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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미황사, 처음 찾았으나 ‘삼황(三黃)’의 아름다움을 만나진 못했다

by 낮달2018 2023.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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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 기행] ⑤ 달마산 미황사(美黃寺)(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2023.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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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 달마산 미황사. 달마산은 불상과 바위 그리고 석양빛의 조화 등 '삼황(三黃)'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전해진다. ⓒ 디지털해남

미황사는 내가 가보지 못한 절집 목록의 맨 위에 있는 절이다. 남도 이야기만 나오면 미황사를 주워섬긴 세월이 10년을 훌쩍 넘겼지만, 여전히 나는 미황사를 찾지 못했다. 까닭이야 뻔하다. 같은 도내의 울진이나 안동에 가는 것도 마음먹는 게 쉽지 않은데 천릿길에 가까운 먼 데니 ‘말해 무엇하리오’이기 때문이다.

 

미황사를 만나러 가는 길

 

이번 남도 기행은 황 선생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남도 이야기가 나오면서 갑작스레 결정됐다. 늘 그렇듯 미황사를 부르댔더니 이참에 한번 가보자며 의기투합이 이루어졌다. 이왕 가는 거 필암서원도 끼워 넣었으니, 이번 여행은 온전히 내 묵은 원을 푸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아침에 대흥사를 둘러보고 나와 미황사 산문 앞에 닿은 게 정오가 가까워져서였다. 대흥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達摩山, 470m) 기슭에 깃들인 대흥사의 말사다. 달마산은 그렇다, 누구에게나 떠오르는 인물, 인도 승려이며 중국 선종의 비조인 달마대사와 관련된 이름의 산이다.

▲ 미황사의 가을. 달마산 능선의 기암괴석과 함께 어우러진 풍경은 미황사를 가장 아름다운 절로 기리게 된다. ⓒ 트레블아이

달마산은 멀리서 보면 마치 긴 공룡의 등을 연상시키는 산등성이에 온갖 기암괴석으로 수십 폭 병풍을 펼치고 있는 산이다. 달마산 능선에서는 남해의 섬이 내려다보이고, 능선부에 병풍같이 늘어선 흰색 수직 바위 봉우리들이 연출하는 풍광이 빼어나 ‘남도의 소금강’이라 불린다. 달마산은 불상과 바위 그리고 석양빛의 조화 등 ‘삼황(三黃)’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남도의 소금강’, ‘삼황(三黃)’의 아름다움

 

달마산 산등성이를 타고 봉우리 너덧 개를 기다랗게 두르는 총 4개 코스, 17.74㎞의 길이 ‘달마고도(高道)’다. 2017년 개통한 달마고도는 바다를 배경으로 12개의 암자를 끼고 있는 숲길로 소사나무와 편백나무 등 산림 군락과 달마산 동쪽의 땅끝 해안 경관도 볼 수 있는데 이 길을 한 바퀴 도는 데 6시간 정도 걸린다.

 

달마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영암군 산천’ 조에 있다. 달마산은 이미 고려시대 이전에도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산이었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편 불법의 28대 계승자인 달마대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선(禪)의 씨앗을 심고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달마를 선종의 비조로 모시는 한·중·일과 베트남 그 어디에도 달마대사의 행적이나 지명을 가지고 있는 곳은 없다.

▲ 미황사의 전각들. 맨 오른쪽 2층 누각이 자하루고, 그 뒤편에 있는 팔작집이 대웅보전이다. ⓒ 미황사 누리집

당시 중국인들은 달마대사가 해동으로 건너가 안주한 곳이 달마산이라며 찾아오고 부러워했다는 게 고려 때 무외(無畏) 대사의 글에도 남아 있다. 미황사의 옛 문헌에는 한결같이 미황사가 달마대사의 법신(法身: 부처의 몸)이 항상 계시는 곳이라 기록하고 있다. 한편, 달마산의 이름은 미황사 창건 연기 설화에 등장하는, 부처님의 설법 또는 경전을 뜻하는 다르마(dharma)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달마산 기슭에 깃든 미황사(美黃寺)는 우리나라 육지의 가장 남쪽에 있는 절집이다. 통일신라시대 749년 의조 화상이 창건한 미황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0)과 조선 숙종 때 병조판서 민암(1636~1693)이 지은 ‘미황사 사적비’(1692)에 다음과 같은 창건 연기 설화가 전한다. [미황사 누리집 바로가기]

 

749년 8월 한 척의 석선(石船)이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는데, 의조가 제자 100여 명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해변으로 나갔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에 오르니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고, 놓여 있는 금함(金函) 속에는 <화엄경>·<법화경>·비로자나불·문수보살·보현보살·40성중(聖衆: 성자의 무리)·53선지식(善知識:불교 지도자)·16나한의 탱화 등이 있었다.

