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그, 혹은 나의 초가삼간(Ⅱ)

by 낮달2018 2019. 8. 21.
728x90

누구나 꿈꾸는 우리의 초가삼간

▲ 내 친구의 ‘초가삼간’. 이 집에 든 지 이태째, 이제 그는 농사꾼티가 완연하다.  왼쪽 별채가 황토방이다.

내 친구 장(張)이 남 먼저 명예퇴직을 하고 의성의 어느 골짜기로 귀촌한 지 이태째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도시를 전전하며 살아온 그가 시골 산등성이의 복숭아밭 육백여 평을 사고 거기다 조립식 주택과 황토방을 짓고 살 거라 했을 때 반신반의한 것은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 농사일은 그만두고라도 시골살이의 속내를 잘 아는 것도 아니요, 어디 주말농장 같은 데서 텃밭 농사의 경험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땅을 사고 거기다 집을 짓기 시작하는 것[관련 글]을 보면서도 솔직히 내겐 그가 자신이 살아온 가락에 썩 어울리는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관련 글 : 그, 혹은 나의 초가삼간(Ⅰ)]

 

그러나 그는 그 맨땅에다 15평의 훌륭한 조립식 본채를 세웠고, 뒤이어 그 앞에다 황토방 하나를 지어냈다. 그리곤 삼십여 그루쯤 남아 있던 복숭아 농사를 지어 적과(摘果)와 봉지 씌우기를 거쳐 오백여 상자를 출하(!)하는 ‘준(準)’ 농사꾼이 되어갔다. 이태가 되지 않아 그는 내 우려(?)를 불식하고 텃밭 농사에 골몰하는 검게 그을린 건강한 농사꾼으로 거듭난 것이다.

 

어저께 친구 박(朴)과 함께(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친구를 포함 우리는 복직 동료들 사이에서 ‘3장 1박’이라 불린다.) 장의 집을 찾았다. 밀양의 다른 ‘장(章)’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우리는 여름방학 때면 1박 2일쯤의 여행을 같이하곤 했지만, 올해는 따로 시간을 내지 못한 대신 장의 집을 찾기로 한 것이다.

▲ 안개 낀 진입로. 그의 집은 마을 뒤편의 언덕바지에 좀 외롭게 서 있다.
▲ 본채 현관 앞에 열린 조롱박
▲ 일렬로 선 해바라기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는 장독대. 그것은 그가 이 집에서 누리는 평화의 일부다.
▲ 닭장 앞에 늘어진 조롱박이 마치 포탄 같다.
▲ 복숭아밭 어귀의 빨랫줄. 주변에 심은 작물 일부처럼 보이는 이 빨랫줄이 있는 풍경이 썩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황량한 산등성이에 세운 집이 어쩐지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서 친구 내외가 꾸려가는 삶이 주변 풍경조차 살갑게 바꾸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여름이다. 무성한 게 어찌 잡풀뿐이랴. 본채 테라스 앞에 활짝 피어난 백일홍과 분꽃, 호박꽃이 정겨웠고, 수돗가에는 조롱박과 수세미가 풍성했다.

 

우리는 황토방 앞에다 작은 탁자를 깔고 각각 툇마루와 베어낸 참나무 그루터기, 낡은 의자에 앉아서 서너 시간을 보냈다. 30도를 훨씬 넘는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용 레인지에다 돼지 목살을 구워 막걸리와 소주를 마셨고 주인이 따온 복숭아를 깨물어 먹었다.

 

정치, 사회, 경제를 넘나들다 살아가는 이야기까지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확인하는 건 우리가 끊임없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이었다. 무슨 이야기 끝에 내가 장에게 그랬다. 어, 그러고 보니 자넨 내년이면 예순이 되는구먼. 내후년이면 회갑이야, 참…….

 

여전히 현직에,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박과 나는 시골살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이 ‘초가삼간’에서 살아가는 친구를 부러워하긴 하지만 그처럼 땅을 사 집을 짓는 일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내 삶의 조건이 그것과는 아직도 멀뿐더러 그걸 감행할 만큼의 열망은 아직 내게 없다는 얘기다.

 

박은 굳이 집을 짓지는 않더라도 전원주택을 지어 살다 떠나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 그걸 사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여전히 내 상상 밖의 일이었으므로 나는 머리를 갸웃했고 웃기만 했다. 글쎄, 삶은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내 삶에 정말, 언제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모기가 기승을 부리지 않을까 저어했지만, 모기향을 피워놓아서 그랬는지 다행히 모기는 보이지 않았다. 등받이도 없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아팠다. 자정을 한 시간쯤 앞두고 우리는 자리를 걷었다. 본채 욕실에 들어가 물을 한번 뒤집어쓰고 박과 함께 자리에 들었다.

