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일연의 인각사, 혹은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

by 낮달2018 2020. 11. 11.
728x90

[가을 나들이 ②] 군위 인각사(麟角寺)

▲ 인각사 극락전 . 최근 발굴 사업이 끝난 뒤에 복원한 전각이다 .

아미산 가는 길에 애당초 내 여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인각사에 들른 것은 아쉬움 때문이다. 군위군이 브랜드 슬로건으로 선정할 만큼 일연과 <삼국유사>, 그리고 인각사는 지역의 풍부한 문화 콘텐츠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인각사는 한적한 시골, 초라한 전각 몇 채가 쓸쓸하게 서 있던 20여 년 전의 풍경에 머물러 있다. 물론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한 절집이라고 해서 인각사가 규모를 갖춘 사찰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나는 거기서 일연의 시대를 떠올릴 단서라도 하나 찾아보고 싶었다.

 

아직도 인각사 대신 ‘인각사지’인 까닭

 

▲ 보각국사 일연(一然, 1206~1289)

인각사는 고로면 화북리 화산(華山)의 북쪽 기슭 강가 퇴적 지대에 자리 잡은 절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 의하면, 인각사 북쪽에 있는 높은 절벽에 전설상의 동물인 기린(麒麟)의 뿔이 걸렸다 해서 인각사가 되었다.

 

인각사는 선덕여왕 때에 원효가 세웠다고 알려졌지만, 문헌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일연은 고려 충렬왕 10년인 1284년, 토지 백경(百頃)을 받아 인각사를 중건하면서부터 이 절에 머물렀다. 이 무렵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할 만큼 사세가 컸다.

 

일연(一然, 1206~1289)은 경상도 경산 사람이다. 속성은 김, 본관은 경주, 속명은 견명(見明)이다. 시호는 보각(普覺)이며, 탑호(塔號, 스님의 별호)는 정조(靜照)다. 1219년 승려가 된 뒤 1227년 승과에 급제했고 1246년 선사(禪師), 1259년 대선사(大禪師)에 올랐다.

 

▲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 국보 제306호 .

1277년(충렬왕 3) 왕명으로 운문사 주지에 취임하였고 1283년 국존(國尊, 국사)으로 추대되어 원경충조(圓鏡冲照)의 호를 받고, 이 해 노모의 봉양을 위해서 고향에 돌아갔다. 일연은 이듬해 인각사를 중건한 뒤 이 절에 머물며 <삼국유사>를 지었고 1289년에 입적했다.

 

인각사는 조선 후기에 거의 폐사되어 터만 남았다. 1992년 첫 발굴이 시작되면서 사적 제374호로 지정되었다. 지금도 문화재청 목록에서 인각사가 ‘인각사지(址)’로 나오는 이유다. 보각국사 정조지탑(보물 제428호)과 인각사 석불좌상(경북 유형문화재 제339호), 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7호)만이 당대의 유물일 뿐, 지금 인각사 터에 세워진 전각들은 모두 요즘 지어진 것들이다.

▲ 군위 인각사지 5차 청동 유물 출토지 주변 ⓒ 문화재청
▲ 인각사 주변에서 이루어진 발굴 결과 출토된 청동 유물들 . 불교 공양구들이다. ⓒ 문화재청

전각으로는 발굴 뒤 복원한 극락전이 눈에 띌 뿐이고 국사전과 명부전은 보이지 않는다. 일연학연구소, 일연선사 생애관, 종무소, 요사채 등이야 부속건물일 터이니 말할 나위가 없다. 나중에야 국사전과 명부전이 발굴을 위해서 헐렸다는 걸 알았다.

 

화요일 오전, 방문객은 우리 둘뿐이었다. 극락전 앞 삼층석탑 옆에서 개 한 마리가 편안한 자세로 누워서 틈입자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최근 지은 극락전이 날아갈 듯한데 같은 평면 위이기 때문일까. 기단 아래 세운 탑은 존재감을 잃은 듯 보였다.

