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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겨울은 교실 ‘문틈’으로 온다

by 낮달2018 2020.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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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학생들의 겨울나기

▲ 초저녁, 야간 자습이 시작될 무렵, 항교 당당 지붕 너머로 달이 떴다.

겨울은 어디로 오는가.

 

10월이 기울면서 아침과 밤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아침 출근길과 밤 열 시 야간자습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은 선득해서 저도 몰래 몸이 오그라지는 듯한 느낌이다. 내가 그러니 아이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나마 우리 학교는 다행인 편이다. 일찌감치 냉난방 시스템이 설치되어 며칠 전부터 난방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아직 냉난방 시설이 이루어지지 않은 대부분의 학교(주로 중학교)에서는 얼음 소식이 들려야 난로를 피울 터이니. 이는 어쩌면 입시 준비로 골몰해야 하는 고교생에게 주어지는 특혜인지도 모르겠다.

 

학급에 들어가면 아이들 대부분이 얄팍한 담요로 무릎 아래를 감싸고 있다. 심한 아이들은 아예 담요를 긴 치마처럼 아랫도리에 두르고 다니기도 한다. 한참 예민한 때의 여자애인지라 아이들은 기온에 몹시 민감하다. 한여름에 에어컨 냉기를 막기 위해 얇은 담요를 뒤집어쓰기도 하는 편이니.

 

찬바람이 돌기 시작하면 출입할 때 문단속에 예민해지는 건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출입구 쪽에 있는 아이들이 느끼는 ‘바늘구멍으로 드는 황소바람’은 장난이 아니다. 당연히 각반의 교실 출입문마다 ‘문단속’을 요청하는 여러 종류의 문구가 만발했다.

 

아래가 그 흔적들이다. 8교시 수업이 끝나면 6시, 두꺼운 어둠이 내려앉고 기온은 시나브로 떨어지니 아이들의 절규(?)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랫도리를 선득하게 만드는 찬바람에 익숙해질 만하면 어느새 연말, 아이들은 진급을 준비해야 한다.

 

그런 걸 생각하면 쓸쓸하고 스산해지지만, 그게 이 땅의 아이들이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아이들에게 겨울은 하루 14시간 이상을 지내야 하는 교실 문틈으로 알 듯 모를 듯 다가오고 있다.

▲ 아이들은 교실 문을 제대로 닫아달라고 절규한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요청은 맨 위의 ‘문 닫기’다. 별로 바쁘지 않아 보이는데 아이들이 잘 따르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 아래는 호소형이다. 추우니 ‘닫아 달라’는 애걸이다. 세 번째 것은 그냥 ‘나 표현법’으로 보기에는 좀 불친절하다.

 

네 번째 것도 비슷하긴 하다. ‘닫으라고’를 되풀이함으로써 요청을 강조하는 효과는 있겠다. 맨 아래 거는 요청이 아니라 숫제 명령조다. 계속해서 빼꼼히 열려 있는 출입문 때문에 속이 제법 상한 모양이다. 그게 그냥 ‘닫는’ 게 아니라 ‘처닫다’(‘쳐닫다’는 잘못이다.)로 드러나고 있다. 유리에다 그냥 휘갈겨 썼다. 아이의 분노와 짜증이 은근히 느껴지지 않는가.

 

위의 것은 아주 예의 바르고 친절한 요청이다. ‘닫으면 수능 대박’ 운운하며 요청에 응하면 ‘보상’이 있다는 점도 강조한다. ‘추운 날, 뒷자리에 앉아 있는 느낌’은 말하면서 정서적으로 접근한다. 그러나 이 아이도 글의 끝부분에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가만 안 둘 겁니다.’ 그리곤 다시 호소, ‘부탁해요.’

 

아래의 것은 훨씬 시각적인 효과를 꾀한 물건이다. 잡지에 난 무슨 광고를 오린 것 같은데 일단 긴 머리의 여인이 시선을 붙든다. (남자 연예인으로 고르지 그랬니!) 그러나 수정 펜으로 쓴 내용은 그리 살가워 보이진 않는다. ‘춥다’는 자기표현 뒤에 ‘문 닫고 다녀^^’가 고작인데 저 정도 호소에 아이들이 말을 들을지 잘 모르겠다.

오늘의 ‘압권’이다. ‘온니, 옵하’라 하여 전근대적 표기로 시선을 붙든 다음, 요청에 불응할 경우엔 ‘3년 재수’라는 귀여운 ‘저주’를 담았다. 밑에선 이를 다시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열공’하자는 제의로 끝맺고 있다.

 

시원스런 필체하며, ‘아주높임’의 반듯한 예의에서 나오는 울림이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옥에 티는 띄어쓰기의 대담한 무시! 그것도 일종의 시선 붙들기 전략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저 애가 말하는 ‘옵하’가 누구냐는 거다. 여학교이니 따로 출입하는 더벅머리가 있지는 않으니, 옵하의 범위는 ‘교사’로까지 넓어질 수 있겠는데, 문제는 나도 그 ‘옵하’에 포함되는지 여부, 아직 못 물어봤다. 혹시 아니라고 할까 봐…….

 

 

2007. 11. 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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