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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일흔 앞둔 은퇴자들, 복사꽃밭에서 ‘낮술’을 하다

by 낮달2018 2022.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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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 복사꽃 앞에 비친 우리들 쓸쓸한 노년의 초상

*PC에서는 이미지를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 이미지로 볼 수 있음.

▲ 벗의 복숭아밭. 개 세 마리가 지키는 밭 가득 화사한 봄내음이 황홀하였다.
▲ 스무 그루 남짓 남은 복숭아나무로 짓는 그의 농사 덕에 우리는 해마다 맛이 그만인 복숭아를 얻어먹는다.

오랜만에 ‘동영부인(同令夫人)’한 ‘2장(張) 1박(朴)’이 모였다. 10년도 전에 의성 탑리로 귀촌한 장(張)의 복숭아과수원에서다. 3월 초에 모였을 때, 복사꽃 필 때 ‘도화 아래 일배’ 하자고 한 약속에 따라서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내년이면 35년에 이른다.

1989년 전교조 원년 조합원, ‘3장 1박’

1988년에 우리는 동료 교사로 처음 만나 그해 11월 지역 교사들과 함께 지역 교사협의회를 조직했다. 교협은 이듬해인 1989년 5월에 결성한 교원노동조합으로 전환했고 당시 노태우 정부는 노조 탈퇴를 거부한 교사 1600여 명을 교단에서 쫓아냈다.

그해, 우리 지역에서 마지막까지 타협을 거부한 이는 넷이었는데, 절차에 따라 모두 해직되었다. 30대 초반의 혈기방장한 이 청년들은 1살 차이에, 비사범대에 사학 출신이라는 등의 공통점이 있어서 쉬 친해졌고, 이후 4년 6개월 동안의 시간을 오롯이 나누게 되었다.

이 네 명의 사내가 내가 말하는 ‘우리’의 정체다. 그중 셋은 한자는 달랐지만 ‘장’ 씨 성을 갖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박(朴)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해직 시절부터 내내 동료들로부터 ‘3장 1박’으로 불리었다. 가까워지긴 했지만, 내남없이 무던한 사이였을 뿐, 말투는 쉽게 바꾸지 못했다. 말하자면 ‘해라’와 다름없는 ‘해요’체를 꽤 오랫동안 유지했다는 말이다.

서른아홉, 마흔 살에 각각 복직했는데, 세월이나 연륜은 때로 강파른 성격까지도 무화해 버리는 모양이다. 몇 해가 흐르면서 우리는 아무도 제의하지도,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아주 편하게 ‘해라’체를 쓰고 있었고, 마치 형제가 된 듯했다. 해마다 여름이면 우리는 만나서 하룻밤을 보내곤 했는데 2006년 밀양에서의 모임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관련 글 : 밀양, 2006년 8월(1)]

 

▲ 복숭아밭을 지키는 개와 개집, 복숭아 지주대가 널려 있는 과수원. 일행이 여기저기 쉬거나 꽃을 둘러보고 있다.
▲ 복숭아꽃빛을 보는 곳에 따라,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인다. 그 모든 빛깔을 아우르는 표현은 '화사'이다.
▲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복숭아꽃빛은 훨씬 짙고 싱싱해 보인다.

2008년 벽두에 거창 출신의 장(章)이 뇌내출혈로 쓰러졌다가 끝내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작 50대 초반에 삶을 마감한 벗을 보내야 했던 우리는 황망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4년 뒤에 그의 부인마저 배웅해야만 했다. 이상이 우리가 이가 빠진 ‘2장 1박’이 된 사연이다. [관련 글 : 잘 가게, 친구 / 지아비와 함께 편히 쉬시라]

2008년, ‘3장’ 중 하나는 남먼저 먼 길 떠나고

졸지에 부모를 잃은 딸들은 잘 자라서 스스로 짝을 찾았다. 정작 제 아이는 출가시키지 못한 우리는 대신 그의 두 딸의 혼례는 챙겼다. 늦둥이로 얻은 막내 아들만 남았는데, 녀석도 언젠가 짝을 찾으면 우리에게 기별해 올 터이다.

예순을 넘기면서 퇴직하기 시작한 우리는 어느새 60대 중반을 넘기면서 경로우대를 받는 나이에 이르렀다.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박과 나는 가끔 금성면 초전리 장의 전원주택 ‘오막재’를 찾곤 한다. 조립식 주택 옆에다 지은 황토방에 그는 ‘오막재’라는 현판을 달았는데, ‘오막’은 물론 ‘오두막’을 줄인 말이다. [관련 글 : 그, 혹은 나의 초가삼간(Ⅰ)/ 그 혹은 나의 초가삼간(Ⅱ)]

 

도회에서 태어나 농사와는 무관하게 살아온 장이 복숭아과수원이 딸린 초전리의 언덕에다 집을 짓기 시작할 때만 해도 아무도 그가 10년 넘게 복숭아 농사를 지으며 거길 지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 내외는 대구의 본가를 드나들며 편찮으신 구순의 양친을 돌보면서 농사를 놓치지 않고 있다.

그 10년 동안에 그는 농사꾼이 ‘다됐다’. 과원의 나무를 반쯤 베어내고 스무 그루 남짓만 짓기 시작한 그의 복숭아 농사는 알음알음으로 팔고, 한 3분의 1쯤은 지인들과 후원하는 시민단체 등에 보내는 거로 마감된다. 그가 지은, ‘맛이 그만’인 복숭아를 나는 해마다 얻어먹는다.

