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경상도 사람의 전라 나들이 ② 군산(群山) 겉핥기

by 낮달2018 2018. 12. 19.
728x90

생애 첫 전북 군산 기행

▲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바라본 군산내항. 군산항은 1899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개항되었다.

군산(群山)에 대해서 내가 아는 건 선양동(善陽洞)’밖에 없다. 군 복무 시절에 같은 중대의 부사관 가운데 군산 사람이 있었다. 그는 늘 자기 고향이 군산’, 그것도 착할 선자, 볕 양자 선양동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때만 해도 호남 땅을 한 번도 밟지 못한 때라 나는 무심코 흘려듣고 말았지만 그 어감이 선유(仙遊)’라고 할 때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군산, 일제 쌀 수탈의 전초기지

 

인터넷 검색을 통해 군산의 각종 정보를 살펴보면 군산은 단순히 하고많은 지방도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군산은 1899년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강제 개항된 이후 일제의 쌀 수탈 전초기지, 곧 미곡 반출항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옥구반도와 고군산군도 등 황해의 섬으로 이루어진 전라북도 북서부 해안의 항구도시인 군산은 금강과 만경강 하구의 넓은 간척지에 충적평야가 펼쳐지는 곳이다. 전형적인 쌀농사 지역인데다 곡창지대여서 군산은 일제 수탈의 전초기지가 되는 걸 피하지 못했다.

 

이어서 전주-군산 간 포장도로가 전국 최초로 개설(1908)되고, 익산-군산 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군산은 호남 최대의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이는 물론 일제의 수탈을 위한 것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1926년말 현재 30정보 이상의 규모를 가진 일본인 농장의 수는 전라북도가 제일 많았다. 그만큼 소작농이 많았다는 뜻인데, 군산의 쌀 수출은 부산 다음의 전국 2위였다고 한다.

 

군산은 어업도 성하다. 성어기에는 남해안에서 조기떼를 따라 올라온 고깃배들이 어청도 근방에서 고기를 잡아 대부분 군산으로 집결하므로 어시장로 성황을 이룬다. 해안 양식업도 성하며 대규모 염전도 개발되어 있다.

 

군산은 일제 수탈 탓에 일찌감치 항구로 개발되었으나 1960년대 산업화 시기엔 발전이 지체되었다. 1차 산업과 식품공업 위주의 산업구조가 중공업 위주의 2차 산업으로 바뀌게 된 것은 1990년대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이른바 ‘서해안 시대’가 개막되면서였다.

 

군산이 시(市)가 된 건 1949년이고 옥구군과 통합하여 도농복합시인 군산시가 된 것은 1995년이다. 2008년 새만금군산경제자유구역청이 개청함으로서 이후 지역 발전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인구는 2014년 12월 현재 278,098명(남141,252, 여136,846).

▲ 일제 강점기 역사의 현장을 보수 복원하여 기억의 공간으로 재조명한 군산근대역사박물관
▲ 군산미곡취인소. 일제는 조선인 토착자본의 잠식과 미곡의 수탈, 반출을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미두장을 법제화했다.
▲ 군산미곡취인소의 '금일 미곡시세현황'. 얼마나 많은 정주사가 저기 일희일비했을까.
▲ 근대생활관의 인력거방. 오른쪽에는 형제 고무신방이다.
▲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장항선의 철도역 임피역(臨陂驛).
▲ 근대역사박물관 바깥에 있는 옛 창고인 허청. 각종 농기구가 전시되어 있다.

군산이 관광도시로 떠오른 것은 세계 최장의 33.9㎞ 새만금 방조제가 완공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말도 많은 새만금보다 더 사람들을 군산으로 모으는 것은 매우 풍부하게 남아 있는 일제 시기의 근대 건축물이 아닌가 싶다.

 

군산 신흥동에는 영화<타짜>, <범죄와의 전쟁> 등의 배경으로 쓰였던 일본식 가옥 히로쓰 가옥이 있다. 또 우리나라에 얼마 남지 않은 일본식 절로 아직도 절 기능을 하고 있는 동국사(東國寺)가 있는 곳이 군산인 것이다.