▲ 부서지고 깨어진 탑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 .
▲ 잔뜩 훼손되어 일부만 남은 보각국사 정조지탑 비 . 다행히 비문은 탁본으로 남아 있다 .
▲ 일연의 승탑인 보각국사 정조지탑 . 탑비와 함께 보물 428호로 지정되어 있다 .

일연의 승탑인 보각국사 정조지탑은 고승의 모습을 조각한 10~11세기의 석불좌상과 함께 일연선사 생애관 앞에 모셔져 있다. 보각은 시호고 정조는 탑호다. 이 승탑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게 도굴되어 화북3리, 부도골에 넘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복원했으니 이 절집의 쇠락을 지켜본 유물인 셈이다.

 

폐사지에 남은 일연의 승탑과 탑비

 

일연은 인각사에 주석하며 <삼국유사>를 지으면서 늙으신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였다. 입적한 뒤에도 해가 뜰 때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일연스님 어머니의 묘를 비추었다고 한다.

 

보각국사비는 일연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塔碑)다. 탑비는 제자인 법진이 세웠는데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으며, 글씨는 진나라까지 가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 왕희지 글씨를 얻기 위해 일찍부터 과도한 탁본이 이루어져 비가 손상돼 현재 비신(碑身)의 극히 일부만 남았고 이를 비각 안에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 비문은 탁본이 20여 종 남아 내용을 복원할 수 있다. 비문에는 보각국사가 경주에서 태어나 출가하여 승과에 급제하고 선월사(禪月寺), 오어사(吾魚寺), 인홍사(引弘寺), 운문사(雲門寺) 등에서 주석(駐錫)하다 국사가 되고 인각사에 물러 나와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고 있다.

 

“괴겁(壞劫)의 맹화(猛火)가 대천계(大千界)를 태워
산하대지(山河大地) 모두가 소진(消盡)하여도
위대한 이 비석만 홀로 남아서
이 비문도 영원히 남아지어다.”

 

비문 끝에 있는 기원에도 불구하고 탑비는 임란 때 왜병들이 왕희지의 글이라고 비를 찍어내다 불에 타서 결정적으로 손상을 입었다. 그 후에도 이 비의 글을 갈아 마시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헛소문 때문에 심한 수난을 당했다고 한다.

▲ 인각사 바로 옆으로 지방도로가 지난다. 도로 건너편의 암벽이 학소대다 .

인각사는 거듭된 발굴을 통해 이미 그 규모가 예사롭지 않음이 밝혀졌다. 국사를 지낸 당대의 고승이 주석하고 구산문도회를 두 번이나 열 만한 정도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2009년 발굴에서 금동병 향로나 청동향합, 청동 정병, 청동 이중합 등 통일신라 불교 공양구들은 일괄로 출토됐다는 점도 인각사의 성격을 일정하게 드러내 준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의 역사적 의의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때는 고려가 원나라의 직접적 간섭을 받기 시작하던 13세기 무렵, 일연은 실천적인 불교를 표방하고 현실의 위기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모색하였다.

 

<삼국유사>, 한계를 넘는 역사적 상상력

 

몽골과의 오랜 항전으로 민족적 자주 의식이 높아진 상황에서 <삼국유사>의 편찬은 그러한 노력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원과는 다른 고려의 역사적·지역적 독자성과 문화적 우수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고조선을 고려 왕조의 기원으로 보고, 단군 조선으로부터 삼한과 삼국을 거쳐 고려에 이르는 역사 계승 관계를 설정한 것은 각별한 주목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삼국유사>가 신라와 불교, 설화를 중심으로 한 서술이라는 한계를 일정 부분 상쇄해 주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또 ‘설화문학의 보고’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중세의 설화를 기록하고 있으며 향찰(鄕札)로 기록된 향가 14편을 수록하고 있어 고전시가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말하자면 <삼국유사>는 만만찮은 역사적 상상력이다.

▲ 일연선사 생애관 앞에 세운 일연 찬가 돌비. 고은 시인이 지은 글이다 .
▲ 인각사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석재 부재들. 이 절집의 규모를 추정하게 해 준다 .

