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나들이] ① 향촌문화관, 대구문학관 답사기… 대구의 특별한 향기 물씬
지난 11월 첫 주말의 일이다. 대구에 들렀다가 그 며칠 전에 문을 연 ‘향촌문화관’과 ‘대구문학관’을 둘러보았다. 예정에 없이 그곳을 들린 이유는 첫 번째 볼일을 보고 나니 다음 용무 사이에 비어 있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기 때문이다. 어쩌나, 망설이다가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나라 안의 이름난 유적 명승지는 물론, 웬만한 박물관 따위는 뚜르르 꿰고 있는 친구다. 시간 보낼 일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니, 그는 “그러면……” 하고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해 주었다.
“북성로에 가면, 공구박물관이 있어. 아니면 아마 어저께쯤 문을 연 향촌문화관과 대구 문학관에 가보든지. 역 앞 중앙통 옛날 상업은행 자리, 알지? 거기 있어.”
친구와 달리 나는 박물관 따위를 챙겨 다니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가 일러준 대로 중앙통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중앙통(中央通)’은 대구역에서 앞산까지, 대구 시가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를 가리키는 일본식 이름이다. 이름이 ‘중앙로’로 바뀌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중앙통’이라는 일제 강점기 때의 이름을 쓴다.
향촌문화관과 대구문학관 개관
중앙로는 대구 최고의 번화가다. 대구로 유학 와 중학교에 다니던 내가 일 년쯤 127번 시내버스를 타고 오갔던 길이다. 나는 창밖으로 흐르는 거리와 거기 이어지는 간판을 읽으며 도시의 공기를 익혔고, 만원 버스 속에서 도시의 아이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요령을 배우면서 이른바 ‘촌티’를 벗었다.
나는 칠성 시장과 시청 입구를 거쳐 버스가 대구역 앞에서 좌회전하자마자 오른쪽에 나타나던 꽤 위압적인 건물로 상업은행을 기억하고 있다. 상업은행의 전신은 1912년 대구 최초의 일반은행인 선남(鮮南) 상업은행이다. 이 은행은 1941년 식민 정책을 지원하는 조선 상업은행으로 흡수됐고 해방 후에는 한국 상업은행이 되었다.
좁은 간선도로긴 하지만, 도로 양쪽의 인도를 넓혀 잔디를 심거나 벤치를 비치해 예전과 꽤 많이 달라진 중앙로로 들어서자, 오른편으로 하얀 콘크리트 건물이 나타났다. 새로 색칠해 말끔해진 건물에 ‘향촌문화관’과 ‘대구 문학관’ 표지가 뚜렷했다.
대구 지역의 문인과 문학을 주제로 한 공간일 터이니 ‘대구 문학관’은 궁금할 게 별로 없다. 그러나 ‘향촌 문화’는 뭐지?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향촌이 ‘향촌동’을 이르는 것이라면 거기 갖다 붙일 무슨 대단한 문화가 있단 말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신호를 기다리면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대구를, 그 문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역의 보수화와 문화
대구는 서울, 부산에 이은 대한민국 세 번째 대도시다. 인구 250만의 이 대도시는 조선 시대 이래 영남의 중심지였고, 근대 이후로도 이 나라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을 이룬 사건과 인물을 낳아 온 곳이다. 4·19혁명의 실마리가 된 2·28 학생 의거의 발생지고, 그것을 ‘미완의 혁명’으로 짓밟은 5·16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의 연고지다.
그래서인가,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실마리를 제공한 이 도시는 박정희 집권 이후, 보수화되기 시작한다. 유신 독재는 절대 권력이 피살되면서 막을 내렸지만, 그의 총애를 받으며 실세로 성장한 신군부의 쿠데타로 군부 독재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구는 정권을 창출한 지역으로 주목받으며 보수 세력의 아성으로 바뀌어 간 것이다.
보수 진영은 10년쯤 야당에 정권을 내주었지만, 잇따라 대구와 경북 출신의 후보를 내 정권을 되찾는다. 결국 박정희 이래 대구는 영남 정권의 산실로 떠오르면서 보수 기득권, 우익 정치세력의 텃밭이 되었다. 그리하여 대구는 한편으로 자기 지역에 대한 자긍심과 다른 지역에 대한 배제 논리로 무장된 보수 우익 세력의 완고한 성채가 되었다.
그런데도 대구가 그 성가에 걸맞은 발전과 혜택을 만들어가지 못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대구는 국내 3대 도시로 발전했지만, 경제적 지표에서는 물론, 그 외부적 위상에 걸맞은 내실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특히 문화면에서 대구 지역에 대한 일반의 평가는 유달리 박한 듯하다. 물론 서울 중심의 중앙 문화와 지역을 거점으로 한 지방 문화의 격차가 두드러진 게 대구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대구가 적어도 다른 지방과 구별되는 고유한 문화적 색깔이나 관습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 아닌가 말이다.
