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막바지, 벗들과 함께 ‘변산(邊山)’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1989년 전교조 사태 때, 경북 성주와 칠곡 지역에서 같이 해직되어 도내의 해직 동지들로부터 ‘3장(張) 1박(朴)’으로 불린 벗들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는 ‘2장 1박’만이 함께했다. 3장 가운데 하나, 장성녕은 함께하지 못했다. 명도 짧았던 친구, 그는 2008년 2월 10일, 서둘러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관련 글 : 잘 가게, 친구]
1988년에 만났으니 해직 4년 반을 포함,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어느덧 22년이다.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그 세월은 초등학교 6학년짜리 늦둥이를 남겨두고 쉰넷의 가장을 데려간 것만으로도 모질고 모질었다. 고향 거창에다 그의 유골을 뿌리고 돌아오던 날, 소주를 마시며 부렸던 건주정이 어제처럼 떠오른다. 그런데 벌써 3년이 지났고 막내는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우리 네 명의 사내는 만나 하룻밤을 함께 보내곤 했다. 2006년 여름에는 장성녕이 살고 있던 밀양에서 우리는 만났었다. 우리는 산내면의 한 계곡에서 멱을 감았고 인근의 오래된 모텔에서 잤다. 그때, 밀양강 건너 영남루를 건너다보면서 나는 벗들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다. [관련 글 : 밀양, 2006년 8월(1)]
그가 떠난 뒤에도 매년 우리의 만남은 계속되었지만 어쩐지 시들하기만 했던 것 같다. 아내와 내가 혼인한 지 꼭 30년이 된 이번 겨울, 애당초 우리는 부부동반으로 나라 밖 여행을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게 여의치 않게 되면서 나라 안 여행으로 방향을 틀었다.
2010년 겨울, 변산행
변산은 일찍이 내 친구 ‘장’과 ‘박’이 각각 10여 년 전부터 인연을 맺은 땅이다. 둘은 아이들을 데리고 갯벌체험을 오면서 전교조 부안지회의 ‘정 선생’을 비롯하여 부안 지역의 문화·시민단체 회원들과 교유했던 모양이었다. 8년 전 가족여행에서 변산을 스쳐 간 게 고작이었던 우리 내외는 두 벗에게 묻어서 부안으로 간 셈이다.
16일 수요일에 출발해 18일에 돌아오는 2박 3일의 여정은 꽤 복잡하다. 능가산 내소사와 도적굴, 개암사와 채석강, 매창공원과 선운사, 고창읍성을 밟은 여정도 좋았다. 그러나 거기서 만난 눈과 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람들과 나눈 우정이 더 인상 깊었다. 여행이란 늘 그렇게 우리의 기억 속에 따뜻한 촛불 하나씩을 켜곤 하지만, 이번 여행은 훨씬 애틋하게 모두의 마음에 남았으리라.
후배 교사의 7인승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SUV)을 빌려 교대로 운전하면서 내소사에 닿았을 때 우리를 반겨준 이는 부안 토박이로 지역의 고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정 선생이었다. 그는 부안의 두 인터넷 매체 <부안독립신문>과 <부안21>을 통해 부안의 역사와 삶을 전하고 있는 이로 이틀에 걸쳐 든든하고 꼼꼼한 길라잡이가 되어 주었다. [그는 뒷날 부안의 역사를 다룬 단행본도 한 권 펴냈다. 관련 글 : 일본인 교장 패대기친 소년, 정말 불온했을까]
저녁은 정 선생이 추천한 바닷가 음식점에서 조개탕을 먹었다. 바지락, 키조개, 백합 등 온갖 조개를 끊인 조개탕에다 소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는 썩 훌륭했다. 나는 정 선생이 근무하는 곳이 30년 전에 헤어진 옛 친구의 고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지나가듯 내 친구 ‘허 아무개’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받았다.
“제 친구지요. 서울에 살고 있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이 ‘우연’ 앞에 아연했다. ‘허’는 내가 인천의 군부대에서 함께 복무한 친구니, 이른바 ‘전우’인 셈이다. 서울의 한 대학 국문과를 다니다 입대한 이 선량한 친구와 나는 꽤 친했다. 우리는 제대하고 나서도 얼마간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어느 날인가부터 소식이 끊어졌다. 그리고 흐른 세월이 30년에 가깝다.
소주의 주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이 우연 앞에 얼마간 흥분했다. 나는 꼼짝없이 70년대의 부평, 그 퀀셋 막사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차분하기만 한 정 선생이 내 가빠진 숨을 고르게 했다.
