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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첫 투표를 하게 될 제자들에게

by 낮달2018 2022.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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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지방선거를 치를 제자들에게

▲ 내가 받은 6. 2 지방선거의 선거공보

딸들아, 너희들과 만난 건 2007년 3월, 2학년 교실에서였다. 열여덟 큰아기였던 너희들에게 나는 문학과 작문을 가르쳤지. 갓 전입한 내게 너희들은 아주 속 깊은 아이처럼 조금씩 따뜻하게 곁을 내어 주었고, 마음으로 나를 믿어 주었었다.

 

우리는 4월에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왔고 5월에는 체육대회를 치르고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 학교’를 같이 보았다. 결국엔 내가 지은 셈이 되었지만, 고추 농사를 함께 시작했고, 7월엔 학교 축제를 함께 치렀다. 나는 그 전해 연말에 문을 연 블로그에다 너희들과의 일상을 드문드문 기록하기도 했다.

 

2007년 4월, 제주도 수학여행

20007년 우리 반 고추 농사

2007, 다큐영화 <우리 학교> 관람

2007년 7월, 학교 축제

2007년 10월 학교 풍경

2008 2월, 다시 이별

2008년 스승의 날

▲ 2007. 4. 제주도 수학여행. 항몽유적지 주변. 이 아이들은 올해 선거권을 얻었다 .

너희들, 특히 2학년 5반, 내가 맡았던 반의 딸들은 이듬해 스승의 날에 나를 깜짝 놀라게 했고, 나는 그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썼다. 쉰을 넘겨 삶에 대한 이해를 조금씩 넓히고 있던 내게 너희들은 사람이 나누는 관계와 교감의 의미를 새롭게 깨우쳐 주었었다.

 

너희는 지난해 2월에 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지역의 대학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너희들 스무 살 새내기 소식을 나는 가끔 풍문으로만 전해 들었다. 더러 전화나 문자 메시지를 보내주던, 공부도 놀이도 바쁘기만 한 너희들 스무 살 젊음을 축복하면서도 나는 남몰래 그것을 부러워했다.

 

2010, 비로소 너희 앞에 당도한 ‘정치’

 

그리고 2010년, 이제 너희들은 우리 나이로 스물한 살, 법적 성인이 되었다. 축하한다. 선거권 연령이 20세에서 19세로 낮추어졌으니 너희들도 생일이 늦은 몇몇을 빼고는 이번 지방선거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 부지런한 친구는 일찌감치 부재자 신고를 해 지금쯤이면 투표를 끝냈을지도 모르겠다.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현대 사회에서는 주권자가 선거(투표)를 통해 자기 권리를 정치인에게 위임하는 형식으로 주권을 행사한다. 그리고 직업 정치인이 그 위임 받은 권리를 배타적으로 행사하는 행위가 곧 대의 민주주의다. 실질적으로 개별 주권자는 투표를 통해서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 이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셈이다.

 

어떠냐. 나와 함께 인문·사회 영역의 비문학 지문을 읽으며 배웠던 것들 기억나니? 삶은 정치로부터 결코 독립된 어떤 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조차 그것의 규제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삶은 시대적·정치적 상황, 조건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 따위 말이다.

 

교과서, 문제집과 씨름하며 수험생으로 살았던 고등학교 시절, 정치는 너희들 삶과 무관한 ‘무엇’이었을 뿐이었겠지. 그리고 공부나 놀이만으로도 시간이 아쉬운 새내기 대학 생활에서도 정치는 여전히 ‘멀고 먼 영역’이었을 터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잊고 있었던 약속처럼 투표통지서와 선거 공보가 너희들 앞으로 배달되었다. 비록 서류 뭉치의 모습이긴 하지만 ‘정치’가 비로소 너희 앞에 당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첫 투표는 그리 만만치 않다. 이번 투표는 모두 8번의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니 말이다. 한 시민단체에서는 이를 화투에 비겨 ‘1타 8피’로 표현하기도 했더구나. 무려 8번이나 기표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 88 만 원 세대 ( 레디앙 , 2007)

TV 영상 세대들이 전쟁이나 재해를 TV에 등장하는 영상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처럼 어쩌면 지금까지 너희에게 비친 정치의 모습은 지질하고 부정적인 이미지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정치’나 ‘선량(選良)’은, 뇌물이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아 구속되거나, 걸핏하면 농성과 주먹다짐을 벌이고 있는 모습으로 환기되는 이미지이니 말이다.

