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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50년 만에 찾은 도심 공원, 벤치에 홀로 앉은 노인들이 외롭다

by 낮달2018 2023.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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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 나들이] ⑦ 50년 전 ‘중앙공원’, ‘경상감영공원’이 되었다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경상감영공원의 봄 풍경. 맨 아래 도로 경상감영길이고, 왼쪽 끝에 대구근대역사관이 보인다.

지난 화요일(9.12.)에 기차로 대구에 들러, 경상감영공원과 대구근대역사관, 그리고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을 돌아봤다. 근처의 고가를 돌아보려다가 문득 대구 도심에 들러볼 곳이 몇 군데 있다 싶어서 서둘러 기차를 탄 것이다. 기차로는 30분 남짓이면 대구역에 닿으니, 굳이 승용차를 이용할 일이 없다.

 

50년 만에 다시 찾은 옛 중앙공원

 

대구역에 내려서 중앙로의 향촌문화관과 대구문학관을 지나니 경상감영공원은 금방이다. 1970년에 ‘중앙공원’으로 개원했을 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처음으로 공원에 들른 건 이듬해였다. 공원이라지만, 끝에서 끝이 보일 만큼 작았고, 일반적인 조경을 빼면 볼 만한 시설도 거의 없었다.

 

내가 떠난 사이에 대구도 많이 변했다. 중앙공원이 경상감영공원으로 바뀐 것뿐 아니라, 곳곳에 시민들을 위한 휴식 시설도 앞다투어 들어섰다. 도심에 경상감영공원 말고도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1999)과 2·28기념 중앙공원(2003)에 문을 열었다. 도시에 녹지 공간이 늘면서 ‘대프리카’라고 불린 도시의 여름 기온이 다소 낮아지는 변화도 있었다고 들었다.

▲ 인터넷에서 찾은 1971년의 중앙공원. 왼쪽이 선화루, 오른쪽이 징청각이다. 가운데 건물이 대구근대역사관이다. ⓒ 한국저작권위원회

중앙공원에 자주 들르게 된 건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다. 도심에 있어 약속 장소로 맞춤했고, 입장료(당시 20원)가 부담스럽지 않아서였다. 기억에 남는 풍경은 연못이 있고, 그 옆에 정자가 하나 있었던가. 아니, 정자는 종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내가 고1 때 난생처음 처음 쓴 단편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할 만큼 중앙공원은 내 성장기의 주요한 공간이었다.

 

400여 년간 자리를 지켜온 경상감영

 

조선시대 경상도의 행정과 군사·재판 등을 관할하던 행정조직인 경상감영이 지금 자리에 처음 세워진 것은 1601년(선조 34)이다. 조선 전기에 경상도는 행정과 군사적 필요에 따라 좌도와 우도로 여러 차례 분할을 거듭했다. 그래서 경상감영은 조선이 개국하면서 경주에 두었으나, 그 뒤 상주(1408), 성주 팔거현(1593)을 거쳐 1596년(선조 29)에 대구부(府)로 옮겼다.

 

1599년(선조 32)에는 안동부로 이전했으나, 1601년(선조 34)에 대구부로 다시 돌아왔다. 그 뒤, 경상감영은 대구에 정착하여 1896년(고종 33) 갑오개혁으로 지방 행정을 13도 제로 개편한 뒤에도 경상북도의 중심지였다. 경상감영은 1910년 경상북도청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관련 글 : 조선 팔도, ‘13도제로 개편되다]

 

경상감영이 대구에 정착하게 된 것은 임란(1592~1598)을 겪으면서 전략 요충지로 드러났으며, 경상도의 중심이라 물산의 결집과 이동이 쉽고, 군사나 지방 관리들의 감독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모로 편리하여서다. 전기에는 관찰사(감사)는 임명 이후 관할지역을 순시하는 방식으로 다스렸으나, 후기에는 감영에 머무르면서 업무를 수행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감영 안에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감영 내의 건물들도 체계를 갖춰 들어섰다. 또한 정3품의 중군이라는 군사 막료가 신설되고 감영에 배속된 군관과 각종 장교 및 병사가 대폭 증강되었고, 감영 직제의 정비와 시설의 확충과 함께 등 감영의 예산도 늘었다.

▲ 1906년 달성공원 토성 둘레길에 옮겨진 경상감영의 누각인 관풍루.(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

본래 경상감영은 달성(지금의 달성공원)에 있었고, 잠시 안동으로 옮겨졌다가 선조 34년 관찰사 김신원 때 지금 자리로 옮겨왔다. 잠깐 안동부에 감영을 두었다는 <대구 읍지(邑誌)>의 기록에 대해 ‘대구역사문화대전’에는 <영가지(永嘉誌)>와 <안동부 읍지>에 관련 언급이 없으므로 안동부에 감영을 설치한 사실은 없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본다.

