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경치를 빌려와 정원에 담은 ‘전통 원림’의 백미 백운동 원림

by 낮달2018 2023. 7. 13.
728x90

[남도 기행] ③ 강진 백운동 원림(강진군 성전면 월하안운길 100-63)(2023. 6. 20.)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백운동 12경 중 제1경 옥판봉. 정선대에서 바라본 월출산 옥판봉의 수려한 모습이다. ⓒ 강진문화관광
▲ 명승 115호로 지정된 백운동 원림의 내원, 맨 앞이 별채인 '수소실', 뒤의 초가가 취미선방, 맨 뒤가 안채 '자이당'이다. ⓒ 강진문화관광
▲ 다산이 백운동의 풍광을 시, 그림으로 만들 <백운첩>

무위사에서 나와 지척에 있는 백운동 정원에 들르겠느냐는 황 선생의 권유에 그러자고 해놓고도 나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아마, 그건 남도의 별서 정원이라면 담양 소쇄원(瀟灑園) 정도로만 알았던 내 무지에다, 거기가 난생처음 듣는 원림(園林)인 까닭이었을 것이다.

 

내가 백운동 원림이 그저 그런 정원에 그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것은 안운 마을의 백운동 원림 안내도 앞에 서면서였다. 2019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강진 백운동 원림 안내도는 초의선사가 그린 백운동도에다 백운첩과 백운동 12경을 소개하고 있었다.

 

<백운첩(白雲帖)>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 1812년 초의선사(草衣 1786~1866)를 비롯한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을 등반하고 백운동에 들러 하룻밤을 묵은 후 백운동의 풍광을 시로 쓰고 그림으로 그린 시첩(詩帖)이다. 백운동의 풍광을 잊지 못한 다산은 초의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서시와 발문, 백운동 12경 중 8수(옥판봉, 산다경, 백매오, 유상곡수, 창하벽, 정유강, 모란체, 취미선방)의 시를 직접 지었다.

▲ 백운동 입구에 세운 안내도의 모습. 초의선사가 그린 '백운동도'에 백운동 12경을 표시해 두었다.

그리고 초의가 3수(홍옥폭, 풍단, 정선대), 제자 윤동(1793~1853)이 1수(운당원)를 쓰게 하여 총 14수의 시를 완성했다. 마지막으로 백운동과 다산초당 중 어느 것이 아름다운지 겨뤄 보고픈 마음으로 초의에게 다산초당도(다산도)를 그려 넣게 한 뒤 당시 백운동 4대 동주 이덕휘(1759~1828)에게 선물했다.

 

다산과 강진, 그리고 백운동 원림

 

강진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이 유배되어 18년간이나 머문 고장이다. 그는 후반기 11년을 다산초당에서 머물면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비롯한 500여 권에 이르는 저서를 남겼다. 강진은 다산이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을 포괄하는 거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긴 곳인 셈이다.

▲ 백운동에 별서를 마련한 백운동은 이담로가 새긴 암각 '백운동'. 원림으로 들어가는 숲길에 있다.
▲ 백운동 원림으로 들어가는 동백나무 숲길, 제2경인 산다경이다. 계곡은 말라 있고, 비가 내리는 숲길은어두웠다.
▲ '푸른빛 절벽 바위에 써둔, 붉은빛 큰 글자'라는 제6경 창하벽. 다산이 붉은 먹으로 쓴 글씨가 있다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

조선 중기 이담로가 조영한 원림, 호남의 3대 정원

 

백운동은 조선 중기 처사 이담로(1627~1701)가 들어와 계곡 옆 바위에 ‘백운동(白雲洞)’이라 새기고 조영(造營)한 원림이다. 유홍준은 “일본인들이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 낸…식민지 시대에 이식된 단어”인 정원(庭園)과 달리 원림을 “동산과 숲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칸과 정자를 배치한 것”으로 설명한다.

 

전통 원림 가운데 현재까지 명승으로 지정된 원림은 7개소다. 순천 초연정 원림(2007)을 비롯하여 보길도 윤선도 원림(2008), 담양 소쇄원 원림(2008), 예천 초간정 원림(2008), 담양 명옥헌 원림(2009), 안동 만휴정 원림(2011), 화순 임대정 원림(2012) 등이 그것이다. [관련 글 : ‘풀과 물의 원림(園林)’ 20권 20책의 ‘백과전서’를 낳았다(예천 초간정) / 그 정자에 ‘안빈낙도(安貧樂道)’가 보인다(안동 만휴정)]

 

백운동은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약사암과 백운암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월출산 능선의 기암괴석이 보이는 백운동 계곡은 담양 소쇄원, 완도 보길도의 세연정(洗然亭) 등과 함께 호남의 3대 정원으로 불리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자연관과 철학적 사유가 깃든 은일(隱逸) 공간이다.

 

이담로는 옥판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그냥 떠나보내기 아쉬워 아홉 굽이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이루게 하고 정자를 앉혔다. 매란국죽(梅蘭菊竹)을 비롯해 소나무·단풍나무·동백나무 등 다양한 수종을 심어 다른 별서(別墅: 농장이나 들이 있는 곳에 한적하게 지은 집) 정원에 비해 제대로 갖춘 원림이 되었다.