 

<탁류>, 그 식민지 시대의 비극적 삶

 

무엇보다 내게 군산은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濁流)>(1938)의 고장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 대학시절에 과제로 읽은 이후 <탁류>를 제대로 읽어낸 것은 몇 해 전이다. 1930년대 식민지 시대의 어둡고 뒤틀린 현실을 고발, 풍자하고 있는 이 장편을 통해 나는 만만찮은 친일 전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적 저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련 글 : 채만식, “조선 사람은 닛본징(日本人)’이다. 닛본징이 되어야 한다]

 

미두장은 군산의 심장이요, 전주통(全州通)이니 본정통(本町通)이니 해안통(海岸通)이니 하는 폭넓은 길들은 대동맥이다. 이대동맥 군데군데는 심장 가까이 여러 은행들이 서로 호응하듯 옹위하고 있고 심장 바로 전후좌우에는 중매점(仲買店)들이 전화줄로 거미줄을 쳐놓고 앉아 있다.

 

     - 채만식, <탁류> 중에서

 

미두장의 정식 명칭은 미곡취인소(米穀取引所)다. 미두는 일본 오사카(大板)의 미곡 시세를 놓고 3개월 단위로 쌀값을 예측해서 현물 없이 쌀을 사고파는 행위를 이른다. 실제 쌀이 거래되는 게 아니라 일정한 시점을 쌀을 사거나 팔 권리를 거래했던 것으로 일종의 공인된 도박장 노릇을 했다.

 

미두장은 조선인 토착자본의 잠식과 미곡의 수탈, 반출을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일제에 의해 법제화되어 1932년에 문을 열었다. <탁류>의 여주인공 초봉의 파란 많은 삶도 이 미두에 손을 댔다가 패가망신한 아비 정 주사 때문이었다. 실제 미두장은 근대와 수탈의 상징이자 식민지 자본주의의 물질적 욕망의 표상이었던 셈이다.

 

군산을 찾겠다고 벼르기만 하다가 막상 길을 나서면서 나는 그 여정에 전주도 끼워 넣었다. 이왕 나선 김에 전주를 거치자고 생각했고 전주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자, 남은 시간은 실제 한 나절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완주군의 한 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군산에 들어온 것은 오전 10시가 넘어서였다.

▲ 군산근대박물관 왼쪽에 서 있는 옛 군산세관. 한국은행 본점 및 서울역사와 양식이 비슷하다.
▲ 일본제18은행은 군산 최초의 은행으로 1907년에 세워졌다. 지금은 근대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 1922년에 신축한, <탁류>에서 초봉과 혼인하는 고태수가 다니던 은행으로 묘사된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우린 곧장 군산시 장미동의 근대역사박물관에 들렀다. 근대역사박물관은 군산의 근대문화와 해양문화를 주제로 한 특화박물관이다. 해양물류역사관(1층), 근대자료규장각실(2층), 근대생활관(3층)으로 구분된 전관을 돌아 나오면 군산의 근대를 가볍게 체험해 볼 수 있는 구조라는 얘기다.

 

근대생활관은 역시 요즘 추세대로 식민지 시대의 군산 거리를 재현해 놓았다. 군산미두장도 재현되어 있는데 거기 걸린 ‘미곡시세현황’이 기록된 칠판이 흥미로웠다. 그건 또 얼마나 많은 정 주사들의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 숫자들이었을까. 군산미곡취인소는 6·25 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

 

박물관 인근 거리는 근대 산업유산인 근대 건축물 몇 동을 묶은 근대문화벨트화 지역이다. 박물관 왼쪽에 군산세관이 있고 반대편으로 나오면 지금은 근대미술관으로 쓰고 있는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 네거리 왼편에 있는 조선은행 군산지점이 그것이다.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지금 근대건축관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근대건축관은 1922년에 신축한, <탁류>에서 초봉과 혼인하는 고태수가 다니던 은행으로 묘사된 바로 그 건물이다. 이 은행은 당시 일본상인들에게 특혜를 제공하면서 군산과 강경의 상권을 장악하는데 바탕이 되어준, 일제강점기 침탈적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은행이었다.

