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서산대사 의발 전한 ‘호국 도량’, 초의선사의 ‘다선일미’도 꽃피다

by 낮달2018 2023. 7. 15.
728x90

[남도 기행] ④ 두륜산 대흥사(大興寺)(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2023.6.21.)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두륜산 대흥사 전경. 통일신라 말기 이전에 창건되었고, 임란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을 보관하면서 위상이 달라졌다. ⓒ 디지털해남

앞서 얘기하였듯 1994년 복직하던 해 예천지회에서 ‘남도 1번지’ 답사라는 이름의 역사 기행에 참여하면서 처음 대흥사에 들렀다. 그런데 기억나는 건 꽤 먼 숲길을 걸어 올라갔다가 무슨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내려왔다는 게 고작이다. 비록 30여 년이 흘렀다고는 해도 비어 있는 기억의 공백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29년 만에 다시 찾은 두륜산 대흥사

 
대흥사 근처의 펜션에서 묵고 아침 식전에 대흥사를 찾았다. 29년 전의 답사를 함께한 황 선생은 절로 들어가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한 긴 숲길만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매표소에서 대흥사 앞 주차장까지 2㎞ 남짓한 숲길은 아닌 게 아니라 ‘십 리 숲길’, 또는 봄이 오래 머무는 숲인 ‘장춘(長春) 숲길’로 불릴 만한 길이었다.

▲ 주차장에서 대흥사로 오르는 숲길. 정말 걸어야 할 길은 여기가 아니라, 매표소에서 주차장에 이르는 산책로 '구림구곡' 숲길이다.

두륜산(頭崙山, 700m) 대흥사는 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이다. 두륜산은 예로부터 ‘대듬’ 또는 ‘한듬’으로 불렸다. 그래서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므로 본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흥사 누리집 바로가기
 
대흥사의 창건설은 꽤 복잡다기하다. 426년(백제 구이신왕 7)에 신라의 정관 스님이 대흥사 산내 암자의 하나인 만일암을 창건, 이후 508년(무령왕 8)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선행(善行) 비구가 중건하였다고 하나 정관 존자(尊者)는 생애나 활동 내용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 서산대사 휴정 진영(대흥사 표충사 소장)

임란 당시의 승병장이었던 중관 대사 해안의 저술인 <죽미기(竹迷記)>는 544년(신라 진흥왕 5) 아도화상의 창건설을 전하며, 자장과 도선이 계속해서 중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대둔사지(大屯寺誌)>(1823)를 편찬한 혜장(1772~1811)은 창건자의 활동 시기로 볼 때 이들 기록은 모두 신빙성이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지금으로선 대흥사의 정확한 창건 시점을 밝히기 매우 어려운 상태다. 그러나 현재 사찰 내에서는 대체로 아도화상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응진전 앞에 세운 삼층석탑이 통일신라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므로 대흥사는 늦어도 통일신라 말기 이전에 창건된 고찰임은 분명하다.
 
대흥사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아직 대규모 사찰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였으나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의 의발(衣鉢)을 보관한 이후 한국불교의 종통(宗統)이 이어지는 중요한 위상의 도량으로 크게 바뀌었다. 휴정은 대흥사를 일러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으로 만 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만년불훼지지(萬年不毁之地)]”이라 한 바 있었다.
 
* 의발(衣鉢) : [불교]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아울러 이르는 말. 스승이 제자에게 전해 주는 불교의 교법(敎法)이나 오의(奧義)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표충사의 외삼문인 호국문. 서산대사 휴정은 임란 때 의승군을 조직하여 평양성 탈활에 큰 공을 세웠다. 정조 때 사액 사당을 세웠다.