 

곧 하선시켜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금인이 나타나 자신은 인도의 국왕이라며, “금강산이 일만 불(一萬佛)을 모실 만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미 많은 사찰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되돌아가던 길에 여기가 인연토(因緣土)인 줄 알고 멈추었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모시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 하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창건하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라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고 하여 ‘미(美)’ 자를 취하고, 금인의 빛깔을 상징한 ‘황(黃)’ 자를 택한 것이라 한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에서

▲ 달마산 미황사 일주문. 특이하게도 문 좌우로 담장이 이어지고, 현판은 한글 가로쓰기로 썼다.
▲ 미황사 전각 배치도. 미황사 안내도를 재구성하였다.

이 창건 설화는 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반영한 것으로, 실제로 고려시대 13세기 후반 30여 년간 남송의 사람들이 미황사에 내왕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황사는 고려 후기에 널리 알려졌고, 조선 전기에도 사세를 유지했다. 영조 연간에 기록된 미황사 ‘대법당 중수 상량문’에 따르면 정유재란 때 절의 일부가 소실되어 중수하였고, 효종·영조 연간에 불사가 이루어졌다.

 

19세기 중반 쇠락해진 미황사, 1989년 이후 중흥

 

19세기 중반 이후, 100여 년간 미황사는 쇠락한 채로 있다가 1989년 이후 10여 년간 중창 불사를 하고, 1996년 만하당을 짓고 누각을 복원하는 등의 노력으로 중흥되었다. 미황사의 전각으로 대웅전, 응진당,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승방), 세심당·향적전(객실), 자하루 등이 있다.

 

산 중턱을 한참 올라 일주문에 이르렀는데, 양옆으로 담과 이어진 일주문의 현판이 색다르다. ‘達摩山 美黃寺(달마산 미황사)’는 여느 현판과 달리 한글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쓰기다. 글자의 획에다 그림을 그려 넣거나 울긋불긋한 색칠을 하기도 했고 맨 오른쪽 아래엔 한글로 ‘달마산 미황사’라고 써놓았다. 부처님의 세계에 당도한 사부대중의 경계를 일순에 무너뜨리는 편액이다.

▲ 자비의 108계단의 끌. 축대 위에 모습을 드러낸 천왕문. 중간 통로에 윤장대가 보인다.
▲ 사천왕문 앞의 담과 나무들. 해남에는 유난히 아름다운 상록활엽수가 많았다.
▲ 미황사 천왕문. 2013년에 세운 천왕문에 사천왕을 봉안한 것은 2020년이다.
▲ 검은소가 받치고 있는 서방 광목천왕의 모습. 험상궂지 않은 귀공자풍이다.

일주문에서 사천왕문까지의 길은 “부처님을 향하여 오르는 걸음마다 일체 세상의 고통, 불행, 아픔을 함께 나누고 씻어내길 발원”하는 ‘자비의 108계단’이다. 꽤 가파른 돌계단을 휘적휘적 오르는데, 구부정하게 굽이도는 길가의 동백나무 잎이 흐린 날씨 속에서 빛을 냈다.

 

축대를 이용해 전각과 당우들을 배치한 산지 가람

 

길가에는 오직 나무와 숲, 미황사는 마치 그 미지의 모습을 꽁꽁 감추고 있는 듯했는데, 자연석이 박힌 길바닥과 돌계단이 거듭되는 왼쪽으로 휘돌아 오르는 길 끝 저 위에 사천왕문이 나타났다. 사천왕문은 마치 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아 의연히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돌계단 끝은 일주문처럼 양옆으로 돌을 섞은 흙담이 기와를 이고 이어졌고, 사천왕문 앞 담장 안쪽에 선 상록활엽수 고목이 좋았다.

 

2013년에 세운 사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의 맞배집으로 가운데 칸 통로에 윤장대(輪藏臺:내부에 경전을 넣고 팽이처럼 돌릴 수 있게 만들어진 책장)를 배치하였다. 양쪽 칸에 세워진 사천왕상은 무심히 일별하고 말았는데 돌아와서야 그게 험상궂은 얼굴과 장대한 기골의 사천왕이 아니라, 우아한 귀공자풍의 사천왕상이었음을 깨달았다.

 

고대 선조들의 사천왕상을 현대적으로 재현해보겠다는 주지 금강 스님의 발원에서 비롯하여 2020년에 점안한 이 사천왕상은 악귀 대신 동물이 발치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창건 설화에 나오는 검은 소, 토끼, 용, 원숭이 등의 동물이 사천왕을 받들어 공덕을 짓는 모습인데, 미술사학계에서는 이를 삼국시대 사천왕상의 유력한 원형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관련 기사 : 해남 미황사의 파격귀공자풍 사천왕상’ 5년 만에 완성]

▲ 산기슭을 오르며 축대를 쌓고 계단을 올라야 하는 미황사 자하루 앞. 축대 아래 수국이 탐스럽게 피었다.
▲ 미황사의 2층 누각 자하루. 일 년 내내 진도 바다의 일몰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 한다. 대웅전 쪽에는 '만세루' 편액이 걸려 있다.
▲ 1980년대에 주춧돌만 남은 자리에 복원한 앞면 7칸,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누각이다. 안쪽에는 '만세루' 편액이 걸려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서 마주친 풍경 앞에 나는 잠깐 흔들렸다.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전각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소나무와 단풍나무 속에서 그 모습의 일부를 드러냈는데 그게 어쩐지 어수선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팔작집으로 조성한 선다원(찻집) 앞을 지나니 축대의 소나무 사이로 2층 누각 자하루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이는 물매가 완만한 달마산 서쪽 경사면 중간 부분을 다듬어 대지를 조성하고 산지 가람 특성대로 여러 단의 축대를 이용해서 각종 전각과 당우들을 기능에 맞게 배치함으로써 공간 활용도를 높인 결과다. 축대를 오를 때마다 계단 양옆에 심긴 수국이 탐스러웠다.