 

그 후, 현종 11년 (1670), 영조 6년 (1730), 순조 6년(1806) 세 차례의 화재를 겪으면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순조 7년(1807)에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부사인 윤광안(1757~1815)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터는 1910~1965년까지 경상북도청사로 사용되다가 도청이 옮겨간 후 1970년 공원을 조성하여 ‘중앙공원’이 되었다. ‘경상감영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97년이다.

▲ 공원에는 담장이 없어 공원표지판을 경계로 도로와 공원이 구분되는 구조다. 오른쪽 끝에 선화당이 보인다.
▲ 경상감영공원의 하마비. 절도사 이하 모두 말에서 내리라고 씌어 있다.
▲ 경상감영의 정청, 관찰사의 집무 공간이었던 선화당. 조선시대의 관아 건물로 귀중한 자료여서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래 경상감영 안에는 선화당(宣化堂), 응향당, 제승당, 응수당, 징청각(澄淸閣) 등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경상감영의 정청(政廳),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보물)과 관찰사의 살림채 징청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이 남아 있다. 경상감영의 누각 관풍루(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는 1906년 달성 토성으로 옮겨갔다.

 

담장 없는 공원, 소나무와 배롱나무 교목이 우거진 휴식처

▲ 국립기상박물관에 전시 중인 국보 영영 측우대

입장료를 받던 1970년대의 중앙공원 시절과 달리 경상감영공원은 담장이 따로 없다. 공원 앞길은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이어지는 대구 중구 ‘골목투어’ 1코스이기도 한 경상감영길이다. 느티나무 가로수 안쪽으로 경상감영공원 표지석을 경계로 치렁치렁한 잎을 늘어뜨린 소나무와 배롱나무 등 교목이 우거진 공원이 펼쳐진다.

 

출입구 쪽에 ‘절도사이하개하마(節度使以下皆下馬:관찰사 이하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라 새긴 하마비를 오른쪽으로 돌아서 들면 바로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이다. 앞면 6칸, 옆면 4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주심포 양식의 선화당은 조선시대의 관아 건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경상감영 선화당은 1906년 통감부의 요청에 친일반민족행위자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박중양(1872~1959)이 적극적으로 부응하여 대구 이사청(理事廳)의 임시 청사로 사용되었다. 이사청은 통감부의 지방통치 기관이니, 조선시대 경상도의 상징 공간인 선화당이 일제 침략 세력의 공무 공간으로 활용되는 치욕을 겪은 것이다. 그 뒤 1910년부터 경상감영 선화당은 경상북도청으로 사용되었다.

▲ 선화당 앞에 세운 측우대와 측우기. 모두 모형이다.
▲ 옆에서 바라본 선화당. 선화당은 앞면 6칸, 옆면 4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주심포 양식의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다.
▲ 뒤에서 바라본 선화당. 선화당은 400여 년간 제자리에서 이어져 왔으며, 징청각과 함께 규모, 구조의 원형을 유지해 왔다.
▲ 선화당 뒤에 있는 관찰사의 관사(살림집)인 징청각. 징청각은 1970 년 중앙공원으로 조성될 때 함께 보수되었다
▲ 징청각은 앞면 8칸, 옆면 4칸으로 넓이가 무려 227㎡나 되는 팔작집이다. 관찰사의 살림집이 집무 공간인 선화당보다 더 크다 .

선화당 왼쪽 앞에 1770년(영조 46)에 청동제 측우기와 함께 제작된 측우대 모형이 있다. 측우기는 없어지고, 받침이었던 대석(臺石)만 남은 영영(嶺營) 측우대는 2020년 국보로 지정되어 지금 서울 국립기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선화당과 징청각, 옛 사진으로 환기한 50년 전

 

선화당 뒤쪽에 복원된 징청각은 선화당과 함께 1789년 불타 관찰사 이조원(1735~1806)이 재건하였다. 그러나 1806년 화재로 다시 불타, 1807년(순조 7)에 관찰사 윤광안이 중건하였다. 징청각은 1970년 중앙공원으로 조성될 때 함께 보수되었다.

 

징청각은 앞면 8칸, 옆면 4칸으로 넓이가 무려 227㎡나 되는 팔작집이다. 관찰사의 살림집이 집무 공간인 선화당보다 더 크다. 정면과 측면 칸 모두 협칸(정중앙 양쪽 칸)으로 갈수록 칸살이 좁다. 바닥에는 장마루를 깔았고, 개방된 네 면에 난간을 돌려 누마루처럼 꾸민 점이 특이하다.