오래 묘향산에서 머물러 ‘서산(西山)대사’로 불리는 휴정은 한때 대흥사에 주석하기도 한 선승이다. 임진왜란 때 5천 의승군(義僧軍)을 조직하여 평양성 탈환 등에 큰 공을 세운 휴정은 선조에게서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의 칭호를 받았다. 이에 1788년 정조가 대흥사 표충사(表忠祠)를 사액하고 이듬해 사우를 건립한 뒤 이 사찰은 호국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서산대사의 의발을 전해받아 ‘호국신앙’의 중심이 되다

 
서산대사의 의발을 전해 받은 덕분에 대흥사는 배불(排佛)의 분위기에서도 숱한 인재를 배출하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 도량으로 모습을 새롭게 하였다. 대흥사에서는 초의선사 등 13 대종사(大宗師 : 대흥사를 빛낸 13명의 고승)와 만화 ·범해 스님 등 13 대강사(大講師 : 화엄사상을 빛낸 13명의 화엄학 강사)를 배출하였으며 13대종사 가운데 초의로 말미암아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 문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대흥사는 2018년 6월 30일, 대한민국의 산사(山寺) 6곳(통도사·부석사·봉정사·법주사·마곡사·선암사)과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으로 지정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절집 안에 유교식 사당이 존재할 만큼 종교적 개방성을 보여준 데다 “신앙과 일상적인 종교적 실천의 살아있는 중심”으로서 남은 신성한 장소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 대흥사의 승탑원(부도전). 대흥사를 빛낸 서산대사를 비롯한 고승들의 승탑을 모아 놓은 곳이다. 산문으로 가는 길 오른편에 있다.
▲ 대흥사 산문 주변의 소나무 고목. 대흥사 주변엔 이런 고목들이 빽빽하다.
▲ 대흥사 산문에 오르기 전에 만난 단풍나무. 깨끗하고 정갈한 단풍잎은 이 산사의 품격을 시사하는 듯했다.

남원과 북원, 별원 등 세 구역으로 나뉜 독특한 가람배치

 

대흥사는 절을 가로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으로 당우들을 배치한 계류형 산사다. 대흥사는 북원(北院)에서부터 시작되어 해탈문과 침계루 밑을 지나는 금당천 너머 남원(南院)으로 확장되었는데 사찰의 일반적 가람배치 형식을 따르지 않고 당우들을 자유롭게 배치한 공간 구성이 독특하다.
 
승탑원을 지나 대흥사 경내로 들어서면 초입에 해탈문이 있다. 마주 뵈는 산기슭에 전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어느 쪽부터 들여다봐야 할지 우리는 잠깐 망설였다. 미리 자료는 챙겨왔지만,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탓이다. 넓은 산간분지에 자리한 대흥사의 가람배치는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표충사·대광명전·박물관)의 3구역으로 나뉘어 있다고 했다.

▲ 두륜산 대흥사 일주문. 두륜산은 대둔산으로 불리었고, 대흥사도 한때 대둔사로 불리었다.
▲ 대흥사 경내로 드는 해탈문. 지나면 널찍한 앞마당에 이르는데, 대흥사는 남원과 북원, 별원의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 해탈문 쪽에서 바라본 대흥사의 전각들. 보이는 것은 천불전 등이 있는 남원이다.
▲ 대흥사의 전각 배치도.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에서 가져와 재구성했다.

일단 범종각을 지나 남원 중심에 자리 잡은 천불전부터 들렀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집이 정면의 높다란 장대석 축대 위에 올라앉았다. 왼쪽에는 봉향각, 오른쪽에는 옛 강원 용화당이 마당을 둘러싼 독립된 공간이니 남원의 중심 전각으로 손색이 없다. 조선 후기 건물의 특징을 보여주는 천불전은 2013년 보물로 지정됐다.
 
전각 안의 천불상은 경주 지역의 불석산 옥돌로 만들어졌는데, 경주에서 2척의 배편으로 대흥사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풍랑으로 1척이 표류해 일본으로 갔다가 돌아와 1818년 8월 15일 천불전에 추가로 봉안되었다. 편액은 대웅보전 편액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명필 원교 이광사가 쓴, 이른바 ‘원교체’다. 

▲ 보물 천불전. 대흥사 남원의 중심 전각이다. 경주의 옥석으로 만들 천불을 봉안하고 있다. ⓒ 디지털 해남(내 사진은 흔들렸다.)
▲ 대흥사 천불전의 꽃살문과 '천불전' 편액. 당대의 명필 이광사의 글씨다.
▲ 대흥사 천불전 아래 두 그루의 500년된 느티나무. 두 나무의 뿌리가 이어져 한몸이 된 '사랑의 나무'라고 한다.