 

이번 지방선거는 요란스러운 유세 행렬이나 여론조사 지지율 따위로나 기억될 뿐 구체적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정치’는 이제 눈앞에서 너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영민한 너희들이 일찌감치 그것을 깨달았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전히 이 선거는 멀어 보이긴 하지만 예전처럼 너희의 삶과 무관한 그런 것은 더 이상 아니라는 걸. 졸업은 2년 후지만, 이미 너희들은 냉혹한 취업 전선의 냉기를 일찌감치 깨우치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학생운동이 사라진 대학 캠퍼스를 가득 채운 건 취업을 위한 스펙 쌓는 갖가지 실용 강좌라고 들었다. 기를 쓰고 스펙을 쌓긴 하지만, 그것이 취업과 미래를 보장해 주는 건 아니다. 단지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아니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를 쓰지만, 그려야 할 미래는 멀고 험하다.

 

‘알바’나 ‘스펙 쌓기’보다 효과적인 투자, ‘투표’

▲ 투표는 미래가 막힌 세대에게는 그것을 뚫어내는 정치적 행동이기도 하다.

아는지 모르겠다. 우석훈·박권일이 비정규직의 삶을 살게 될 20대를 ‘88만 원 세대’라고 명명한 것은 2007년의 일이다. 88만 원은 당시 비정규직 평균 임금 119만 원에 20대 급여의 평균 비율 74%를 곱하면 나오는 액수다. 저자들은 오늘의 20대를 ‘승자독식 게임’을 받아들인 세대들로 규정하며 이들에게 탈출구는 없다고 주장했다.

 

(…)조승희처럼 권총을 들 것인가,

아니면 전 세대인 386이 그랬던 것처럼 바리케이드와 짱돌을 들 것인가.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 우석훈·박권일 <88만 원 세대>(2007) 중에서

 

88만 원은 정말 ‘남’의 이야기일 뿐일까. 아니면 그건 어쩌면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일까. 꿈과 희망으로 바라보는 미래의 삶은 늘 ‘장밋빛’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을 실현하는 힘은 단지 상위 5%만이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결국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고 주문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바리케이드와 짱돌이란 20대의 젊은이들이 선택하여야 할 ‘보호장치’다. 그것은 ‘노동조합’과 ‘파업’ 같은 제도적 수단이기도 하고 ‘연대와 단결로 이룰 수 있는 다른 무엇’이기도 하다. 정말 이들의 주장처럼 ‘토플이나 GRE점수’가 답이 아닌 것은 사실일까?

▲ http://wateriestlover.tistory.com/25

서울대 조국 교수는 오늘 자 <한겨레> 칼럼에서 “‘88만 원 세대’가 88% 투표하면 세상은 88% 나아진다”라고 주장했다.(☞바로 가기) 그는 “군사독재 시절 여러분의 선배들은 돌을 던져 세상을 바꾸었’지만 ‘이제 여러분이 표를 던져 세상을 바꿀 차례”라고 말한다. 투표는 “당장의 ‘알바’ 보다 당장의 ‘스펙’ 쌓기보다 효과적인 투자가 될 것”이라면서.

 

삶과 사회를 이해하는 ‘성숙한 시민’으로

 

정치적 행동이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나는 이런 문제에 관한 한 단정적으로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 사회적 전망이 없다. 그러나 조 교수의 지적처럼 세상에는 ‘현실의 팍팍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청년실업 100만 명이라는 통계’는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제도적 해결 없이는’ 청년들의 ‘개별적 분투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확률’이 매우 낮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투표가 여러 후보 중의 한 사람은 선택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정책과 그 실천 의지에 대한 선택임은 잊어선 안 되겠다. 비록 지방선거이긴 하지만,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청년실업 해결방안, 학자금 대출 방안, 최저임금 상향 방안,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방안’(위 칼럼)에 대한 선택이고 그 선택은 매우 적극적인 정치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딸들아, 성년이 되어 찾아오면 생맥주를 사 주겠다는 내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단지 이제 겨우 성년에 이른 풋내기 대학생이 아니라 자기 삶과 사회가 맺는 관계를 이해하고 정치적으로 각성된 성숙한 시민이 되어 찾아올 너희를 기다리고 있으마.

 

 

2010. 5.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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