일수(학생들이 결석한 날을 모두 더한 것)60~70일이었다. 50명이 모두 한 번씩 결석하고도 한두 명이 열흘이나 스무날쯤 결석을 더 해야 나올 수 있는 숫자였다. 지난 4년간 내가 맡은 학급의 연간(월간이 아니다) 결석 총일수가 불과 4~5일에 그치는 것과 견주면 그때의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아이들은 이웃 과수원을 결딴내는가 하면 패싸움을 벌이고 후배들을 두들겨 팼다. 그해 6월까지 넉 달 동안 열두어 명의 아이들이 저지른 사고는 모두 6, 물어준 돈이 무려 600만 원이 넘었다. 나는 이제 피해 학생의 학부모를 달래고 적절한 수준에서 배상을 중재하는 노련한 거간꾼 노릇도 해야 했다.

 

이상이 거칠게 요약한 아이들과의 일상이다. 거기엔 아이들의 고쳐지지 않는 불성실, 규칙위반, 교사의 지도와 권위에 대한 부정 따위는 빠져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길 원했다. 나는 먼저 아이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했다. 한두 번은 용서하기도 했다. 매를 든 건 최후의 선택이었다.

 

대체로 체벌은 심리적 안정 상태에서 시행되지 않는다. 전혀 동요되지 않는 얼음 같은 심정으로 하는 매질을 보았는가. 아주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그런 매질이란 업무일 뿐, ‘교육이나 지도가 될 수 없다. 후임병들을 일렬로 엎어놓고 기계적으로 이른바 빠따를 치는 선임병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나는 대체로 교사를 체벌로 모는 것은 교사가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분노라고 생각한다. 그 분노의 속내는 좀 복잡하다. 자신의 권위를 침해당했다는 느낌, 진심 어린 지도를 몰라주고 엇길로만 가고 있는 아이에 대한 서운함, 자기 믿음을 저버렸다는 인간적 배신감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 평정심을 잃은 상태에서 저질러지는 체벌을 통해 교사는 자신의 행위가 비교육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보다는 그것이 불가피하고 정당한 권한이라는 신념을 강화하게 된다. 자신의 분노가 정당한 만큼 그로 인해 행사되는 매질도 역시 온당한 교육적 행위라고 강변하게 되는 것이다.

 

손발로 아이들을 때렸던 지난날남은 것은 분노뿐

 

지금도 나는 잔뜩 흥분해 아이들에게 매질하는 수십 년 전의 내 모습을 부끄럼 없이 상상할 수 없다. 나는 분노로 들떠 아이들에게 무차별적인 매질을 해댔다. 동기 녀석에게서 얻은 당구 큐대는 지시봉으로 쓰이기보다 이른바 타작용으로 더 많이 쓰였다.

 

그보다 더한 매는 부끄럽게도 내 손발이었다. 특히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불경스런 태도는 군대서 익힌 태권도의 발길질이 용서하지 않았다. 나는 발길질로 아이들의 뺨을 갈기기도 했다. 나는 거침없이 손을 날려 아이들의 따귀를 갈겼고, 터진 코피로 내 점퍼를 흠뻑 적시기도 했다. 아이들을 벽에다 거세게 몰아붙였고 발을 걸어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뜨리기도 했다.

 

체벌이 끝나는 순간의 적요를 기억한다. 남은 것은 피폐해진 마음과 육신이다. 아이는 퉁퉁 부어 고개를 꺾은 채 울고 있고 이성을 되찾은 교사에게 그 순간은 악몽 같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지도했는가. 분노는 타버리고 재만 남는다. 그러나 어쨌든 교사는 아이와의 싸움에서 승리자고 아이는 굴욕적 패배자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를 위로하면서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기도 했다.

 

사내아이들은 단순하다. 그런 매질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상담과 위로만으로 아이들은 마음을 연다. 어떠한 상황에도 나는 아이들을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려 했다. 교사들의 관심에서 먼 열등반 아이들에게 나는 우수반 아이들보다 더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려 애썼다. 아이들도 그걸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나는 당시 내 분노가, 내 진정성이 아이들에게 전해졌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하루가 마치 지옥 같았다. 나는 날마다 절망하고 날마다 아이들은 바뀔 수 있다는 부박한 희망에 매달렸다. 동료들은 내게 아이들은 원래 그렇다며 너무 자신을 혹사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이유로도 아이들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 학기를 마치자 나는 파김치가 되었다. 나는 일찌감치 교육운동에 투신해 있던 한 친구에게 자신이 없다, 교직을 떠나야 할 것 같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래도 자네 같은 친구가 학교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나를 격려해 주었다.

