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고 장성녕 선생을 기리며
장성녕이 죽었다. 지난 10일 아침에 나는 그의 부인으로부터 그 비보를 전해 들었다. 재수술했는데…, 결국 하늘나라로 갔다는 그녀의 목소리는 뜻밖에 담담했다. 느닷없는 소식에 나는 반쯤 얼이 빠졌고 전화기를 놓고서 잠깐 허둥댔다.
죽음에 대한 전언이란 원래 그런 것일까. 그것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들리지만, 그만큼의 사실적 무게로 사람들의 일상을 헝클어놓는다. 나는 그의 부음을 알리기 위해 몇 군데 전화를 건 다음, 이 죽음의 ‘비현실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가 숨진 병원 장례식장에 전화를 걸었다. 아, 그분요, 12일 출상입니다. 직원의 대답은 건조하고 ‘현실적’이었다.
그에게 이른바 ‘풍’이 온 건 몇 해 전이다. 입원 치료 후에 그는 반년간 휴직을 했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회복한 상태로 복직했다. 그에게 뇌내출혈이 온 것은 지난 2월 2일이었다. 바로 입원해 수술을 받아 경과가 좋았으나 이내 상태가 나빠져 재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죽음 앞에서 모두가 망연자실했다. 이게 삶이란 말인가, 하는 턱도 없는 화두에 우리는 낚여 있는 듯했다. 복직교사들이 모여 간단한 추도의 시간을 가졌고, 모두 그의 영정 앞에 한잔 술을 올렸다. 빨강과 노랑꽃으로 쌓인 영정 속에서 그는 특유의 넉넉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성긴 기억을 더듬어 그의 약력을 보고했다.
언젠가 썼던 글(밀양, 2006년 8월)에서 밝힌 대로 그는 성주·칠곡의 ‘3장 1박’의 멤버다. 우리는 성주와 칠곡 지역의 사학에서 근무하다 1989년 여름 전교조 관련으로 해직되었다. 30대 초반의 혈기방장한 때였고 또 해직의 고통을 함께한 사이여서 우리는 허물없이 이후 4년 6개월 동안의 시간을 함께했다.
그리고 스무 해, 우리는 아주 쌍소리까지 섞은 ‘해라’체를 쓸 만큼 내 남 없는, 형제 같은 사이가 되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이 네 명의 사내가 모여 하룻밤을 함께 지내는데, 두어 해 동안은 우리는 그가 살고 있던 밀양에서 만나곤 했었다. 그와 함께 우리는 얼음골과 호박소, 구만폭포와 산내(山內)의 인골 계곡을 섭렵했다. 비 뿌리는 밀양강에서 천렵하던 어느 해의 저녁 무렵도 잊을 수 없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988년 여름이다. 방학 중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예비군 교육장에서였다. 휴식 시간에 학교 민주화에 대한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좀 늙수그레해 보이는 사람 좋은 인상의 교사와 나는 좀 배짱이 맞았던 것 같다. 나중에 그가 우리 집 근처에 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단위학교와 지역에서 느슨한 협의체 형식의 교원조직이 만들어지고 이듬해 5월 노동조합으로 전화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특히 지역 교사협의회를 꾸리고 이듬해 노동조합 결성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밤을 낮처럼 살았다.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배가 불렀던 시기였다.
장성녕은 진정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나중에는 무뎌지긴 했지만, 여느 사람이라면 우스개처럼 바라볼 일도 그는 진지하게 다가갔다. 그는 자신이 믿었던 모든 의와 원칙에 가장 가깝게 살았다. 그는 활동가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조직을 위한 헌신과 희생을 기꺼워했던 사람이다.
겉으로는 호인 스타일이어서 무른 사람이라고 지레짐작하지만, 그는 절대 만만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는 단호한 원칙주의자였고, 그래서 더러 원하지 않는 마찰도 겪었다. 어렵던 시절일수록 단호한 원칙을 지키는 게 쉽지 않지만, 그는 그것을 지켜냈던 것 같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는 다정다감한 친구였다. 이웃이라 동행할 기회가 아주 많았는데 돌아올 때마다 늘 나는 그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는 작별 시간이 긴 이로 유명했다. 여느 사람 같으면 악수나 하고 두어 마디 인사말이면 족할 작별도 그에게는 5분이 모자랐다. 악수를 하고 돌아서다 다시 말끝을 붙잡고 아쉬움을 달래는 그 때문에 우리는 늘 차 시간을 다투어야 했다.