 

선화당과 징청각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나는 50년 전에도 선화당과 징청각 건물이 있었던가 하면서 반신반의했었다. 다른 데 있던 건물을 여기로 옮겨온 것이 아닐진대, 이 건물은 50년 전에도 같은 자리에 있었을 터인데, 묘하게도 내겐 그런 기억이 한 자락도 없었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다가 인터넷의 1971년에 찍은 중앙공원 사진(한국저작권위원회의 공유자료)을 보고 등허리가 서늘해졌다. 그야말로 70년대식으로 조경된 꽃밭 저편으로 덩그렇게 선 건축물은 바로 선화당과 징청각이었던 까닭이다. 지금과 다른 점은 건물의 외벽이 없어서 마치 누각처럼 보인다는 점일 뿐이다.

▲ 경상감영공원의 뒷담 앞에 모아둔 선정비. 모두 29기다. 관찰사와 대구도호부의 행정을 맡은 대구판관의 선정비들이다.
▲ 통일의 종이 설치된 연못가 종각. 한때 제야의 종이었으나 지금은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의 달구벌 대종에 구실을 물려주었다.

너르게 조성된 화단에 핀 팬지꽃 군락이 묵은 기억의 켜를 헤집었던가, 그제야 50년 전의 기억이 아스라하게 떠올랐다. 인간의 기억이란 별로 믿을 게 없는 거 아닌가. 팬지꽃 화단 저편의 두 건물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보낸 반세기 세월의 무게가 새삼스러워졌다.

 

징청각 뒤의 배롱나무 숲 너머 담장 앞에는 모두 29기의 선정비를 모아 세워두었다. 갖가지 형태의 빗돌은 경상감영을 거쳐 간 관찰사 부사들의 자취일 것이지만, 그 내용은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빗돌 왼쪽에는 꽤 규모가 있는 장독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공원 관리사무소에 물으니 시민이 편히 쉴 수 있는 분위기를 위해서 조성한 것이라 했다.

 

선화당과 징청각 왼쪽 대구근대역사관으로 가는 길목에 분수와 오작교가 걸린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데, 연못가 정자는 ‘통일의 종’을 단 종각이다. 한때는 이 통일의 종이 대구시에서 울리던 제야의 종이었는데, 지금은 국채보상공원의 달구벌대종에 그 구실을 넘겨주었다.

▲ 경상감영공원의 종각을 지나면 대구근대역사관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이어진다. 역사관은 옛 식산은행 대구지점이었다.

감영공원은 ‘근대 골목투어’ 제1코스 ‘경상감영 달성길’의 출발점

 

종각을 지나면 바로 1932년 건립된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에 들어선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이어진다. 공원은 대구의 ‘근대 골목투어’ 제1코스 ‘경상감영 달성길’의 출발점이다. 북성로와 서성로를 중심으로 한 3.25㎞에 2시간 30분이 소요되는 탐방코스(경상감영공원→향촌문화관→북성로→경찰 역사체험관→최제우 나무→달서문→이상화 생가→이병철 고택→삼성상회 옛터→달성공원)이다.

 

사람들이야 무심히 일별하고 스쳐 지나갈 뿐이지만, 경상감영의 옛터는 2020년 6월에는 경상감영의 정문과 부속 건물지 등을 발굴하고 조사하였다. 그 결과, 경상감영 기초시설인 중삼문과 부속건물 등 경상감영의 배치 양상 및 구조 복원의 실체가 확인되었고, 이례적으로 석인상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경상감영지(址)는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징청각 뒤 선정비석 앞의 벤치에 앉은 노인들. 모두 벤치 하나를 차지하고 쓸쓸하게 앉아 있다.

나는 나머지 일정을 마치고, 대구에 사는 벗 박을 만나 가볍게 낮술을 한잔하고 차를 마시고 이런저런 안부를 나누고 돌아왔다. 벗에게도 운을 떼었지만, 돌아와서도 내게 잔상으로 남은 건 경상감영공원의 벤치에 쓸쓸하게 앉아 있던 노인들의 모습이다.

 

벤치에 홀로 앉은 노인들, 그리고 세월

 

선화당과 징청각 주변을 빙 둘러 이어진 벤치는 모두 남자 노인들이 혼자서 차지하고 있었다. 경내를 돌면서 확인한 것은 그들은 함께 모여 말동무라도 할 법하건만, 모두 혼자였다. 가끔 여성 노인이 눈에 띄었으나, 그들은 혼자가 아니라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였다. 그래서 그들은 더 애잔해 보였다. 지난해 달성공원에서도 만났던 풍경인데, 유독 먹먹한 심정이 더했다. [관련 글 : ! 달성(達城), 토성 둘레 숲길을 걷다]

 

그 서글픈 풍경을 이야기했더니 아내는 그게 우리 모습 아니냐고 반문했다. 왜 노인들은 그렇게 공원을 서성이는 걸까, 며느리와 같이 집에 머무는 게 힘겨워서일까 했더니 아내는 혼자라도 집에서 견디는 건 쉽지 않아서일 거라고 말했다. 서울 탑골공원 노인들이 남 이야기인가 했더니 우리 주변에도 그런 풍경은 연출되고 있는 것이었다.

 

 

2023. 9.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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