그날 밤 나는 정 선생을 통해 알아낸 전화번호로 녀석과 해후했다. 이튿날에 다시 통화하면서 그는 밤새 만나 소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운 것은 때로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정 선생의 소개를 받아 일찌감치 예약해 둔 숙소는 변산 바닷가의 펜션 ‘변산바람꽃’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게 한갓진 비유인 줄 알았지만 ‘변산바람꽃’은 복수초와 함께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하는 꽃이다. 1993년에 변산반도에서 채집하여 우리나라 특산식물로 ‘변산바람꽃’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변산반도에서 발견되었지만, 이 꽃은 한라산에서 지리산, 설악산까지 전국의 낙엽수림 아래 습기가 조금 있는 곳에서 자생한다고 한다. 너무 일찍 피어나다 보니 눈 속에서 피어나는 모습이 많이 알려져 있으나 정작 우리는 이 꽃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바람꽃 펜션에서 나눈 ‘우정’과 ‘연대’
‘변산바람꽃’ 펜션은 ‘침실에 누워 하늘의 별을 셀 수 있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객실’로 유명한 곳이다. 나무로만 지은 객실마다 하늘로 난 창으로 밤하늘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이 펜션을 지은 이는 정 선생과 함께 부안의 ‘역사문화연구회’에 힘을 보태고 있는 치과의사 서 선생이다. 40대 후반의 이 후덕한 주인장은 우리를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널찍한 창 너머로 갯벌과 바다가 훤히 내다뵈는 펜션의 식당에서 홀로 숙소에 든 여교사 이 선생과 함께 주인장과 우리는 술잔을 나누었다. 술 탓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운동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아마 영남과 호남의 경계를 넘었던가 보았다.
인구 5만의 부안에서 간행되는 정기간행물 ‘부안이야기’를 두고 지역 운동을 화제로 그런 운동의 기반이 되는 ‘토양’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공감했다. ‘토양’에 관한 한 호남과는 또 다른 영남에서 추구하는 ‘진보’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해를 나누었다.
우리가 1989년의 해직 동기들로 스무 해 넘게 우정을 나누어 온 사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주인장은 거듭 환영의 뜻을 표했다. 기실 그건 무관한 일이었지만 친구 장이 객쩍게 뇐 ‘결혼 서른 돌’에도 주인장은 각별한 관심을 표했다. 우리가 유쾌하게 담소하는 동안 바깥에는 눈이 내려 쌓이고 있었다.
문을 밀고 나가자 푸진 눈발이 마당과 통로를 하얗게 덮고 있었다. 펜션에서 기르고 있는 개 ‘아미’가 마구 뛰어다녔는데 눈은 녀석의 발자국을 하얗게 지우고 있었다. 나는 눈 오는 밤의 신부(新婦)를 그리는 작부의 꿈을 묘사한, 작가 서정인의 소설 <강(江)>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렸다.
밖에서는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다. 그녀가 남겨 논 발자국을 하얗게 지우면서.
낯선 곳으로 여행은 우리를 무장 해제하는가. 나는 적당한 감상에 빠졌다. 엔간한 시와 소설 작품은 섭렵한 정 선생과의 대화도 즐거웠다. 서정인의 소설 속 주인공은 잠든 ‘대학생’ 옆에서 ‘눈 오는 밤의 신부’를 꿈꾸었지만 나는 바닷가 ‘나무집’에서 한갓진 ‘감상주의’(sentimentalism)에 젖었다. 이런 시간이라면 감상도 용서될 수 있으리라.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일행은 탄성으로 아침을 맞았다. 발이 빠질 만큼 넉넉하게 내린 눈이 세상을 하얀 설원으로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눈 덮인 펜션의 목조 건물은 그림 같았다. 눈밭을 뛰어다니는 아미의 하얀 털은 눈빛을 닮아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이 개를 ‘상근’이라고 불렀다. 더 볼 것 없이 이는 ‘미디어의 폐해’다.
축복과 행운의 강설
빵과 샐러드로 아침을 들고 주인장이 손수 내려준 커피를 마시고 우리는 이틀째 답삿길에 나섰다. 눈이 온 누리를 하얗게 물들였지만, 날씨는 차지 않았다. 눈 덮인 주변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찻길은 깨끗이 녹아 있는, 그야말로 ‘더는 좋을 수 없는’ 날씨였다.
눈 내린 뒤에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여정 가운데서 만난 눈이었다. 그것도 온 세상이 함박눈으로 덮였건만 이동에 어떤 불편도 없는. 그것은 여간해서는 만날 수 없는 행운이고 축복이다. 여인네들의 기쁨과 탄성이 사내들의 그것보다 더 크고 깊었다.
하얗게 눈을 덮어쓰고 있는 개암사 대웅전의 단아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모두 이 뜻밖의 행운을 기꺼워했다. 일생 가운데 눈 덮인 산사를 만나는 기회는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개암사는 8년 전에 만난 모습과는 달리 중창의 모습이 역력했지만, 눈이 그 덧칠을 감추어 주었다.
줄포만 갯벌 습지와 곰소 염전을 돌아 정 선생은 우리를 변사면 마포리에 있는 폐교 마포초등학교에 둥지를 튼 부안생태문화활력소로 안내했다. 이곳은 부안의 생태와 문화를 결합하여 부안의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곳이라 했다.