해직되었다가 다섯 해 만에 복직하면서 우리는 같은 지역의 공립학교로 나란히 발령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그는 이른바 TO감(減)에 걸려 울진지역으로 전보되었다. 인사 규정을 잘못 적용한 부당인사였는데 그는 교육청을 대상으로 길고 지루한 싸움을 벌여 이태 뒤에 안동으로 돌아왔다.
딸만 둘 두고 있던 그가 늦둥이 아들 한솔이를 얻은 건 이 무렵이었다. 오랜 객지 생활에 지쳤던가, 그는 고향(경남 거창)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도간 전보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는 1998년에 김해로 발령받았고, 이태 후에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옮겼다. 우리 ‘3장1박’의 모임이 밀양에서 자주 이루어졌던 것은 이 때문이다.
발인 날은 추웠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푸근하던 날씨가 갑자기 곤두박질친 것이다. 우리는 거창의 건계정 계곡에서 산골(散骨)하기로 한 그를 마지막으로 배웅하기 위해서 거창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예정보다 장의 일정이 두 시간쯤 당겨지는 바람에 우리는 그를 배웅하지 못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그는 한 줌의 재로 선산에 뿌려지고 난 뒤였기 때문이다.
그는 거창에서 세거(世居)한 4대 성씨 중의 하나인 거창 장(章)씨다. 나는 그를 만나서 처음 그런 성씨가 있다는 걸 알았다. 건계정(建溪亭)은 거창 장씨 문중에서 선조 장종행(章宗行)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로 그들 성씨가 유래한 중국 건주(建州) 땅의 지명을 따서 건계정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다.
위천(渭川)은 장성녕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곳, 그는 거기 멱을 감으며 자랐다고 했다. 생전에 그는 자신의 주검을 화장해 위천에 뿌려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장의 행렬은 현지까지 왔다가 제지를 받고 돌아갔다. 우리는 위천 계곡의 너럭바위 위에 세워진 건계정 주변을 한 바퀴 도는 거로 장성녕을 배웅했다.
거창 읍내에서 유족들과 만나서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고 술잔을 나누면서 그를 추억했다. 뜻밖에 의연하고 담담한 모습의 부인과 아이들 모습에서 우리는 그나마 위안을 받았다. 올해 대학을 졸업하는 맏이와 3학년에 올라가는 둘째는 철이 들어서 그랬겠지만,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막내조차도 고분고분하기만 했다. 열세 살 사내아이에게 아비의 죽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대구로 돌아와 우리는 횟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띄엄띄엄 그를 추억하면서 우리는 좀 외롭고 쓸쓸했던 것 같다. 술을 마시고 흰소리를 내뱉고 더러 낄낄대곤 했지만, 마음속 슬픔이야 어찌 쉬 다독일 수 있었겠는가.
대구에 사는 장(張)은 주머니에서 원고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욕지기가 나온다”는 제목의 시 두 편이 가지런했다. 학교운영위원인 그는 회의를 마치고 회식에 갔다. 술을 마시면서도 마음은 착잡했던 모양이다. 그가 쓴 시 속에서 우리의 모습은 엇갈린다. 저 녀석은 죽었는데, 나는 먹고, 배부르고, 울고 있다……. 그것은 마치 소리가 고장 난 영화의 오열 장면 같았다.
누구든 마찬가지였으리라. 첫 문상을 다녀온 다음 날 개학을 했었다. 오후에 몸이 자꾸 가라앉는 느낌이어서 좀 힘이 들었다. 몸살이나 감기 기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은 뒤 바로 고꾸라졌다. 두어 시간쯤 잤는가. 아내가 그랬다. 당신, 상심해서 그런가 봐요. 빨리 기운 차려요….
며칠 동안 꿈자리도 어지럽고 당최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산 세월이 애매하고 어정쩡하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그 어정쩡한 고비를 무심히 지나왔지만, 장성녕은 그것을 넘기지 못한 것이다. 잘 가게, 친구. 우리의 작별인사가 공허한 것은 이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삶의 한 자락에 서 있지만 아무도 그 시간의 추이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일 터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는 마치 일상의 안부처럼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을 수밖에. 나는 입속에서만 중얼거린다. 잘 가게, 친구. … 우리는 이제 자네를 잃고 ‘2장 1박’이 되어 버렸다네…….
2008. 2. 15. 낮달
'이 풍진 세상에 > 부음, 궂긴 소식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대의 스승’ 신영복 선생을 보내며 (1) | 2020.01.14 |
---|---|
[근조] 고문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시라 (0) | 2019.12.30 |
어떤 부음(訃音), 한 세대의 순환 (0) | 2019.11.29 |
흙, 혹은 나무로 돌아가기 (0) | 2019.11.18 |
배웅, 다시 한 세대의 순환 앞에서 (0) | 2019.10.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