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사태’와 ‘항쟁’, 혹은 ‘나이스’와 ‘네이스(NEIS)’

by 낮달2018 2022. 5. 20.
728x90

특정한 사건과 대상 지칭 어휘에 숨은 이데올로기

▲ 망월동 구묘역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 순례자들

말은 의사소통의 수단이지만, 말하는 이의 의식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특정한 어휘가 일정한 세계관과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두루 알려진 바다. 여전히 이 땅에서 갈등 관계인 ‘근로’와 ‘노동’은 그 좋은 실례라 할 수 있겠다.

 

‘광주항쟁’을 ‘광주사태’라 부른 작가 황석영의 발언이 논란이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 정부를 ‘중도’라고 규정하며 거기 동참하겠다는 그의 발언 앞에서 대중들은 곤혹스럽다. ‘예언자적 기품’은 고사하고 얼치기 로맨티시스트로 부르기조차 어려운 어처구니없는 그의 현실 인식 때문이다.

 

황석영의 ‘광주사태’ 발언은 뜻밖이다. 무엇보다 그는 광주의 진실을 처음으로 세상에 널리 알린 보고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저자였던 까닭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분노했고 그를 규탄했다. ‘사태’와 ‘항쟁’의 거리는 가늠할 수 없이 먼 우리 현대사의 질곡의 일부가 아닌가.

 

‘80년 5월 항쟁’을 ‘사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우리 지역에서도 일상이다. 오월의 광주가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였다는 역사적 진전이나, 희생자들을 민주화 유공자로 기리게 되었다는 사실도 그걸 ‘사태’로 이해하는 이에게는 오불관언일 뿐이다.

▲ 무명 열사의 묘 . 국화 송이가 외롭다 .

지난 일요일에 우리는 광주를 다녀왔다. ‘5·18 민중항쟁 정신 계승 대구·경북 순례단’의 이름으로였다. 망월동 국립묘지를 거쳐 옛 도청 앞의 국민대회에 참석했다 우리는 ‘오월 어머니의 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인사하는 과정에서 일행의 대표는 그렇게 말했다.

 

“영남에 살고 있는 저희들은 광주에 빚이 많습니다…….”

 

광주의 오월을, 그 비극의 현대사를 가해자의 죄의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광주는 마땅히 ‘항쟁’이고 그런 명명에 어떤 망설임도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광주의 오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가해자의 지역에서 살고 있다는 일종의 ‘원죄 의식’이 있다.

 

80년 광주의 오월 항쟁을 ‘사태’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계엄사령관의 발표에서 시작되면서 점차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이 호칭은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왜곡한 신군부의 거짓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우파 인사들이 선호하는 호칭이라 할 수 있다.

 

‘5∙18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은 1988년 제6공화국이 등장하면서 민주 화합추진위원회가 처음 썼는데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의 공식 언급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됨으로써 공식 명칭이 되었다.

 

지역사회와 5월 단체 등을 중심으로 사용해 온 ‘광주 민중항쟁’ 또는 ‘광주항쟁’이란 명칭과 ‘광주사태’ 사이의 어정쩡한 타협적 이름이다. 그러나 ‘운동’에 그치긴 하지만 광주와 광주의 투쟁을 지역적·사적 사건에서 전국적·역사적 사건으로 편입시킨 이 이름은 교과서에 오르면서 공식 역사 서술의 언어가 되었다.

 

‘난리’(동학란)에서 ‘농민운동’으로 승격되는 데 그친 동학도 비슷한 길을 걸어온 듯하다. 교과서에선 여전히 운동에 그치지만 동학은 ‘혁명’에서 ‘농민전쟁’까지 여러 비공식적 명칭으로 불리는 것이다. 거기 비기면 기층 민중들이 신군부와의 투쟁을 주도했다는 점을 강조한 ‘광주항쟁’이나 ‘광주 민중항쟁’이란 명칭은 훨씬 더 광범위하게 쓰이는 것 같다.