무심코 스쳐 지나갈 수 있었는데 나는 정 선생에게서 이 폐교가 바로 박영근(1958~2006) 시인의 모교라는 얘길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안 출신의 박 시인은 얼마 전 내가 블로그를 통해 소개한 조영관(1957~2007) 시인의 친구다. 조영관 시인을 모델로 ‘작업화를 신는 사람’을 그린 이는 박영근 시인의 부인이었다던가. 나는 겹치는 기억과 인연으로 우정 경건해졌다.
‘인연’과 ‘연대’ 사이
활력소로 들어서자 벽면을 가득 채운 인물사진을 보면서 나는 잊고 있었던 부안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모두가 반핵을 기치로 촛불로 봉기한 부안의 민초들이다. 어린이와 노인들, 농어민과 상인들,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 싸운 반핵 항쟁에서 그들은 승리했다. ‘활력소’는 그런 주민들의 힘을 바탕으로 주민문화와 지역문화의 활성화를 위한 주체적 공간이고자 하는 곳으로 보였다.
이틀째 밤은 자별한 시간이었다. 주인장 서 선생이 우리를 위해 만찬을 준비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들의 우정과 우리 내외의 서른 돌을 축하하는 뜻에서 스스로 요리를 만들었다. 그는 포도주에 잰 갯장어를 손수 구웠고 그 귀한 황복탕으로 우리를 대접했다. 샴페인까지 곁들인 저녁 식사는 모처럼의 호사였다.
그는 요리를 즐긴다고 했다. 요리를 통해서 창의적 활동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한 요리를 즐겁게 먹는 사람들을 보는 걸 즐거워한다고 했다. ‘전교조에 대한 경의’를 담은 그의 건배사에 나는 진실로 기꺼워하여 마지않았다.
바닷가에 달이 떴다. 정월 대보름달이었다. 펜션의 테라스에서 나는 오래 달을 바라보았다. 바닷가의 달은 더 큰 것 같아, 하고 아내가 중얼거렸다. 굳이 보름달을 보고 소망을 되뇌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 밤의 피날레는 펜션 지하에 마련된 공연장에서 치러졌다. 안락의자로 마련한 객석 저편 스크린에 주인장은 뉴 에이지(New Age) 아티스트 야니(Yanni)를 불러냈다. 야니의 공연 실황 DVD는 우리를 압도해 버렸다. 무식한 남정네들과 달리 여자들은 그의 음악에 흠씬 빠져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주인장 서 선생과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바람꽃을 떠났다. 그는 서둘러 출근한 것이었다. 부안읍의 기녀 시인 매창(梅窓)의 묘소를 돌아 고창을 거쳐 우리는 다시 영호남의 경계를 넘었다.
대구에서 저녁을 먹고 벗들과 헤어져 안동으로 오는 우등고속 버스 속에서 나는 서 선생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뜻깊게 보낸 시간이었다, 베풀어 준 우정을 잊지 않겠다는 짧은 글이었다. 퇴근 전일 듯해 전화 대신 보낸 쪽지였다.
짧은 시간 동안 만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시나브로 그들과 무던한 사이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그들과 우정을 나누어 온 것처럼 생각되었다. 2박 3일간의 여행에서 나는 30년 전의 옛 친구의 안부를 찾았고, 한 시인의 모교를 방문했고, 정 선생과 서 선생, 두 분과 만나 인연을 맺었다.
옛 친구의 소재를 확인하면서 나는 ‘우연’이라고 말했지만,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교직(交織)해 낸 우리 삶과 사랑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연처럼 우리 삶 곁에 다가오지만 이미 만만찮은 인과로 이어진 ‘필연’인 까닭이다.
바빴던가. 바람꽃의 주인장 서 선생은 이튿날에 메시지 답신을 보내왔다. 아, 그 역시 ‘인연’을 이야기했다. 그걸 ‘연대’라고 해도 좋으리라. 무엇이라 부르든 나는 부안과 내가 아주 넉넉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쯤 우리는 다시 부안을, ‘변산바람꽃을’ 찾게 될까…….
선생님들의 우정과 사랑이 부러웠고 그런 모습으로 거친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꿋꿋하신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 인연이 저에겐 중요합니다. 자주 뵙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돌아오는 길, 장이 그랬다.
장성녕도 우리와 함께했겠지?”
우리는 웃었다. 정말 그는 우리와 함께했을까. 이 겨울의 2박 3일은 그와 함께 한 2006년 여름의 1박 2일과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있었다면 훨씬 더 정겹게 우리는 부안에서의 2박 3일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묵은 2006년 여름의 사진 속에서 넉넉하게 미소 짓고 있는 장성녕, 그가 간절히 그리워진다.
2011. 2.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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