 

이담로의 백운동 원림에는 숱한 시인 묵객이 찾아 그림과 시,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그 중 대표적인 이가 다산과 초의였다. 초의는 해남 대흥사에서 정진하던 중 귀양 온 다산을 만나 유학의 경서를 배우면서 스승으로 섬겼다고 한다.

 

우리는 이슬비가 내리는 백운동 원림으로 들어가는 동백나무 숲길로 들어섰다. 백운동 원림은 외담을 기준으로 내원(內園)과 외원(外園)으로 나뉘는데, 외원의 나무다리에서 내원까지의 거리는 약 200m 남짓했다. 대낮인데도 비가 뿌리는 숲속은 어둡고 축축했다.

▲ 창하벽에서 외담을 따라가면 원림의 내원으로 들어가는 솟음삼문에 이른다. 주변에 단풍나무가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 백운동 원림 내원으로 들어가는 솟을삼문. '백운유거'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마을에서 원림으로 가는 이 오솔길이 백운동 12경 중 제2경인, ‘동백나무숲 그늘에 조성된 좁은 길’이라는 뜻의 ‘산다경(山茶徑)’이다. ‘산다’는 ‘산에서 나는 차꽃’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동백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때는 6월, 동백꽃을 보려면 겨울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빽빽하게 들어찬 동백숲을 보는 것만으로도 거기 점점이 들어박힌 동백꽃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산이 붙인 백운동 12경

 

이담로가 각자(刻字)한 ‘백운동’ 바위를 지나 계곡을 가로지르는 조그만 데크 다리를 건너자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푸른빛 절벽 바위에 써둔, 붉은빛 큰 글자’라는 제6경 창하벽(蒼霞壁)이다. 다산이 붉은 먹으로 쓴 글씨가 있다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바위를 지나 담장을 따라 오르자 이내 ‘백운유거(白雲幽居)’라는 현판이 걸린 백운동 원림의 솟을삼문이다. 꽤 널찍한 마당에 왼쪽 축대 위에 올라앉은 세 칸 초가가 제9경 취미선방(翠微禪房)이다. 산허리[취미(翠微)]에 세운 세 칸 초가의 사랑채로서 선방처럼 꾸밈이 없이 고즈넉한 방이다.

 

정면에 마루를 낸 방 한 칸짜리 별채가 추사 김정희가 쓴 편액을 단 ‘수소실(守素室)’이다. 그 앞으로 계곡의 물을 끌어와 마당을 거쳐 돌아나가도록 인공적으로 조성한 아홉 굽이의 물굽이가 제5경 ‘유상곡수(流觴曲水)’의 물길이다. 이는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그 잔이 자기 앞으로 오기 전에 시를 읊어 즐기는 풍류놀이다.

▲ 내원 마당의 왼쪽 축대 위에 올라앉은 세 칸 초가가 제9경 취미선방이다. 세 칸 초가의 사랑채로 선방처럼 꾸밈이 없이 고즈넉한 방이다 .
▲별채인 수소실 앞, 계곡의 물을 끌어들여 마당을 거쳐 돌아나가도록 인공적으로 조성한 아홉 굽이의 물이 제5경 '유상곡수'다.
▲ 내원 마당 가운데의 한 칸 방과 마루가 있는 별채 수소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탁자에 다기가 놓여 있다.

오른쪽 담장에 난 일각문을 지나 외원으로 나가면 언덕 위에 있는 정자가 ‘신선이 머무는’ 제11경 ‘정선대(停仙臺)’다. 정자에 앉아서 원림의 내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월출산의 아름다운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제1경 ‘옥판봉(玉版峰)’이다. 월출산의 아름다운 봉우리는 남도의 끄트머리에 있지만, 국립공원의 위상을 환기해 준다.

 

정선대에서 바라보는 옥판봉, 백운동 원림의 차경(借景)

 

정선대는 굳이 신선을 이르지 않더라도 원림의 내원과 외원을 두루 살피면서 그것을 완상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원림의 백미라 할 만하다. 동백나무와 은행나무, 비자나무, 대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넉넉한 숲이 연출하는 풍경은 주변의 모든 풍광을 하나로 수렴하는 듯했다.

 

원림은 비록 인공의 자취를 지울 수 없지만, 그것을 넉넉하게 안은 주변의 풍경이 이 별천지를 사람의 공간으로 되돌리고 있었다. 정자의 누마루에 앉아 담장 너머 왕대나무 숲을 바라보면서 나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고 중얼거렸다. 하늘로 솟아오른 듯한, 빽빽한 왕대나무[운당(篔簹)] 숲이 바로 제12경 ‘운당원(篔簹園)’이다.

▲ 백원동 원림의 담밖 언덕 위의 '정선대'. '신선이 머무는 정자'로 제11경이다. 여기선 내원의 대부분이 한눈에 들어왔다.
▲ 정선대에서 바라보면 월출산 옥판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있는 풍경을 정선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으로 '차경'하여 제1경으로 삼았다 .
▲ 원림 내원 담밖의 왕대나무 숲. 하늘로 솟아오른 듯한 빽빽한 대숲이 바로 제12경 운당원이다.