▲ 근대건축관 뒤편의 탁류길에 서 있는 소설 <탁류>의 등장인물들의 상.
▲ <탁류>의 여주인공 초봉

조선은행 맞은편에 있다가 6·25 때 소실된 미두장은 지금은 네거리 한쪽에 표석만 남아 있었다. 건축관 뒤편에 소설가 채만식의 작품을 쌓아놓은 책 모양으로 조형한 상징물과 <탁류>의 등장인물들의 동상이 일렬로 서 있었다.

 

중앙에 서 있는 여인이 초봉이다.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여러 사람의 눈길을 받지만 수동적인 성격의 이 여인은 어려운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한다. 그러나 곧 남편을 잃고 두 남자를 거쳐 딸 하나를 낳고 끝내는 살인자가 되는 비극의 인물이다.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비극은 식민지 시대의 어둡고 혼탁한 현실에서 배태된다. 일제가 토착자본의 잠식과 미곡의 수탈, 반출을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개설한 미두장이 아니었다면, 그 미두장에서 재산을 잃고 딸을 팔아 자신의 안일을 추구한 정 주사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산항이 미곡 수출항으로 흥청이고 일본인들에 의해 근대 건축물이 들어선 한 세기 이전에도 사람들의 삶은 그것과 무관하게 이어지고 흘러갔다. 생산자인 백성들의 뜻과는 무관하게 식민지 수탈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식민지 백성들의 삶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 채만식의 소설목록을 새긴 조형물

우리의 군산 엿보기는 그쯤에서 끝났다. 이내 점심때가 다가왔고, 우리는 서둘러 점심을 먹으러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는 근대건축관도, 미술관도 들어가 보지 않았다. 사진 몇 장을 찍는 걸로 우리는 탁류길 구경도 마쳤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마 차를 돌리면서 나는 우정 군산과의 만남은 이 정도에서 마치기로 마음을 정했던 것 같다.

 

군산에서의 ‘점심 먹기’ 전말

 

군산에도 맛집이 넘쳤다. 내비게이션에 딸애가 인터넷에서 검색한 중국집 ‘복○루’를 입력하고 예의 식당을 찾았다가 우리는 낭패했다. 호젓한 이면도로에 있는 그 중식집 앞에는 구불구불한 줄이 한참이나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로 검색해 얻은 조선은행 앞의 ‘빈○원’도 마찬가지였다. 가게 앞 줄이 짤막해서 기대를 갖고 서 있었는데 가게 안을 들여다 본 아이는 혀를 내둘렀다. 가게 안의 줄이 바깥 줄의 몇 곱이었다는 것이었다. 다시 검색해 찾은 한정식집 ‘한○옥’도 가게 앞에 선 손님들의 줄은 마찬가지였다.

 

날씨는 뜨거웠고, 이리저리 걷느라 우리는 잔뜩 지쳐 있었다. 끼니를 해결하는 게 이리 만만찮은 일인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가 내린 최후의 결론은 무엇을 먹든 인근의 가장 가깝고 호젓한 식당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한○옥’ 부근의 어떤 중국음식점에서 삼선짬뽕 등을 먹는 걸로 점심을 때웠다. 그 식당은 바로 들어갈 수 있었으나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할 때쯤에는 주렴 밖으로 두어 사람이 새로 줄을 서 있었다. 이게 ‘군산에서의 점심 먹기’ 전말이다.

 

배가 부르자, 의욕은 더 꺾였다. 우리는 월명공원으로 오르려다가 30분쯤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얘길 듣고 차를 돌렸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경암동 철길마을이었다. 1944년 일제가 신문용지 재료를 실어 나르기 위해 준공한 철길, 19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선제지 철도’라 불렸다는 철길이 지나가는 곳이었다.

▲ 경암동 철길마을. 1994년 일제가 만든 이 길에는 2008년까지 기차가 지나다녔다.

원래는 바다였는데 일제가 이 지역을 매립해 생긴 동네가 경암동이다. 군산화물역으로부터 인근의 신문용지 제조업체까지 놓인 이 철길의 길이는 약 2.5km. 2008년에 운행을 멈추면서 이 철길엔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대신 관광객들이 마을을 찾아온다.