 

자하루(紫霞樓)는 1980년대에 주춧돌만 남은 자리에 복원한 앞면 7칸,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누각으로 일 년 내내 진도 바다의 일몰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 했다. 아래층 통로를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대웅보전 앞마당에 닿는데, 아니 뭔가 이상하다.

▲ 대웅전 해체보수 공사(천일의 휴식)에 들어간 미황사. 대웅전은 물론, 주변에도 조립식 임시 건물을 씌워놓았다.
▲ 미황사 대웅보전(보물). 단청하지 않은 검박한 건물인데도 기품이 넘치는 불전이다. 전각 앞에 괘불대가 보인다.ⓒ 디지털 해남
▲ 괘불재와 미황사 음악회가 열리고 있는 대웅전 앞뜰. 괘불대에 걸린 그림이 보물 괘불탱이다. ⓒ 디지털해남

대웅보전 대신 해체보수 공사에 들어간 잿빛 임시 건물만

 

전각 배치도에 나온 것처럼 대웅보전이 그 단아한 모습을 드러내야 할 자리엔 잿빛의 높다란 임시 건물이 덩그렇게 자리했을 뿐, 대웅보전의 자취는 임시 건물 안에 감추어져 있는가 보았다. 임시 건물 벽에 3년간 이어질 대웅보전 해체보수공사를 ‘대웅보전-천일의 휴식’이란 이름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보물 미황사 대웅보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팔작집인데, 달마산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조선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주춧돌은 앞면 4개와 옆면 2개를 특이하게 연꽃무늬에 자라, 게 따위를 조각한 돌을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자연석을 썼다.

 

미황사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는 대웅전을 만나러 왔는데, 잿빛 구조물밖에 볼 수 없게 된 것은 불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대웅전 뒤쪽 언덕의 응진전도 축대에 우거진 나무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맥이 빠져서 객실인 세심당을 지나 달마선원을 돌아 도솔암 가는 산길 앞에서 나는 한참 앉아 있었다.

▲ 달마선원 앞. 숲과 나무들 사이에서 선원은 고적했다.
▲ 달마선원 뒤쪽의 도솔암 가는 길. 이 임도는 달마고도로 이어지는 길이기도 하다.
▲ 도솔암 가는 길에 있는 미황사 부도전. 미황사 에 전해지는 27명 고승의 승탑이 세워져 있다. ⓒ 디지털해남

다음 목적지는 도솔암인데, 대흥사 앞에서 만난 문화유산 해설사는 미황사 뒤쪽 길로 가라고 알려주었었다. 주차장에 내려가서 차를 끌고 온 황 선생과 함께 기세 좋게 산길을 출발했지만, 승용차로 임도를 달리는 건 무리다 싶어서 우리는 차를 돌려서 달마산을 내려왔다.

 

여행에서 돌아와 여기저기서 대웅보전 이미지를 모아서 들여다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언제 다시 미황사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런 기회가 남은 삶에서 내게 한 번 더 허용될 수는 있을까 하는. 아직 일흔도 되지 않았는데, 궁상을 떠는 것은 때로 확정되지 않는 삶에서 그건 전혀 변수가 아니라고 생각한 결과다.

 

동백의 숲까지 나는 간다 / 저 붉은 것 / 피를 토하며 매달리는 간절한 고통 같은 것

어떤 격렬한 열망이 이 겨울꽃을 피우게 하는지 / 내 욕망의 그늘에도 동백이 숨어 피고 지고 있겠지

 

박남준 시인의 시 ‘동백-미황사에서’의 첫 연을 나직하게 중얼거려본다. 언젠가 동백꽃을 피우는 격렬한 열망을 만나러 미황사를 다시 찾아보리라고 자신에게 우정 약속을 한다. 그것은 지켜지지 않아도 그만인 이 불확정한 삶만큼 막연한 미래에 대한 기약일 터이다. 

 

 

2023. 7. 24. 낮달

 

[남도 기행] ① 전남 장성군 북하면 백암산(白巖山) 백양사(白羊寺)

[남도 기행] ②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남도 기행] ③ 강진 백운동 원림(강진군 성전면 월하안운길 100-63)

[남도 기행] ④ 두륜산 대흥사(大興寺)(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남도 기행] ⑥ 달마산 도솔암(兜率庵)(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마봉리)

[남도 기행] ⑦ 해남윤씨 녹우당(綠雨堂) 일원(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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