돌아 나와 금당천을 따라 북원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천불전 아래 길옆에 두 그루의 500년 된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다. ‘대흥사 연리근’이라 쓰인, 두 나무의 뿌리가 서로 이어져 한 몸이 되었으니 남녀가 서로 만나 인연을 맺고 사랑을 나누며 평생을 같이할 부부가 되어 한 몸이 된 ‘사랑의 나무’란다.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은 것을 연리지(連理枝)라 하지만, 두 나무의 뿌리가 서로 이어진 것은 ‘연리근(連理根)’이라 부른다.
 
연리근 나무를 지나서 금당천을 가로지른 심진교(尋眞嬌)를 건너면 앞면 5칸, 옆면 3칸의 2층 누각이 북원의 출입문 침계루(枕溪樓)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등이 자리했다. 정면에 걸린 초서로 흘려 쓴 ‘침계루’ 편액도 이광사의 글씨다. 누각 아래 통로로 대웅보전 앞 중정으로 드니, 마당엔 연등이 빽빽하게 걸렸다. 심진교와 침계루, 대웅보전이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며, 이를 가로질러 좌우에 대향각과 우백설당이 중정을 형성했다.

▲ 대흥사를 남북으로 가르는 금당천을 건너면 북원인데, 누각인 침계루를 지나면 대웅보전이다. 다리는 심진교다.
▲ 대흥사 주 불전인 대웅보전. 편액은 이광사의 글씨. 추사가 자신의 글씨로 교체했다가 나중에 되돌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대웅보전 앞의 요사채 백설당. '무량수각'이라는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이광사의 글씨와 함께 대흥사의 명필로 꼽힌다.

대웅보전은 대흥사의 주 불전으로 앞면 5칸, 옆면 4칸의 단층 전각으로 다포양식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처마 가운데 세로쓰기 두 줄로 쓴 ‘대웅보전’ 편액이 걸렸는데, 이 역사 이광사(1705~1777)의 글씨로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쓴 대웅전 앞 백설당의 ‘무량수각(無量壽閣)’ 편액과 함께 대흥사의 명필로 꼽힌다.

 

1840년 제주도로 귀양을 가던 추사가 대흥사에 들러 벗인 초의선사에게 대웅보전의 편액을 새로 써서 이광사의 편액 대신 걸게 했다. 추사는 선학(先學)인 이광사의 원교체에 대해 시종 지나치리만큼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추사는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로 와 자신이 쓴 편액을 떼어내고 이광사의 편액을 다시 걸게 하였다고 한다. 유배의 고초를 겪으면서 이 금석학 대가의 심미안은 흔들렸던 것일까.
 
나머지 전각을 간단히 돌아보고 북원을 나와 다시 남원 쪽을 향한다. 남원 일곽의 돌담을 따라 용화당 좌측에 자리한 차 문화의 산실인 대흥사 동다실(東茶室)을 지나면 남원 뒤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서산대사 사당인 표충사(表忠祠)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이다.

▲남원의 동다실(관음전) 부근. 오른쪽에 보이는 단풍나무는 두륜산의 단풍 관측을 위한 '관측표준목'이다.

박물관은 지나치고 호국문을 거쳐 표충사에 이른다. 표충사는 서산대사 휴정과 제자 사명대사 유정·처영 등 3인의 영정을 봉안한 사액 사우(賜額祠宇)로 사찰 경내에 사당을 겸한 특별한 형식이다. 1788년(정조 12) 천묵 세 분의 영정을 모시고자 조정에 상소하자, 정조는 세 승려의 충정을 크게 치하하며 친히 표충사라 사액하였고, 이듬해 사우를 건립하였다.
 
현재 표충사는 부처의 삼보(三寶) 도량 가운데 승보(僧寶)를 존중하고 받들어 불가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구현한 도량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 유가(儒家) 형식의 사당을 꾸며 매년 서산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례와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는데 이는 종교적 개방성의 표지로도 읽힌다.
 

