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아름다운 돌담길
군위의 지보사를 돌아 나와 한밤마을로 향하는 길은 의성군 금성면을 지나게 된다. 행정 명칭이야 금성(金城)이지만, 사람들에게는 탑리(塔里)로 더 잘 알려진 고장이다. 안동 조탑리(造塔里)처럼 이곳도 탑을 중심에 두고 땅이름을 지어 부른 듯하다. 조탑리의 탑이 전탑(塼塔)인 대신 이 마을의 탑은 모전(摸塼) 석탑이다. 사진이나 한 장 찍자고 들렀는데 아뿔싸, 탑은 바야흐로 보수 중이었다. 보수용 비계(飛階) 안에 갇힌 탑의 모습 몇 장을 사진기에 담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군위군 부계면에는 이른바 ‘제2 석굴암’으로 알려진 삼존석굴(국보 제109호)과 통일신라 유물인 대율사 석불입상(보물 제988호)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곳은 대율리(大栗里), 일제가 행정구역 이름을 한자로 정비(!)하기 오래전부터 정겹게 써 온 예스러운 우리 이름으로는 ‘한밤마을’이다. 작지 않은 마을, 집집이 오래된 돌담으로 둘러싸인 동네다. 그 돌담길을 눈여겨본 문화재청이 얼마 전, 이 마을길을 문화재로 등록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문화재로 등록될 영광을 입은 동리는 이 마을 외에도 경남 고성 학동마을을 비롯해 경남 거창 황산마을, 산청 단계마을, 성주 한개마을, 전북 무주 지전마을, 익산 함라마을, 전남 강진 병영마을, 담양 창평 삼지천마을, 대구 옻골마을 등이 있다. 문화재청은 이 돌담들은 전문 장인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 스스로가 세대를 이어가며 만든 것으로,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과 향토적 서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유산이라는 점을 중시해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겠다는 것.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주민 생활과 지역 개발에 불편이 따를 수밖에 없다”라며 “등록되지 않더라도 주민들이 돌담길은 잘 보존할 것”이라며 문화재 등록을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경상북도에서는 1991년에도 이 마을을 전통 마을로 지정하려 했다가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고. 어디 없이 문화재로 지정된 마을은 남모르게 여러 가지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한갓진 관광객들이야 탄성을 지르며 기념사진을 찍고, 그것을 통해 한때를 추억하고 말면 그뿐이지만, 그 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날것 그대로의 삶인 것이다. [관련 글 : 문화재등록 거부한 ‘겁 없는’ 촌부들, 누구야?]
동행한 이 선생에게 ‘부계’의 ‘부’자를 한자로 어찌 쓰느냐고 물었더니, ‘큰산 악(岳)’자 비슷한 자인데 훈은 모르겠다고 한다. 돌아와 옥편을 찾아서 확인하니 ‘장군 부(缶)’자다. 물론 여기 말하는 ‘장군’은 장수를 뜻하는 ‘장군(將軍)’이 아니라 ‘술이나 장을 담글 때 쓰는 질그릇’을 말한다. (지금도 시골에서 분뇨를 담아내는 통을 ‘똥장군’이라 한다.)
계는 당연히 ‘시내 계(溪)’이니 예부터 질그릇을 생산하던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스친 데다가 요즘 구설수에 오른 김수환 추기경이 군위의 옹기쟁이의 후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내용으로 이 선생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부계면 소재지 창평리 산에서 옛날 토기들이 많이 나온다.”라는 좀 엉뚱한 답이 날아왔다.
대율초등학교 앞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어슬렁거리며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무더위가 골목골목을 가득 고여 있는 듯했다. 무엇보다 햇빛이 너무 강렬하여 파인더 안에 담기는 골목길 저편이 하얗게 사라지곤 했다. 어쩌다 만나는 주민들 앞에 사진기를 들고 어슬렁대는 노릇은 좀은 민망할 수밖에 없다.
돌담길을 가장 제대로 찍어낼 수 있는 구도를 고민해 보았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죽 이어지는 돌담길에 쌓인 돌의 빛깔과 무게가 만만찮다. 고작 수십 년의 세월로는 저런 빛깔과 무게감이 드러나지 않을 터이다. 결국 저 돌들은 이 오래된 마을을 살다 간 무지렁이 백성들의 애환을 침묵으로 증언하는 이 마을의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군데군데 ‘마을의 좁은 골목’을 뜻하는 ‘고샅길’로 부를 만한 좁다란 골목이 벋어 있다. 내 유년의 고향의 골목도 저랬었다. 길바닥에 떨어진 것은 꼭지 빠진 감. 가을이 깊어지면 이 길바닥은 발효하고 있는 홍시 냄새가 진동할지도 모른다.
마을 한가운데쯤에 대율리 대청(大廳)이 있다. 조선 전기에 건립되었으나 임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종 때(1632) 중창된 학사(學舍)다. 대청은 이 마을 전통 가옥들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이 마을 전체가 사찰 터였고, 대청은 대종각(大鐘閣) 자리였다고 한다. 지금은 사면이 개방되어 있지만, 중창 당시에는 가운데 마루 양옆에 방을 둔 형태로 건축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상당한 규모인데도 불구하고 이 건물의 첫인상은 ‘검박(儉朴)’하다는 것이다. 단청 없이 드러난 나무의 맨살결과 사방이 트인 개방구조 덕분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꽤 큰 건물인데도 주변을 위압하지 않는 것은 이 맞배지붕 구조물이 은연중에 뿜어내는 검소하고 소박한 기풍 때문일 터이다.
골목길의 끝자락에 여름 내내 발길에 차이는 꽃이 한 무리 피어 있다. 파인더를 그득 채우는 붉은 꽃은 정말 곱다. 어느 폐가의 벌겋게 녹슨 쇠 대문 앞에 이 꽃은 꽃가루를 날리며 조신하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차를 돌리면서 나는 대율초등학교 문 위에 걸린 펼침막을 잠깐 쳐다보았다. 개방농정과 그에 따른 이농이 빚어낸 시골 학교 통폐합의 물결이 이 마을에도 미친 모양이다.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지향한다는 이 나라의 이데올로기는 천박하게도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다.
그것은 ‘시장’과 ‘자본’과 ‘효율’이라는 교의에 대한 절대적 신봉을 통해 ‘3만 불의 신화’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이 마을과 여기 사는 이들의 정겨운 삶도 저 골목 끝 강렬한 햇살처럼 순식간에 스러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바로 그러한 모순의 경계일지도 모른다.
2006. 8.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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