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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자랑스럽구나, 아이들과 함께한 그 ‘세월’

by 낮달2018 2022.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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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에서 25년 경력으로 상을 받다

▲ 전교조에서 교직 경력 25년 이상의 조합원 교사 모두에게 주는 상

교직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상을 받았다. 이른바 ‘스승의 날’을 기념하여 주는 관제의 상, 교육감상이나 장관상 따위와는 다른 상이다. 1986년 5월 10일 교육 민주화 선언을 기념하여 내가 가입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서 주는 ‘교육공로상’이다.

 

전교조 위원장이 주는 교육공로상

 

‘교육공로’라니까 무슨 대단한 업적을 생각할지 모르나, 이 상이 가리키는 공로는 ‘오래 교단을 지켜 온’ 것이다. 수상 자격은 오직 교직 경력 25년쯤의 연공(年功)이다. ‘관’과는 달리 전교조에서는 해직 기간을 경력에 넣기 때문에 교내 연령 서열(?)은 6위지만 호봉서열은 20위쯤에 그치는 내게도 이 상이 내려온 것이다.

 

앞에서 밝혔듯 이건 내가 교직에서 받는 첫 번째 상이다. 나는 그 흔한 교육장상, 교육감상 하나 받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머리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한 20년을 넘게 ‘분필 밥’을 먹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교원들이 받는 상이란 게 그렇다. 일정한 공로가 있어 상 받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연공만 갖춰지면 ‘돌아가며’ 의좋게 나누는 게 상인데, 어떻게 그런 상훈 하나도 얻어걸리지 못했지?

 

갑자기 내가 교단에서 보낸 세월이 막연해짐을 느낀다. 글쎄, 상과 관련해 떠오르는 기억은 웬일인지 텅 비어 있다. 상에 관한 기억으로는 초임 학교에서는 두 차롄가 상을 주려 했는데 내가 고교 발령(중고 병설교였다)이어서 교육장상 포상 상신을 못 했다는 얘기를 교감에게 듣고 흘려버린 게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이십여 년은 공백이다. 나는 몇 해 전, 전임교에서 교육감상을 ‘탈 뻔했다’. ‘탈 뻔한’ 것은 학교에서 올라간 서류가 교육청에서 걸렸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인사위원회에서 수상실적이 ‘전무’한 내게 상을 주기로 결정했다면서 내게 공적조서를 쓰라고 요청했다.

 

공적조서? 나는 군대에서 그걸 지겹도록 썼던 사람이다. 나는 대대의 행정서기병, 보병식으로 말하면 ‘상벌계’로 근무했다. 나는 병(兵)은 물론, 부사관과 장교의 표창 상신을 위해 이미 완결된 사실을 인과 관계도 없이 그들과 이어주는 형식의 공적조서를 족히 수백 장은 썼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경우’인가! 상을 탈 사람이 자신의 공적조서를 쓰는 것은 교육계의 관행이란다. 하긴 자신의 공적은 제가 가장 잘 알겠다. 내키지 않은 공적조서를 쓰면서 나는 내가 ‘수상 자격’이 없는 교사란 걸 확인했다. 조서를 쓰면서 나는 내게 어떤 ‘공적’도 없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우쳤기 때문이다.

 

교육감상, 탈 뻔하다가 말았다

 

학교가 이룩한 성취와 나를 어떻게 이을지, 거기 내가 어떤 공헌을 했는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억지로 둘을 맞추면서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새록새록 커지는 자기혐오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철없는 아이가 아니라, 나잇살이나 먹은 ‘중견 교사’였으므로 눈을 질끈 감고 공적조서를 완성했다.

 

그때, 황당한 공적조서를 작성하면서 나는 인사위원회의 결정 사항이 아니었다면 모두를 깡그리 되돌리고 싶었다. 교육청에서 전화가 온 건 한 일주일쯤 뒤였다. 나는 무슨 특별활동 관련 공로로 올라갔는데 다른 교사와 경합해야 하니 경합이 없는 다른 영역으로 바꾸어 공적조서를 새로 써 달라는 요청이었다.