 

새 학기가 되면서 나는 매를 버리기로 했다. 대신 권한과 책임의 상당 부분을 아이들에게 돌려주었다. 나는 감시자로서가 아니라 조력자가 되기로 했다. 지지고 볶는 한 학기 동안 생긴 묘한 동질감이 우리 사이를 스스럼없이 만들어 주었다. 아이들과 나는 사제 사이를 넘는 묘한 동지의식으로 가까워져 있었다.

 

여전히 날마다 사고를 치는 몇 녀석들에게 두어 차례 체벌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비교적 편안하게 그 학기를 보냈다. 진급을 앞둔 2월 어느 날은 아이들 열다섯 명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 나는 후배의 오토바이를 얻어 타고 녀석들의 집을 찾아다녔다.

 

다음 날, 열 명쯤이 다시 학교에 나왔다. 그리고 며칠 후 종업식을 치르고 아이들과 나는 작별했다. 내가 세 들어 살던 집으로 이른바 꼴통몇 녀석이 찾아왔다. 잘못했다고, 선생님 말씀은 다 옳았지만 그걸 따르는 게 쉽지 않았다고 아이들은 내게 사죄했고 나는 그들을 정말로 용서했다.

 

이듬해 1학년을 맡으면서 나는 매를 버렸다. ‘매가 아이들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게 아이들이 내게 가르쳐 준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도에서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손을 잡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곤 했다. 내가 체벌도 일종의 스킨십인가 보다며 건방을 떤 게 그런 까닭이었다.

 

그 고통스러운 한 해를 통해 나는 수년 동안 배웠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깨우쳤다. 우열반으로 아이들을 가르는 입시학원 같았던 그 학교는 우리 교육의 미니어처 같았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무렵 태동하던 참교육 물결에 투신했다. 그리고 그해 한 학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다섯 해 뒤, 나는 경북 북부지역의 공립학교로 복직했다. 그리고 이십여 년, 나는 버린 매를 다시 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껏 한 번도 매를 들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러나 내가 예의 남학교에서 벌였던 소름 끼치는 폭력으로부터 영원히 떠난 것은 분명하다.

 

너희들,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니?... 미안하고 보고 싶구나

▲ <도가니>에서 교사의 장애아 학생 끔찍한 구타 장면에서 나는 전율했다.

얼마 전 영화 <도가니>를 보다가 나는 전율했다. 교사가 장애아 학생에게 가하는 끔찍한 구타 장면에서였다. 체벌의 동기도 그 강도도 상황도 모두 달랐지만 내가 전율한 것은 아이의 공포와 굴욕으로 일그러진 얼굴 때문이었다.

 

나는 때로 주변에 한때는 폭력교사였다고 고백하면서 그 죄를 말하곤 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거짓 참회가 아니었던가 하고 자신을 돌아본 것이다. 나는 아이의 절망적 표정을 지켜보면서 어떤 미사여구로도 그런 체벌과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체벌 금지교권과 연결 짓고 싶어 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나는 체벌이 단기적으로 교육적 효과를 낼 수 있으며, 그걸 잃는 것을 교권의 상실로 인식하는 이들의 불안감과 불만을 이해할 수 있다. 또 같은 이유로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체벌에 대한 인식이 교사나 학생, 학부모마다 다른 것은 현실이다. 그러나 체벌이 그 동기나 목적에도 불구하고 전혀 교육적이지 않다는 것은 진실이다. 매는 일시적으로 질서를 세울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질서는 매를 놓는 순간 허물어지는 신기루일 뿐이다.

 

교육은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이며, 우주인 인간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 존엄성을 짓밟는 체벌을 동원하는 것은 결코 용인되어서는 아니 된다. 필요한 것은 아이들도 미성숙하지만, 존엄한 인격체라는 인식인 것이다.

 

매가 사람을 바꿀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닫는데 나는 엄청난 수업료를 냈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사랑교육이라고 강변하며 휘두른 매 앞에 공포와 굴욕으로 상처 입은 아이들의 영혼을 생각하면 나는 온몸이 바스러지는 듯한 조바심을 느낀다.

 

언제쯤 나는 이십몇 년 전의 그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까. 어느덧 불혹을 넘긴 가장이 되어 있을 그 열등반 친구들을 만나 술 한 잔 나누고 싶다. 물론 술을 내가 사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게 온몸으로 진실을 가르쳐준 스승이니까 말이다.

 

 

 

2011. 12. 21. 낮달

 

 

 

문제아는 발길질과 따귀로...내가 왜 이러지?

[선생질, 부끄럽고요①] '체벌의 진실' 가르쳐 준 '열등반' 7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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