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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슬픈 섬, ‘잠들지 않는 남도’

by 낮달2018 2019.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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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수학여행으로 다시 찾은 제주

▲ 떨어진 동백꽃. 항몽유적지에서

제주도에 닿은 것은 지난 4월 10일 늦은 오후였다. 1988년에 이은 두 번째 방문이었다. 공항은 좀 더 커진 듯했고, 예전과 달리 야자나무 가로수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관광버스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오며 나는 이 남도의 섬이 건너온 고단한 세월을, 그 시간 속에 켜켜이 서린 통한의 현대사를 떠올리며 옅은 비애를 느꼈다.

 

4·3항쟁 쉰아홉 돌이 꼭 일주일 전이었다. 나는 차창에 머리를 괴고 연도의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스쳐 가는 풍경 속에서 거기 사는 순박한 사람들의 삶이 날것 그대로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제주는 슬픈 섬이야, 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 유채밭. 둘째 날 오후에 배터리가 떨어져 제대로 된 사진을 한 장도 찍지 못했다 .
▲ 보리밭과 돌담 . 항몽유적지 부근 .

그 섬에서의 사흘 밤 나흘 낮을 나는 마치 오랜 세월 고향을 떠났다가 막 돌아온 사람처럼 낯설게 섬의 곳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한 번은 섬의 왼쪽을, 나머지 두 번은 섬의 오른쪽 해안을 따라 도는 여정이었다. 노란 유채꽃 그늘과 푸른 들녘이 가없이 이어졌고, 검은 현무암 돌담과 나지막한 구릉에 옹기종기 펼쳐진 밭들이 정겨웠다.

 

한라 원산의 왕벚꽃이 지고 있었다. 봄에 수확한다는 하귤(夏橘)이 익어가는 귤밭과 군데군데 이어진 보리밭과 마늘밭의 진록 빛 행렬이 유채의 노란 꽃그늘 가운데서 시원했다. 새파란 초지에 한가히 풀을 뜯고 있는 몇 마리 말, 화사한 동백나무 꽃그늘, 하늘을 찌를 듯한 삼나무의 행렬들. 제주의 아름다운 봄은 굳이 사람들이 꾀는 명승(名勝)에 있지 않았다.

▲ 감나무의 연록 빛 새싹이 아름답다. 뒤편의 붉은 꽃은 물론 동백이다.
0▲ 달리는 차 속에서 담은 제주의 들판.
▲ 유채꽃.

제주의 4월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의 갈피 갈피마다 마치 ‘한산 세모시 같은 슬픔(박경리)’이 우두커니 서려 있는 듯했다. ‘잠들지 않는 남도’에 흐드러지게 핀 ‘피에 젖은 유채꽃’은 단순한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그것을 적신 것은 해방 공간, 그 굴절된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스러져 간 숱한 사람들의 피다. 그래서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섬에서 만났던 들과 산, 꽃과 풀에 스민 제주의 한과 사랑이, 제주의 슬픔과 분노가 가슴으로 따뜻하게 닿아왔다.

 

제주는 일만 팔천의 신(神)과 오백 편이 넘는 신화의 고장이며, 토박이 여신 자청비와 돌아온 민중의 영웅 궤눼깃또의 고향이다. 척박한 땅, 험한 바다와 싸우며 살아야 하는 고달픈 존재 조건이 스스로 자족적인 신화와 신들의 세계를 꾸려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섬나라가 온몸으로 겪은 고단한 역사와 시련은 질기고 모질었다. 백 할아비의 한 자손이 묻혔다는 ‘백조일손지묘’는 바로 그 질곡의 역사를 처절하게 증언해 주는 흔적이다.

▲ 어느 길옆에서 만난 무덤과 산담 . 달리는 차 속에서 찍었다.
▲ 외돌개 주변의 소나무와 담쟁이.
▲ 굴렁쇠님이 갖다준 책에서 만난 어린이의 시.

길가 밭 한가운데에 자리한 무덤들은 낯설어 뵈긴 하지만 ‘죽은 이의 집’이라기보다는 밭일을 하다 노곤한 오수에 빠진 촌로들의 모습처럼 친근하고 정겹다. 대부분 밭 한가운데 모셔 놓은 이 무덤들은 ‘산담’이라는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는 경작지와 무덤의 경계를 표시하고 마소의 출입으로부터 무덤의 훼손을 막고 전통적으로 봄철에 행하던 화입(火入)으로부터 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완만한 산(오름)기슭에 이어진 무덤들은 일만 팔천의 신들이 임하는 이 신성한 백성들의 땅에 걸맞게 일상의 삶과 자연을 함께 나누며 의좋게 어깨를 맞대고 4월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가끔 보이는 주변의 비석과 석물들은 오히려 불필요한 사족처럼 보인다. 일상적 노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에 터를 잡았으니 따로 날 받아 성묘할 일도, 소분(掃墳)할 일도 없을 터, 그것은 자체로 곧 ‘사자(死者)와의 만남’일 수 있으리라.

 

돌아오는 날, 아침과는 달리 날씨는 개고 화창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 떠올랐을 때, 타원형 창을 통해 나는 고개를 빼어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제주의 산과 들, 바다와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모두 제주를 떠나면서, 이 섬을, 이 섬의 슬픔과 통곡을 두고 간다. 쉰아홉 해의 세월이 흘렀건만 제주의 슬픔은 아직도 바다를 제대로 건너지 못했는가.

 

5·18이 빛고을과 호남을 넘어 온 나라의 역사, 온 민족의 아픔이 되었듯 4·3은 이 넘실대는 파도의 바다, 고통의 현대사, 그 오욕의 상채기와 흉터를 넘고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 ‘반역과 통곡의 세월’을 건넌 ‘한라의 봄’이 백두로 백두로, 짙붉게 타오르는 광경을 잠깐 상상해 보았다. 진실로 그것은 제주의 산과 들에서 스러져 간 삼만 넋을 위한 해원(解寃)의 씻김굿이 될 것이었다.

 

 

2007. 4.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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