향촌문화관으로 들어가면서도 솔직히 나는 무언가 별다른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선 대구라는 도시와 그 문화란 ‘그저 그렇고 그럴 뿐’이라는 선입견 탓이었을 것이다. 또 이런 전시관이 관광 문화 사업에 눈을 돌린 지방 자치 시대의 관습적 시설물에 그치는 것이라며 그것을 잔뜩 시뻐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향촌 문화’라는 낱말 앞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는 향촌동이란 7, 80년대에 번성했던 유흥가일 뿐이었다. 북성로 기계 골목과 이어지는 이 유흥가 골목은 막걸리와 고구마로 유명했다. 학사주점, 고구마 식당, 대안식당 등 유명 막걸릿집들은 노란 양은 주전자에 막걸리를 팔았고, 생고구마를 안주로 내놓았다.
안주를 따로 주문해 먹던 시대가 아니라, 기본 안주로 말술을 마셔도 눈치가 보이지 않던 시대였다. 우리는 스무 살 전후에 이 동네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이들은 골목 양쪽으로 끝없이 이어진 술집의 홀과 2층 방에서 경쟁하듯 술을 마셨고, 기분이 좋으면 젓가락 장단에 유행가를 합창하곤 했다.
지역 문화가 성장한 텃밭 향촌동
그러나 창구의 자원봉사자로부터 받은 안내 전단을 들고 문화관 첫 전시실을 다 둘러보기도 전에 내가 알던 향촌동은 그것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향촌동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7, 80년대에 반짝 번성한 한갓진 유흥가가 아니었다. 향촌동은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를 품고 있는 공간이었고, 그것을 통해 지역의 문화가 성장한 공간이었다.
향촌동은 일제 강점기 때에 촌상정(村上町)이라 불렸던 동네다. 1946년부터 향촌동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 동네가 ‘향기롭고 가장 많이 변화한 곳’이라는 뜻에서였다고 한다.(대구 지명 유래) 동네의 북쪽을 태평로가 동서로 가로지르고 그 위는 경부선 철도다. 동쪽에 중앙로가 남북 방향으로 지나가는데 그 길 북쪽을 막아선 복합 건물이 민자 대구 역사다.
뜻과는 달리 다소 천박하게 쓰이는 ‘향기 향(香)’ 자를 쓰고 있지만 원래 향촌동은 경상 감영의 화약고가 있었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부근에 중앙 염매소가 있었는데, 이곳은 오늘날 중앙시장의 기원이 되었다. 향촌동은 대구역이 들어서고 읍성이 헐리면서 도심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올랐다고 한다.
향촌동, 피난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향촌동은 해방 5년 만에 일어난 한국전쟁의 생생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서울 함락 이후 대구로 내려온 문인들이 향촌동의 다방에 머물면서 원고를 썼고, 그 원고료로 막걸릿집을 주유했다. 문인뿐 아니라 음악가, 연극 영화인, 화가들이 어울려 후방의 문화 예술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전쟁은 그들 피란 문화예술인을 통해 한갓진 지방 도시에 예술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다방과 음악 감상실에서 그들이 나눈 대화가 노래가 곧 시와 음악이 되었다. 음악가 김동진, 나운영, 연극 영화인 신상옥과 최은희, 화가 권옥연, 김환기, 이중섭 같은 이들이 그들이었다.
한국전쟁과 함께 피란 문단이 형성된 향촌동에는 5, 60년대를 풍미한 시인 묵객들의 발자취가 선연했다. 피란 문인들이 날마다 모였던 음악 감상실 르네상스, 구상 시인이 단골로 묵었던 화월여관, 이중섭은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던 백록다방 등이 그것이었다. 향촌동은 이들 문화예술인들이 전쟁의 후유증 속에 삶의 고뇌와 문학과 예술에 대한 꿈과 함께 실향과 이산의 아픔을 나누던 곳이었다.
그예 향촌동은 피란 온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요, 대중 예술의 요람이 되었다. 이 시기의 대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극영화 제작이 유지된 한국 영화 현장의 중심이었고,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사가 한국가요의 맥을 잇고 있었기 때문이다.
향촌문화관은 이러한 내력의 공간, 그 역사성을 중심으로 향촌동의 역사와 그 의미를 환기하고 있다. 문화관은 향촌동의 흥망성쇠를 연표와 사진, 영상자료로 표현하는 한편 실감 나는 모형과 배경 그림을 통해 중앙로와 북성로 공구 골목, 대구역, 교동시장 따위의 주요 공간을 재현하고 있다.
