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원 1959~2012.4.26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떼어낼 방법은 없다. ‘낙양성 십 리 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을 굳이 불러오지 않더라도 인간의 삶은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고매한 사상가도, 억만금을 가진 부자도, 대중의 사랑을 먹고살던 연예인도,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숱한 선남선녀들도 죽음의 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슬프다. 그러나 우리는 살 만큼 산 ‘자연사’는 비교적 담담히 받아들인다. 호상(好喪)이란 이름이 따르는 부음이 그것이다. 그 죽음이 더욱더 애틋한 것은 아이들의 죽음이고, 좀 이르게 찾아온 죽음이다. 그것은 ‘자연사’와 달리 쉬 받아들일 수 없는 안타까운 죽음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목요일 오후에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4년 전에 우리가 저세상으로 배웅한 친구, 장성녕의 딸이었다. 2008년 2월에 그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우리 나이로 쉰넷, 한창때라면 한창때였다. 당혹감 속에서 그를 보내면서 우리는 몹시 혼란스러웠었다. [관련 글 : 잘 가게, 친구] 그런데 그의 딸애가 또 하나의 부음을 전해 온 것이다.
“오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뜻밖의 부음은 4년 전과 마찬가지로 내 말문을 막아버렸다. 황망하다거나, 참담하다는 표현으로도 이를 수 없는 충격적인 소식에 나는 잠깐 말을 잃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신을 수습하여 의성과 대구의 ‘1장 1박’과 연락하고 나서야 아이와 통화할 수 있었다.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어디 편찮으셨던 게야?”
“계속 몸이 좀 안 좋으셨는데 오늘 갑자기…….”
젖어 있기는 했지만, 아이의 침착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 부음이 현실이란 걸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마음을 굳게 가지라고, 밀양의 선생님들께 연락하고 내일 저녁에 내려가겠다고 전했다. 나는 전교조 경북지부 누리집에다 이 부음을 올리고, 몇 군데 선후배들에게 전화를 넣었다.
지아비 보내고 4년 만에…
밀양 현지에서 ‘장생모(장성녕 선생을 생각하는 모임)’를 이끄는 박 선생이 서둘러 움직였다. 잠깐 그와 통화하고서야 이 사태를 정리할 수 있었다. 저녁에 경북복직교사모임의 총무가 내 이름으로 그의 부음을 알리자, 문상이 어려운 이들이 내 통장으로 부의금을 넣기 시작했다.
4년 전 친구의 부음을 알린 이가 고인이었다. 그때 초등학교 졸업반이던 늦둥이 한솔이가 이제 겨우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그이가 세상을 버린 것이다. 아내도 몹시 애통해했다. 지난해 여름, 밀양을 찾았을 때 만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고인은 비록 그늘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늘 느긋하고 여유가 넘치던 사람이었다. 남편의 유고를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의연히 받아들이고 오히려 우리를 위로했던 이였다. 자리만 있으면 한두 달짜리 기간제 교사 자리도 가리지 않고 달려왔던 그 앞에서 우리가 오히려 조바심을 낼 정도였다.
다음 날, 수업 한 시간을 바꿔서 5시에 퇴근하면서 바로 기차를 탔다. 밀양의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는 8시가 넘어 있었다. 문상 온 이도 몇 없어 빈소가 쓸쓸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사람이 적지 않았다. 경북에서도 한 차례 문상객이 다녀갔고, 나머지 ‘1장 1박’. 장 선생과 박 선생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예전처럼 아이들은 의젓하고 예의 바르게 우리를 맞이했다. 한솔이도 어느새 덩치가 우람해졌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으랴. 부산에서 목회하고 있는 고인의 오라버니에게 대신 조의를 전했다. 4년 전에 벗의 배웅 길에 만났는데 그를 이렇게 다시 만났다.
맏이도 둘째도 훌륭하게 자랐다. 예전에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니던 아이들이었는데 어느새 훌쩍 숙녀로 자랐다. 큰애가 스물아홉, 둘째가 스물여섯. 직장에 다니면서 어머니를 잘 뒷바라지해 왔는데 이제 이들이 가장 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고인이 다니던 교회의 교우들과 밀양지역의 교사들도 문상을 왔다. 9시 넘어 경북에서 온 문상객들과 집을 짓다가 온 의성의 장(張)이 돌아가고 난 뒤 밀양의 박 선생, 그리고 우리 1장 1박만이 남았다. 줄곧 손님들을 모시는 일을 돕던 신실해 보이는 젊은이가 누군가 했더니 맏이의 남자친구라 했다. 그렇다. 진정 도움이 필요할 때 돕는 것이 친구니까.
나는 소주를 좀 마셨고, 박 선생과 함께 인근의 여관에 가서 잤다. 새벽에 심야 기차를 타고 울진의 김 선생이 문상을 왔다. 90년대, 장성녕이 복직해 울진으로 옮겼을 때 같이 한 동료 복직 교사다. 발인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그녀의 눈이 빨갰다. 인연이란 이리도 질기고 애틋한 것이다. 우리는 장의차를 타고 화장장에 들렀다.
한 차례 예배를 거쳐 그이의 육신이 화장로에 들어가 있는 두 시간 동안, 산 사람들은 거른 아침을 먹었다. 영남루에 올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화장로는 한 줌의 뼛가루로 고인을 돌려주었다.
1장 1박은 유족들과 함께 장의차를 타고 거창으로 달렸다. 거창은 장성녕의 고향, 그의 유골이 뿌려진 땅이다. 역시 고인도 남편을 따라가는 것이다. 밀양에서 거창까지는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시 외곽에 있는 선산은 눈에 익다. 그렇다. 고인의 남편, 친구를 보낸 곳이다.
조상 묘소 근처의 소나무 아래 임시로 유골을 묻고 고인의 오라버니인 김 목사가 기도를 하는데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눈물이 났다. 남편을 보내고 그이가 견뎌낸 4년의 세월, 거기 담긴 아픔과 외로움을 우리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유골을 묻은 자리에 놓인 몇 송이의 국화가 애잔했다. 부근에서 흙으로 돌아간 장성녕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아내를 맞이하고 있을까. 한 인간의 부재를 매장하는 시간인데, 햇살은 투명하고 4월의 산록은 연둣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안녕히 가시라. 지상의 모든 근심과 고통을 내려놓고, 넉넉한 마음의 지아비와 함께 아이들의 앞날을 지켜주시라.
돌아오는 길, 거창 읍내의 한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들고 장성녕의 아우가 먼저 서울로 돌아갔다. 조카들을 일일이 안아주고 토닥여주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핏줄의 뜨거움을 생각했다. 그는 우리에게도 각별한 인사를 전했다. 형님 장례 때에 이어 이번에도 함께 해 주어서 고맙다고. 우리는 단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했을 뿐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두 시간. 장의차는 화장장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거기서 유족들과 작별했다. 아이들과 악수를 하면서 언제든 필요할 때 불러 달라고 했다. 큰아이가 신부가 되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밀양을 떠났다.
밀양에서 대구로 오는 국도 부근에는 우리들 ‘3장 1박’의 우정의 자취가 남아 있다. 밀양 외곽의 긴늪, 거기서 우리는 콩국수를 먹고 술을 마셨고 부근의 오래된 모텔에서 같이 자기도 했다. 이번 여름에는 고인이 아니라, 아이들을 만나러 이 길을 다시 되짚어 오게 될 것이다. 그때 아이들은 더 성큼 자라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희망이리라.
2012. 5.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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