 

한낮 내내 햇볕에 단 황토방에는 상기도 열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선풍기를 켜고 누우니 바닥에 깐 대나무 돗자리가 시원했다. 자리를 바꾼 셈 치고는 난 잘 잤다. 새벽 네 시 반쯤에 깨어났는데 그제야 열기가 식었는가, 한기가 느껴졌다.

 

여섯 시쯤, 친구는 복숭아를 딴다고 밭으로 나갔다. 나는 일어나 세수를 하고 사진기를 메고 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안개가 옅게 끼어 있었고, 풀숲의 이슬에 발이 젖었다. 밭에는 굵직한 열매를 주렁주렁 단 복숭아나무 가지가 힘겹게 늘어져 있었고, 친구는 나무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복숭아를 땄다.

 

복숭아밭 주변의 자투리땅마다 친구는 고추, 가지, 방울토마토, 들깨, 고구마, 호박, 박 따위를 심어놓았다. 그러나 적잖은 면적인 데다 친구 내외가 그걸 일일이 거두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텃밭 곳곳에 잡초가 수북이 자라나 있었다.

 

“저놈의 풀, 감당이 안 돼.”

 

친구가 말했다. 얼치기 농사꾼이었지만 지난 몇 해 동안 텃밭 농사를 지은 적이 있어 나도 그 심정 안다. 알고말고. 제초제를 치면 얼마간 해결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는 폴리에틸렌 필름 등을 지상에 덮는 멀칭(Mulching)도 꺼리는 사람이다. 잡초도 살아야 하니까, 하고 그는 웃었다.

▲ 서른 그루의 복숭아나무에서 그는 한 해 오백 상자쯤의 복숭아를 수확해 출하하는 농사꾼이 되었다.
▲ 더러 봉지를 씌우지 않아 햇볕을 직접 받은 복숭아는 이처럼 붉고 건강한 빛깔을 띤다.
▲ 복숭아를 따고 있는 친구는 이제 폼이 그만하다.
▲ 진돗개 ‘진돌이’와 날마다 달걀을 낳아주는 닭은 내외가 호젓하게 살아가는 이 집의 구성원인 셈이다.
▲ 테라스에서 말리고 있는 고추. 그의 모습뿐 아니라, 집안 곳곳이 농가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그의 집에서 큰길로 나오면 바로 의성의 조문국 유적지다. 고분군 사이로 소나무가 외롭다.

복숭아밭 어귀에 장독대가 가지런히 심어진 해바라기의 호위를 받고 있었고, 그 앞에 빨랫줄이 매어져 있었다. 빨랫줄 너머엔 닭장, 기골이 장대(?)한 장닭(수탉) 한 마리가 몇 마리 암탉을 거느리고 복숭아밭 주변을 헤집고 다녔다. 친구는 닭장 안에 들어가 갓 낳은 달걀 두 개를 들고 나왔다.

 

“기특하게도 이놈들이 하루에 달걀 한두 개씩은 낳아주지.”

 

본채 마당에 그늘막까지 갖춘 훌륭한 집에는 진돗개 ‘진돌이’가 살고 있는데, 복숭아밭 안쪽에도 개 두 마리가 더 있었다. 텃밭에다 가축까지, 갖출 건 제대로 다 갖추었다. 텃밭에선 채소를, 닭장에선 달걀을 공급해 주니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강아지들은 집을 비울 때 훌륭한 파수꾼 노릇을 해 주고.

 

조반을 들고 나자, 다시 기온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박과 나는 떠날 채비를 했다. 친구가 아침에 딴 복숭아를 한 상자씩 차에다 실어주었다. 그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복숭아를 한 상자씩 보내주고 있다고 했다. 전업 농사꾼은 아니지만 이제 제법 농사꾼티가 났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그에게 잘 어울려 보이는 게 좋았다.

 

그는 내 늘어난 체중을 걱정해 주었다. 키가 비슷한데도 내가 그보다는 10kg이나 더 나가는 것이다. 매일의 노동에 단련된 그의 몸은 탄탄해 보였다. 한참 일이 바쁠 때면 거기서도 3kg이 더 빠진다고 했다. 늘어난 뱃살을 부끄러워하면서 나는 노동으로 열고 노동으로 닫는 그의 일상을 잠깐 부러워했다.

 

그러고 보니 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 주면 개학인 것이다. 언제쯤 다시 벗의 이 ‘초가삼간’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다시 이곳을 찾을 때쯤에는 뱃살과 몸무게를 얼마간이라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언제나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상상일 뿐이다.

 

우리는 친구 내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도회로 향해 각각 차를 몰았다.

 

 

2013. 8. 11.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