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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교사, 학교를 떠나다

by 낮달2018 202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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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퇴로 학교를 떠나는 교사들

▲ 친구의 모습. 아이들이 찍어준 마지막 수업인 듯한데 이 사진을 그는 문자메시지로 보내왔다.

그저께 교장 선생이 정년으로 학교를 떠났다. 교장 퇴임은 전입하고 두 번째다. 이태 전의 전임 교장은 명예퇴직했다. 초임 시절의 두 학교를 빼면 여섯 군데 학교에서 연례 행사처럼 교장의 퇴임이 있었다. 한 학교에서 거푸 교장이 퇴임하는 경우는 여기까지 모두 세 곳이다.

 

“가는 학교마다 교장을 퇴임시킨다”라고 농을 할 만하다. 그러나 50대 중반쯤에 교장이 되면 4년 임기를 연임하기가 쉽지 않으니, 학교마다 3~4년에 한 번씩 교장이 퇴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장의 ‘정년 퇴임식’ 전후

 

▲ 퇴임식의 식순. 누구 솜씨인지 한자투성이다.

요즘은 예전과 달리 공식 퇴임식을 갖지 않고 떠나는 이들이 많다. 전임 교장도 약식으로 행사를 치렀고, 그 앞뒤 평교사 몇 분의 정년과 명예 퇴임은 공식 행사조차 갖지 않았다. 이들은 퇴임식 대신 수업하는 학반의 아이들과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조용히 학교를 떠났다. 그새 세월이 많이 변한 것이다.

 

본인이 원했던가, 며칠 전 강당에서 교장의 퇴임식이 있었다. 4∼50여 명의 손님을 초청하고 부인과 자녀들까지 참석해 꽃다발을 주고받는, 꽤 격식을 갖춘 행사였다. 감사패와 기념품 증정, 훈장 전달, 내빈 축사에 송별사와 퇴임사, 스승의 은혜 노래 제창까지 이어지는 식이 끝나자, 교장은 손님들과 함께 학교를 떠났고 교사들은 식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급식을 먹었다.

 

나는 식이 시작되는 걸 보고 이내 강당을 빠져나왔다. 그걸 끝까지 지켜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태 전에 정년을 맞아 모든 행사를 사양하고 쓸쓸히 학교를 떠났던 선배 평교사를 떠올리면서 나는 잠깐 씁쓸해졌기 때문이다.

 

교장이든 교사든 본인이 원하면 행사를 준비해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하면 기꺼이 후배 교사들이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마땅하지만, 교사들은 대부분 퇴임식이라면 손사래를 친다. 의례적 행사로 교단에서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교장이 떠났다고 해서 학교가 달라질 일은 없다. 그 한 사람의 자리가 며칠 비어 있을 뿐이지, 학교가 굴러가는 것은 전체 교사들을 몫이기 때문이다. 식이 끝나고 나자, 교사들은 다시 심상한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누구든 그렇다. 때가 되어 왔다가 가는 게 이치 아닌가. 엔간한 인품과 지도력을 갖춘 이가 아닌 한, 작별에 따르는 아쉬움이나 미련 따위는 없다. 기본적으로 교사와 교장과의 관계란 사무적인 것을 넘지 못한다. 그 관계에서 빚어진 불유쾌한 기억이라도 없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교장에 관한 일반론이야 몇 해 전에 이미 구시렁댄 바 있다. [관련 글 : 교장의 자격을 생각한다] 그리고 4년이 흘렀지만 변한 것은 별로 없다. 교장 열 가운데 교사들의 존경, 아니 최소한의 인정이라도 받을 수 있는 이는 두셋이 되지 않는다는 이 오래된 전통(?) 말이다.

 

동료들은 새로 온다는 교장이 어떤 사람인가를 잠깐 입에 올리다가 이내 심드렁해졌다. 교장이 교체될 때마다 새 사람에 대한 기대를 은근히 하다가 정작 사람이 바뀌고 나면 ‘구관이 명관’이라는 씁쓸한 결론을 내리기 일쑤이니 말이다.

 

“괜찮은 관리자와 같이 근무하고 싶다.”

 

▲ 문자메시지에 담긴 소회가 쓸쓸하다 .

4년 전 전입하면서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여기서 교직을 마감하리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우정 그렇게 생각했다. 엔간하면 입 다물고 살 테니, 교직에서의 마지막 몇 해를 ‘괜찮은 관리자’와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건 나만의 소망이 아니라 교사들 대부분이 마음에 품고 있는 기대다.

 

실제로 집보다 학교에서 더 오래 머무는 교사들로선 직장에서 유쾌하게 근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좋은 동료’, ‘좋은 상사’다. 종일 얼굴을 맞대야 하는 동료 가운데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이가 있다면 그것도 죽을 노릇이긴 하지만 최소한 그는 내 근무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게 교감, 교장 같은 관리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소한 그는 내 근무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교장의 명에 따라 교육한다’라는 법 조항이 바뀐 지도 오래건만 여전히 관리자의 힘은 만만치 않다. 학교장의 전횡에 마땅히 대응할 수 없는 교사들은 답답하고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쁜 동료’처럼 종일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유일한 위안이 될 뿐이다.

 

관리자라고 해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그들도 여느 동료와 마찬가지로 최소한 20년 이상의 평교사 시절을 거쳤고, 교사들의 원성을 받는 용렬하고 별난 관리자도 겪었을 것이다. 학교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구성원들의 존경과 합의를 끌어낼 것인지를 모르지 않는다는 얘기다.

 

9월에 부임하게 될 교장은 ‘괜찮다’는 평가가 들린다. 하기야 ‘괜찮은’ 교장도 드물다. 그러나 겪어 봐야 할 일이다. 태평성대에 ‘안 좋은 사람’은 없다. 어떤 현안을 두고 의견이 엇갈려 봐야 그 본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법…….

 

나는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 내년 2월 명퇴를 신청했으니 남은 한 학기가 내 마지막 교단생활이 될 것이다. 괜찮은 사람이든 아니든 무엇이 달라질까.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칠 것이고, 예전과 다르지 않게 근무할 것이다.

 

교사, 학교를 떠나다

이번에 인근 시군에 근무하던 친구가 고대해 왔던 명퇴를 하게 되었다. 나보다 더 간절히 학교를 떠나기를 원했던 친구였다. 잘은 모르되, 좋은 교사가 되려고 무진 애를 썼고, 그만큼 좌절도 깊었던 친구다. 그가 한밤에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기형도의 시 ‘빈집’을 표절했다는 그의 소회를 읽으면서 나는 미소 지었다. ‘공포를 기다리던 교실’, ‘망설임을 대신하던 시험들’에게,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그는 인사를 했다. ‘잘 있어’……. 그 너스레 속에 숨은 물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초겨울 베짱이처럼’ ‘더듬거리며 이곳을 떠나’면서 그는 ‘불쌍한 놈, 이제 너는 빈집에 갇혀버렸어’라는 자조를 숨기지 않았다. 이제 손수 지은 황토방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갈 일만 남았는데도 그는 꽤 쓸쓸한 모양이다. 물론 그는 '행사' 따위는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한 잔 사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내가 그를 위로해 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좋은 교사가 되겠다며 감내해야 했던 숱한 좌절과 절망이 ‘교사였던’ 그의 삶에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잠깐 무심히 내가 학교에서 보낼 마지막 겨울을 생각해 본다.

 

 

2015. 8.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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