화요일 정오를 지나 박과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막재에 닿았다. 화단에 심은 빨간 튤립이 보기 좋았다. 명자꽃은 시들고 있고, 그가 산에서 씨를 받아와 심었다는 할미꽃도 졌다. 황토방 오막재 뒤쪽이 복숭아밭이다. 탑리로 가서 점심을 먹고 돌아온 우리는 복숭아밭을 돌아보았다. 화사하기로는 복사꽃을 따를 봄꽃이 어디 있는가.

 

▲ 복사꽃은 가까이서 볼 때는 젊잖은 연분홍빛인데, 조금만 물러나 바라보면 진분홍으로 바뀐다.
▲ 한쪽에 심은 배나무에 핀 배꽃 너머 연분홍 복사꽃 배경이 부시게 화사하다.
▲ 복숭아밭에 자라는 노란 유채 덕분에 복사꽃은 또 한결 짙은 빛깔을 뽐낸다.

구부정하게 굽은 복숭아나무가 다닥다닥 꽃을 매달고 있는 밭에는 연분홍 온기가 가득했다. 복사꽃은 가까이 볼 때와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가 전혀 다른 색감으로 느껴진다. 가까이서 볼 때는 점잖은 연분홍빛인데, 조금만 물러나 바라보면 진분홍으로 바뀌는 까닭이다. 그건 곱다는 느낌을 넘어 선정적인 인상으로 다가온다. ‘복숭아 도’ 자를 쓰는 ‘도색(桃色)’의 쓰임새는 거기서 비롯하는 것이다.

고운 복사꽃밭에 늙은이들이 찍은 사진이 낯설다

정오의 햇볕이 따가웠는데도 장의 안내로 그의 도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복숭아 농사 이야기며, 자신이 심은 배나무, 살구나무 등을 보여주었고, 밭 가운데 심어놓은 마늘 이야기도 했다.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그의 밭에서 바라보면 위쪽, 아래쪽 모두가 연분홍 복사꽃 일색이었다. [관련 글 : 벗의 도화원(桃花源), 그 연분홍 안개, / 봄나들이 - 초전리 ‘꽃 대궐’과 미성리 ‘그 여자’의 집]


밭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난 다음, 나는 일행을 모으고 가져온 삼각대에다 사진기를 장착했다. 나이 들면서 사진 찍는데 무심해지지 않는가, 그간 우리는 모여도 사진을 잘 찍지 않았었다. 사진기를 들고 나오다가 문득 더 늙기 전에 같이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삼각대를 챙겨온 것이다.

셀프타이머 기능을 이용해 여자들 사진 따로, 전체 사진까지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사진을 핸드폰으로 전송했더니 ‘다 늙은 꼴’이라는 장의 탄식이 돌아왔다. 그렇다, 장은 2년 후에, 박과 나는 3년 뒤면 일흔인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게다가 낮술로 불콰해진 자기 사진을 바라보는 기분은 좀 쓸쓸하다. 이 사진은 따로 공개하지 않는다. 고운 꽃 사진 사이에 늙은이들의 사진을 끼울 일이 어디 있겠냐 말이다.

우리는 본채 거실에 들어가 술과 차를 마시며 두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나누는 이야기에 두서 따위가 있을 턱이 없다. 그나마 아무도 아픈 사람이 없으니 건강 이야기만 빠지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어졌다.

물론 대선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우리는 대통령을 뽑은 게 아니라, 무슨 조직의 보스를 뽑은 것 같다고 했고, 또 일흔이 넘어서까지 내가 찍지 않은 권력의 치세를 살아야 한다니 씁쓸하다고 했다. 장은 선거권을 받은 이래 한 번도 자신이 찍은 이가 대통령이 된 적이 없다며 껄껄 웃었다. 적어도 정치적 성향에 있어서 우리는 부딪칠 일이 없다. 부모 형제 사이에도 정치적 태도로 말미암아 충돌하고 얼굴을 붉히는 일이 적지 않은데, 그건 우리의 우정이 곰삭는데 빠질 수 없는 요소다.

 

▲ 이 화사한 꽃밭에서 일흔을 앞둔 은퇴자들이 사진기 앞에 모여앉아 사진을 찍었다.
▲ 오막재를 지키는 문지기는 벗이 주워온 서양인 마네킹이다. 가슴에 안은 우편함에 '오막재'라 씌어 있다.

출가시킨 아이들이 하나도 없지만, 아무도 그 이야기는 따로 하지 않았다. 저마다 손주들 사진을 올리는 SNS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게 된다는 장이나, 엔간한 결혼식에는 축의금만 보내고 마는 나나 심정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저들의 삶을 살아갈 터, 거기에 어버이의 구실이 낄 자리는 없다.

해가 설핏 기울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순을 한참 넘기고 나면 미래를 말하는 게 조심스럽다. 100세 시대라며 길어진 평균 수명을 이야기하지만, ‘개개인에게 다다른 운명’은 저마다 다른 모습일 것이기 때문이다. 천년만년 살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이란 얼마나 위태한 과정인가 말이다. 단지, 몸져눕지 않고 덜 추하게 늙을 수 있다면 하고 바라는 것은 그래서다.

술 마신 남정네를 조수석에 앉히고 아내들이 운전대를 잡았다. 우리는 장 내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천천히 오막재, 벗의 복숭아과수원을 떠났다.

2022. 4.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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