대흥사와 산내 암자에 국보 1, 보물 8점


대흥사 경내와 산내 암자에는 국가지정문화재로 국보가 1점, 보물이 8점에 이른다. 그 밖에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56점, 문화재자료 2점이 있다. 또, 대흥사는 사적으로, 두륜산 대흥사 일원은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 지정번호는 ‘문화재보호법 시행령’과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을 개정하여 2021년 11월 19일부터 폐지되었다.)

▲ 대흥사의 산내 암자인 북미륵암의 고려시대 마애불인 국보 마애여래좌상.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대흥사의 보물들. 북미륵암 삼층석탑과 서산대사 탑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의 사진이다.
▲ 대흥사의 성보문화재.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참고

대흥사에서 1시간 이상 산을 올라야 하는 산내 암자 북미륵암에 있는 고려시대 마애불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국보, 고려시대 삼층석탑은 보물이다. 대흥사 경내 보물로 대흥사 삼층석탑(응진전 앞), 서산대사탑(승탑원), 서산대사 유물(성보박물관), 금동관음보살좌상(성보박물관), 석가여래삼불좌상·영산회괘불탱(대웅보전), 천불전 등이 있다.
 
성보문화재의 수효로 절집의 위상과 중요성을 말할 수는 없지만, 그건 한편으로 그 절집의 이력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국가에서 세운 대표적인 호국 도량이면서 조선 후기 숱한 선승(禪僧:참선과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과 교학승(敎學僧:교리와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을 배출하여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칭호를 받은 서산대사의 의발을 전수한 도량으로서의 몫을 다한 것이다.

▲ 대흥사의 13대종사 중 한 분인 초의선사. 다도를 중흥시켜 다성으로 불린다.
▲ 일주문 안쪽에 걸린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선종이 숲을 이루고 교종이 바다를 메우니 모두가 어우러진 도량)' 현판.
▲ 대흥사 경내를 빠져나오는 길의 다리 '피안교'. 이 내를 경계로 '피안'과 '차안(此岸)'이 나뉜다.
▲ 주차장에서 매표소에 이르는 십리 숲길. '구림구곡(九林九曲)'으로도 불리는 길이다. ⓒ 디지털 해남

‘선림교해만화도량’ 대흥사, 초의의 ‘다선일미(茶禪一味)’

 

하산하는 길, 일주문 안쪽에 걸린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선종이 숲을 이루고 교종이 바다를 메우니 모두가 어우러진 도량)’의 뜻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13분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1786~1866)가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 불리고, 대흥사가 우리 차 문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니, 그가 주창한 ‘다선일미(茶禪一味)’는 일상과 선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님을 이름이었다.
 
내려오는 숲길은 오를 때 보이지 않았던 아니, 보지 못한 나무와 숲을 새롭게 보여주었다. ‘십 리 숲길’은 달리 마을 이름을 따서 ‘구림구곡(九林九曲)’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숲 터널’보다 ‘초록색 동굴’이라는 비유가 더 탐탁하게 느껴졌다.
 
숲길 주변의 나무들은 소나무, 왕벚나무, 편백나무, 삼나무, 서어나무, 떡갈나무, 단풍나무, 대나무, 동백나무 등 남도 지역에서 자생하는 수종 대부분을 망라한다고 한다. 물론 돌아와 확인한 정본데, 그 숲길을 차를 타고 올라 놓고, 내려올 때도 걷지 못한 걸 나는 여러 차례 뉘우쳤다. 다시 숲길을 다시 찾을 기회가 있기는 할까, 나는 하릴없이 데스크 탑 폴더 속의 숲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2023. 7. 15. 낮달

 

[남도 기행] ① 전남 장성군 북하면 백암산(白巖山) 백양사(白羊寺)

[남도 기행] ②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남도 기행] ③ 강진 백운동 원림(강진군 성전면 월하안운길 100-63)

[남도 기행] ⑤ 달마산 미황사(美黃寺)(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남도 기행] ⑥ 달마산 도솔암(兜率庵)(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마봉리)

[남도 기행] ⑦ 해남윤씨 녹우당(綠雨堂) 일원(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