나는 중앙통 부근의 거리로 재현된 명통구리 양복점과 애안당 따위의 오래되거나 지금은 사라진 점포들 앞에서 문득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입장객들을 4, 50여 년 전의 시간으로 되돌려 주고 있는 것 같았다.
향촌문화관의 3, 4층은 대구문학관으로, 일제 강점기와 1950년대 전후 문학을 꽃피워낸 1, 2세대 작가들의 흔적을 중심으로 대구 문학의 역사와 얼개를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대구문학관은 굳이 향촌문화관과 나누어 이해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향촌동의 역사와 대구 문학은 매우 긴밀히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향촌동의 다방과 술집에서 포효하던 문인들이 곧 대구 문학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전시관 답사, 혹은 대구 문화의 ‘재발견’
3층에 마련된, ‘대구 문학 아카이브’는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대구 문학의 발자취를 시대순으로 조명하고 있고 ‘명예의 전당’에는 현진건, 이상화, 이장희와의 특별한 만남이 준비되고 있다. 또 이들 문인이 찾던 술집과 다방, 좁은 골목길을 재현하여 시대를 넘어 문인들의 상징적 이미지와 만날 수 있게 하고 있었다.
4층은 대구 문인들의 저작과 다양한 문학 서적들을 열람할 수 있는 문학 서재다. 그냥 구색만 갖춰 놓은 것은 아니고 장서의 양이 실팍하다. 도서관이 아니어서 열람만 가능하고 대출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나만의 엽서를 만들어 우체통에 넣으면 배달해 주는 ‘즐거운 문학 공방’도 마련되어 있다.
지하에는 음악 감상실 ‘녹향’이 자리를 옮겨 문을 열고 있었다. 물론 영업 시설이 아닌 향촌문화관의 일부다. 녹향은 1946년에 문을 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 감상실이라 한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형의 친구들이 즐겨 드나들었던 공간인데, 정작 나는 거기 가본 적이 없다. 시간이 없어 공간을 한 바퀴 둘러보는 걸로 음악 감상을 대신했다.
향촌문화관은 대구 최고의 번화가라는 지위를 동성로에 물려준 향촌동, 그 도회의 공간과 번성했던 시대를 무심히 돌아보게 해 주는 듯했다. 그것은 단지 물리적 장소에 불과한 도시의 공간이 시대와 문화, 사람과 정서를 어떤 방식으로 담고 있는지를 성찰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공간이든 불과 두어 시간으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한갓진 일별(一瞥)만으로 특정 공간이 갈무리하고 있는 역사를 깨우치기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제대로 향촌문화관과 대구문학관을 즐겨 답사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확인하면서 향촌문화관을 떠난다.
도심에 문을 연 향촌문화관과 대구문학관은 마치 무심히 오늘을 사는 대구 시민에게 대구가 감추고 있는 도시의 속살을 은근히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대구가 아무 특색 없이 비대해진 한갓진 도시일 뿐이라고 느낀다면 주말에 넉넉히 시간을 챙겨 향촌동으로 가라. 비록 한정된 공간, 모형과 배경 그림만으로 떠나는 길이긴 하지만 이 무심한 시간여행의 끝에서 당신은 대한민국 3대 도시 대구와 그 문화를 새롭게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2014. 11. 28. 낮달
덧붙이는 글 | 향촌문화관·대구문학관
· 대구광역시 중구 중앙대로 449 (향촌동 9-1)
· 문의·안내전화 : 053-661-2331 / 팩스 : 053-661-2339
· 관람시간 : 09:00 ~ 18:00
· 휴관일 :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이면 익일 휴무), 1월 1일, 설날, 추석날
· 오전 11:00~12:00, 오후 14:00~15:00 사이에는 관람 해설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달구벌 나들이] ② 대구 대봉동 ‘김광석 길’
[달구벌 나들이] ③ 대구박물관(1) 첫 만남과 상설 전시
[달구벌 나들이] ④ 대구박물관(2) ‘마침내 찾은 유적 고대마을 시지(時至)’전
[달구벌 나들이] ⑤ 대구 금호강 하중도(河中島) 유채꽃
[달구벌 나들이] ⑥ 대구 달성공원의 숨은 숲길, ‘토성 둘레길’
[달구벌 나들이] ⑦ 50년 전 ‘중앙공원’, ‘경상감영공원’이 되었다
[달구벌 나들이] ⑧ 조선식산은행 자리에 들어선 대구근대역사관
'이 풍진 세상에 >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봄날에는… (0) | 2021.03.16 |
---|---|
‘봄 기척’ 산수유와 매화 (0) | 2021.03.07 |
시인의 마을, 생명의 숲을 찾아서 (2) | 2020.11.12 |
일연의 인각사, 혹은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 (0) | 2020.11.11 |
경북 군위에도 ‘작은 공룡능선’이 있다 (0) | 2020.11.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