 

“나는 군산을 다녀오지 못했다”

 

▲ 채만식 장편소설 <탁류>

거기 철로 양옆으로 빽빽하게 집이 들어찬 묘한 풍경이 있었다. 이열횡대로 마주보고 길게 늘어서 있는 판잣집이 정겹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했다. 어느 집 벽에 걸린, <난쏘공>의 영희가 머리에 꽂았던 꽃, 노란 팬지 화분이 어쩐지 외로워 보였다. 결국 이 이색 풍경도 일제가 남긴 유산인 셈일까.

 

사진 몇 장을 찍고 우리는 서둘러 군산을 떠났다.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언젠가 다시 군산에 오마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멀어져 가는 시가지에다 약속했다. 그때는 차근차근 군산 거리를 제대로 밟으리라.

 

우리가 한 도시를 ‘다녀왔다’고 말할 때, 그 범위는 얼마쯤일까. 이른바 패키지 관광으로 갔다 와도 우리는 어디를 다녀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짠 여정으로 이 도시를 찾았는데 정작 나는 ‘군산을 다녀왔다’고 말하기가 그렇다.

 

우리는 앞서 이야기한 히로쓰 가옥과 동국사는 물론, 채만식 문학관도, 옛 임피역도, 발산리 유적지도 가지 못했다. 은파호수공원은 물론 월명공원에도 가 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군산 시내 곳곳, 째보선창과 꽁나물고개에 세워진 ‘채만식 소설비’를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군산 여행은 우정 ‘군산 겉핥기’의 시간으로 정리해 두기로 했다. 뒷날, 어느 햇살 좋은 봄날이거나 바람 선선한 가을날을 기약하면서 말이다. 그땐 굳이 예의 중국집이나 한정식집에서 줄을 서지 않고도 푸근한 식사 시간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2015. 6. 22. 낮달

 

 

[경상도 사람의 전라 나들이 ①] 전주한옥마을

 

그날의 댓글들

평화바라기 2015/06/23 11:57

그깟 중국집 보다 박물관 근처 아무 집에나 들어가도 군산은 음식 잘하는 곳과 한식 잘하는 곳이 굉장히 많습니다. 음식을 먹어보면 전남 보다 전주가 훨 낫고, 일제 때 부터 돈이 돌던 곳이라
군산 사람들 입맛이 굉장히 고급입니다.
 
일본식 주택에 들어가면 묘한 역사의식을 느낄 수 있고, 군산 월명공원에 올라가면
일본 사람들이 석양을 바라보면서 황금들판을 소유한 흐믓함에 잔뜩 기고만장했을 기시감을 느낍니다.
 
발산리 유적에 가면 한국의 문화재를 탐욕스럽게 수집한 한 중산층의 헛다리를 맞닥뜨릴 수 있지요
 
낮달 2015/06/24 07:23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데나 들어갔다 실패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아무 식당에나 쓱 들어가기가 쉽지 않지요.^^
다음 기회에 군산을 제대로 돌아볼 작정입니다. 고맙습니다.
 
랄랄라.com 2015/06/23 13:52
그래도 알차게 보셨네요. 잘 봤습니다.
 
낮달 2015/06/24 07:24
하여간에 군산은 하루이틀로 보고 말 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이 여행의 수확이라고 여기고 있지요. 고맙습니다.
 
노랑기자 2015/06/24 07:29
초봉이 참 예쁩니다
 
낮달 2015/06/28 22:18
예쁘지요. 그런데 참 기구한 삶을 살게 되지요...
 
美의 女神 2015/06/24 20:57
임피역과 발산초등학교를 다녀오셨으면 좋으셨을탠데요. ^^
 
낮달 2015/06/28 22:19
글쎄 말입니다. 뒷날을 약속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어서 정말 아쉬웠습니다~
 
군산사람 2015/07/01 09:10
군산은 지방 소도시지만 갈 곳이 참 많습니다
청암산 수변로 산책도 좋구요월명산,은파공원
은파호수주변 분위기 좋은 산타로사 커피숍
파라디소(파스타 )화덕쟁이(깔조네 생면파스타)
낚시터 매운탕집 이성당빵집 등등
또 비응도 쪽 싸구려 커피지만
경치가 억반금을 주고 바꾸지 않을 풍경이 죽이는
바다가 보이는 휴게소도 있구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