 

5월 광주를 그렇게 부르는 이들에게 역사와 그 기술에 대한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을 ‘광주사태’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역사는 여전히 80년대에 머물러 있다. 그들에게 분연히 일어난 시민군은 여전히 ‘폭도’로 이해될 뿐이고, 그 열흘은 ‘소요’기로 이해되니까 말이다.

 

‘5·18은 폭동, 광주는 폭력 백화점’이라고 규정하는 지만원 같은 극우 인사들의 발언은 우리에게는 ‘미치광이 망언’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직도 광주를 ‘사태’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자신들 막연한 정치적 신념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만만찮은 세계관이 된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이질적인 시선이 교차하는 사회는 불행하다.

 

‘사태’와 ‘항쟁’의 차이는 2003년 각급학교를 뜨겁게 달구었던 NEIS ‘정보 인권 투쟁’에도 그대로 재현된 듯하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National Education Information System)이 학생들의 정보 인권을 현저하게 침해한다는 문제 의식으로 출발한 이 싸움은 결국 정보 인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정리하는 쪽으로 끝났다.

▲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과 교무업무 시스템(SEMS). 정보 인권투쟁의 성과다.

교육부가 붙인 이 체제의 공식 이름은 ‘나이스’였다. 그러나 전교조는 NEIS를 ‘나이스’로 부를 이유가 없으며 이는 의도적으로 이 시스템의 긍정적 이미지를 제고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반발하면서 이를 ‘네이스’라고 불렀다. 독일어도 아닌데 ‘NE’를 왜 ‘나이’로 읽어야 하는가 하는 항변은 설득력이 있었다.

 

논란이 계속되던 때에 언론사별로 이 시스템을 부르는 이름도 제각각이었다. ‘네이스’라고 표기한 신문사는 <한겨레>가 유일했고, 방송사 중에서 MBC는 ‘엔이아이에스’라는 중립적인 명칭을 사용했다. 물론 학교에서 이 이름은 첨예하게 갈라졌다.

 

교장·교감, 행정실장 등 교육 관료들과 그 시스템에 찬성하는 교사들은 ‘나이스’라 불렀고, 정보 인권 싸움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전교조 교사들은 끝까지 ‘네이스’를 고집했다. 싸움이 일단락되고 학생들의 정보 인권을 보장하는 쪽으로 이 시스템이 정리된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다.

 

‘네이스’로 부르는 이들과 ‘나이스’로 호칭하는 사람의 경계는 명확하다. ‘네이스’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에게 그것을 위해 싸웠던 만만찮은 시간에 대한 기억은 깊고도 무겁다. 산골짜기 학교에서도 끝내 시스템 아이디를 받기를 거부했던 무명의 교사들 덕분에 이 시스템이 학생들의 정보 인권을 위한 ‘교무업무 시스템’(SEMS)으로 분리되는 성과를 거두었으니 말이다.

 

‘나이스’로 그것을 호칭하는 사람들에게 불과 수년 전의 기억은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 1980년 5월의 광주를 ‘사태’라 부르는 사람들에게 우리 현대사는 마치 ‘잊고 싶은 시간’, 그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주변에 심상한 얼굴로 스쳐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저들의 기억 속에 광주는 무엇일까를 거듭 생각해 보는 까닭이다.

 

‘광주’와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하나는 국가 공인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영자를 읽는 방식이 빚어낸 다른 명명법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게 단순히 호칭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나 제도를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라는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80년 5월의 광주항쟁 스물아홉 돌이 지났다. 내년이면 서른 돌, 말하자면 한 세대가 흐른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태’와 ‘항쟁’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역사 인식에서 화해할 수 없는 단절이 존재한다. 일부 극우 인사들의 문제가 아니라, 숱한 동시대인의 사실 인식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 단절과 분열은 아프고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09. 5. 20.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