원림 안팎의 경관을 활용하는 한국 전통 조경

 

우리 전통 조경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려 하는 데 있다. 그래서 함부로 지형을 바꾸지도, 물과 꽃, 나무의 형상도 자연 그대로 이용할 뿐 인공적 힘을 가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경은 백운계곡의 물을 수로를 이용하여 조성한 연지에 끌어들인 경관처리기법에서 두드러진다. 또한 멀리 있는 풍경에 그치는 월출산 옥판봉의 수려한 경관을 정선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으로 ‘차경(借景)’ 하여 제1경으로 삼았다.

 

우리 전통 조경에서 차경은 경관을 단순히 ‘빌려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원림 안팎의 경관을 ‘활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차경은 경관의 깊이와 폭을 늘림으로써 공간감을 확대하고 결과적으로 이용자들이 원림에서 경험과 느낌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외경(外景)을 내경(內景)으로 끌어들인 이 ‘차경’의 기법 활용은 ‘전통 원림의 백미’로 평가되어 백운동 원림은 8번째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는 다시 내원으로 들어와 취미선방의 뒤쪽, 고증을 거쳐 복원된 백운동 원림의 본채에 올랐다. 앞면 4칸의 절반은 방을 들였고 나머지는 대청마루다. 당호 자이당(自怡堂)은 백운동 6대 동주 이시헌(1803~1860)이 푼 ‘스스로 만족하면 두루 즐거우니 세상의 시비를 잊었다’라고 한 호로, 추사의 서체로 새겼다.

▲ 백운동 원림의 안채 자이당. 이시헌이 푼 '스스로 만족하면 두루 즐거우니 세상의 시비를 잊었다'라고 한 호를 당호로 삼았다.
▲ 별채 수소실의 마루의 탁자와 다기들. 백운동 원림은 다산과의 인연으로 국내 차 문화의 산실이 되었다.

백운동 원림이 한국 차 문화의 산실이 된 까닭

 

다산이 1812년 제자 초의와 윤동을 데리고 백운동에 하루를 묵었는데, 이덕휘는 다산과 친해져서 아들 이시헌을 다산초당에 제자로 보냈다. 이시헌은 다산의 유배가 끝날 때까지 7년간 다산초당에서 다산에게 차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특히 다산은 이시헌에게 떡차 제다법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 돌아간 뒤에도 이시헌은 다산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매년 곡우 때 차를 만들어 보냈다. 이시헌이 후손들에게 전수한 다산의 제다법은 일제강점기 그의 집안 손자뻘인 이한영(1868~1956)에게 이어져 국내 최초의 차 상품인 백운옥판차가 탄생했다.

 

백운동 원림에는 조선 후기의 문인 신명규(1618∼1688), 김창집(1648∼1722), 김창흡(1653∼1722), 임영(1649∼1696) 등이 남긴 백운동 관련 시문들이 지금까지 전해 온다. 예나 지금이나 백운동 원림을 찾은 이들의 경관 예찬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월출산 옥판봉의 남쪽 경사지의 맨 아랫부분에 자리한 이 아름다운 원림이 13대에 걸쳐 보존된 것은 이담로가 당나라 이덕유의 ‘평천장’(平泉莊) 이야기를 유언으로 전해서다. 그는 “후대에 이 평천(平泉)을 파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며, 나무 한 그루와 돌 하나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훌륭한 자제가 아니다.”라는 유언을 손자 이언길(1684∼1767)에게 남긴 것이다.

▲ 백운동 원림의 내원에서 일각문으로 나가 언덕을 오르면 정선대다. 이 숲의 아름다움을 안 먹어도 배를 부르게 한다. ⓒ강진문화관광

백운동 원림이 오늘의 모습을 갖춘 것은 18세기 중엽 그의 후손 이덕휘에서 19세기 중엽 이덕휘의 아들 이시헌에 이르면서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운동 원림은 오랜 세월 동안 보존되어 뒷사람들에게 전통 원림의 아름다움을 전할 뿐만 아니라, 6대손인 이시헌이 정약용, 초의선사와 교류한 기록 등을 남겨 국내 차 문화의 산실로서 가치로 더한다.

 

내원에서 나와 산다경 숲길을 걸어 나오면서 나는 가능하면 가까운 날 안에 가족들과 함께 이곳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게 언제가 될지 알지 못하고, 기약한다고 해서 그게 지켜지는 것은 아니지만, 백운동 원림에서 마음에 담은 이 풍광의 감명은 오래 마음속에서 숙성되어갈 것이었다.

 

 

2023. 7. 13. 낮달

 

[남도 기행] ① 전남 장성군 북하면 백암산(白巖山) 백양사(白羊寺)

[남도 기행] ②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남도 기행]  두륜산 대흥사(大興寺)(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남도 기행] ⑤ 달마산 미황사(美黃寺)(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남도 기행] ⑥ 달마산 도솔암(兜率庵)(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마봉리)

[남도 기행] ⑦ 해남윤씨 녹우당(綠雨堂) 일원(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