일연선사 생애관은 묵은 건물을 개수해 세운 건물이다. 그 앞에 ‘일연 찬가’를 새긴 돌비가 있다. 그냥 지나치려다 지은이가 고은 시인인 걸 확인하고 느릿느릿 따라 읽었다. 고은 시인의 가락이 저절로 마음에 겨워지는 글이다.

 

“(……)오라. 위천(渭川) 냇물 인각사로 오라. 통곡의 때 이 나라 온통 짓밟혀 어디나 죽음이었을 때 다시 삶의 길 열어 푸르른 내일로 가는 길 열어 정든 땅 방방곡곡에 한 송이 연꽃 들어 올린 그이 보각 국존 일연선사를 가슴에 품고 여기 인각사로 오라.(……)”

 

절터 가장자리 화장실 옆에 절터에서 발굴 출토한 석물들을 모아놓았다. 크고 작은 석재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잠깐 700여 년 전 번성했던 인각사의 영화를 그려보았다. 곧 들어갈 5차 발굴이 끝나면 인각사는 새롭게 복원될 것이라고 한다.

 

21세기에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

 

한길 건너편은 흐르는 물은 위천이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 낭떠러지가 직각으로 세워져 있는데 이를 학소대(鶴巢臺)다. 물론 학도 그 보금자리도 없다. 그러나 이 드문 풍경이 인각사라는 대찰이 세워지는 한 요소가 된 것은 틀림없으리라.

 

인각사에서 2~3km 화북댐 쪽으로 오르면 군위군과 수자원공사가 조성한 일연공원이 있다. 군위다목적댐 건설에 따른 주변 지역 경제 활성화 및 환경 개선을 위해 한국수자원공사가 조성하고 군위군이 인수, 관리하는 공간이다.

▲ 일연공원 안 일연스님의 공간 저 철 구조물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 일연공원에는 군위군이 <삼국유사> 수록 향가 14수 가운데 7수를 골라 세운 향가비가 있다 .
▲ 일연공원은 잘 조경되어 있었지만 , 평일에 찾는 사람은 우리 말고는 없었다 .

공원은 잘 조경되어 있지만, 평일에 이 외진 공원을 찾는 이는 없다. 인적 없는 공원을 도는데 향가비가 눈에 띄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14수의 향가 가운데 처용가·서동요·찬기파랑가·제망매가·헌화가·모죽지랑가 등 향가 7수를 자연석에 새겨 넣은 것이었다.

 

공원 가운데쯤에 ‘일연스님의 공간’이라 구획한 데가 있다. 가운데 표면에 삼국유사 본문을 새긴 철 구조물을 세워 놓았는데 그 구조물의 모습이 심상찮다. 주변을 돌아봐도 그걸 소개하는 안내판은 보이지 않는다.

 

내 눈에는 그게 아무리 봐도 곡괭이 같은데, 왜 그걸 세웠는지, 그게 일연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알 수 없다. 공원 위 군위댐 근무자에게 물어봐도, 돌아와서 군위군 문화관광과와 일연공원 관리팀에 거푸 물어봐도 아는 이가 없다. 인터넷을 뒤져봐도 답을 찾지 못했다.

▲ 일연공원 위의 군위다목적댐. 화북리에 있다 해서 화북댐이라고도 불린다.

지역에 일연선사가 주석한 절이 있었고, 그 절에서 <삼국유사>라는 걸출한 역사서가 태어났다. 후대에 이를 지역의 브랜드 슬로건으로 삼고 관광 콘텐츠로 활용하려 하지만 정작 허점은 이런 세부적인 부분에 있는 게다.

 

하긴 사람들은 공원의 조경을 즐기러 올 뿐, 일연과 그의 시대를 떠올리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건 너무 오랜 세월 저편의 나와 무관한 이야기라고 여기니까. 일연공원이든 복원 불사로 인각사가 옛 모습을 되찾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이 시대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에 그칠 뿐이다.

 

 

2017. 11. 10. 낮달

 

[가을 나들이 ①] 경북 군위군 고로면 아미산(峨嵋山)

[가을 나들이 ③] 금성면 대리리 조문국 사적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