▲분회에서 수상자에게 도서 상품권을 동봉했다 .

 

그건 내게 이 황당무계한 ‘상 타기’를 그쳐야 하는 무슨 계시처럼 다가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담당 장학사에게 말했다.

 

“그만 저를 명단에서 완전히 빼도록 하죠.”

“……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이상이 내가 상을 ‘탈 뻔한’ 사건의 경위다.

 

얼마 전에 우리 학교의 분회장이 ‘교육공로상’ 이야기를 할 때 나는 그게 특정한 공로에 주는 상인가 싶어서 내게 무슨 공로가 있느냐고 되받았다. 분회장은 일정한 연공을 갖춘 조합원에게 주는 상이라고 설명했고 나는 그런가 했을 뿐이었다.

 

어제 오후에 분회장이 우리 학년 교무실에 내려와서 약식이라며 융단을 입힌 상장 케이스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농담조로 아이구, 이거 난생처음 타는 상입니다, 하고 너스레를 떨었고, 교무실 안에 있던 동료 교사들이 유쾌하게 웃으며 박수를 쳐 주었다.

 

우리 학교 분회에서 이 상을 탄 이는 모두 넷이다. 한 분은 내게 선배가 되고 나머지 둘은 나보다 두어 해 후배다. 모두가 쉰 고개를 넘긴 ‘노틀’이다. 한때는 ‘귀때기가 새파란’ 애송이 교사들로 구성되었던 전교조에 쉰 세대는 이제 기본이 되었다. 참 세월은 빠르기도 하다.

 

‘사랑과 헌신’, 정말 나는 그리 살았을까?

 

이 상에 상품은 물론 없다. 그러나 우리의 후덕하고 엽렵한 분회장은 미리 조합원들에게 보낸 쪽지를 통해 수상자 선생님들께 상장만 달랑 드리기가 송구하여 1만원권 문화상품권을 동봉했다고 밝힌 바 있었다. 나는 케이스를 열고 상장의 문안을 훑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참교육에 대한 신념으로 교단을 지켜오신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뜻을 담아 이 상을 드립니다.”

 

나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살았는가. 참교육에 대한 신념으로 교단을 지켰는가. 그런 질문 앞에 나는 부끄럽고 민망하다. 나는 단지 생활인으로서, 혹은 직업인으로서 아이들을 바라보았고, 단지 ‘생업’으로서 교직을 지킨 것은 아닌가.

 

언제나 회한은 길지만, 인생은 짧은 것이다. 나는 내가 뽑은 전교조 위원장이 경력 25년 이상의 조합원 모두에게 주는 교육공로상을 기쁘게 받기로 했다. 상금은커녕 기념품 하나 없지만, 이 상장을 자랑스럽게 받기로 했다.

 

초등학교 자연 교과서는 말굽자석의 한쪽 끝을 울리면 반대편 쪽도 울리는 것을 ‘공명(共鳴)’이라고 가르친다. 나는 요즘에서야 그것을 깨우치고 있다. 내가 아이들에게 던지는 말 한마디, 미소 띤 표정, 따뜻하게 마주 잡아주는 손이 아이들이 스스로와 남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법을 가르친다는 것을. 가슴에 벅차게 스며드는 그 뜨거운 울림이란 아이들과 내가 함께 만들어간다는 것을.

 

나는 아이들에 대한 내 믿음이 아이들에게 더 큰 신뢰로 굳어지는 과정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자신을 대견스럽게 치하하기로 한다. 그러나 기실 그 치하는 아무 조건도 없이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이 세월과 연륜에 되돌려져야 한다.

 

전교조를 대신하여 위원장이 주는 이 상은 그러므로 내가 겪고 보낸 25년 ‘세월’에 대한 상찬(賞讚)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겠다. 따라서 이 상은 어쩌면 아이들이 내게 건네주는 상일지도 모르고, 내가 스스로에게 수여하는 상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 내가 이 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까닭이기도 하다.

 

 

2009. 5. 15. 낮달

 

 

자랑스럽구나, 아이들과 함께 한 그 '세월'

전교조 '교육공로상'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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