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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연 국립대구박물관, 20년이 지나서 처음 들렀다

by 낮달2018 2020.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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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 나들이] ③ 대구박물관(1) 첫 만남과 상설 전시

▲ 국립대구박물관에서는 특별전시 '마침내 찾은 유적 고대마을 시지' 전이 열리고 있다.

① 국립대구박물관, 첫 만남

지난 3월 24일 국립대구박물관을 찾았다. ‘마침내 찾은 유적 고대마을 시지(時至)’전이 열리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서였다.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에 가서 거기서 박물관까지는 버스를 이용했다. 버스에 익숙지 않았지만 내려받은 대구 시내버스 어플로 차편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대구박물관은 처음이다. 이 박물관은 1994년에 개관했다. 서른아홉, 내가 복직하던 해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는데 이제야 나는 이 박물관을 찾은 것이다. 특별전을 알리는 신문 기사를 읽지 않았다면 여기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학교 때 유학 와서 대학까지 여기서 다녔으니 대구는 익숙한 도시다. 그러나 초임 발령을 받아 경북 동부지역으로 간 뒤 나는 이 도시와 멀어졌다. 90년을 전후해 한때는 벌판이었던 곳이 인구 밀집지로 바뀌는 등 도시는 급속히 팽창했다.

 

규모가 커지는 것과 반비례해 도시는 내게 낯설어졌다. 학창 시절에 알던 대구는 지금의 3분의 1이나 될까. 번성해진 도시 외곽은 낯설기 짝이 없다. 나중에는 도심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중앙통’으로 불리던 번화가 주변의 극장들은 지금 옛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이른바 복합상영관이 들어서면서 도시의 문화지도도 바뀐 것이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때만 해도 대구에는 국가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이 따로 없었다. 대학 박물관이 몇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온갖 이름의 박물관이 다투어 문을 여는 시대니, 주변에 박물관이 차고 넘친다. ‘박물(博物)’이 ‘넓을 박(博)’자를 써서 ‘여러 사물’이라는 뜻이 있으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이다.

▲ 국립대구박물관이 개관한 것은 1994년인데 나는 20 년도 더 지나 이곳을 찾았다 .

그러나 역시 박물관의 본령은 ‘역사적 유물을 수집·보관·전시’하는 곳이다. 박물을 영역으로 구분하여 그 우열을 이야기하는 것은 온당치는 않다. 그러나 보수적인 의미에서 박물관이라 하면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역사적 유물을 통하여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시간을 집적하고 있는 곳이기 쉽기 때문이다.

 

야외 전시 돌탑들

 

나는 정류장에 가까운 북문으로 박물관에 들어섰다. 붉은 벽돌의 기다란 본관 건물이 우람했다. 건물 앞은 야외 쉼터와 마당과 정원이 이어졌는데 본관 건물 현관을 기준으로 좌우에 각각 탑이 한 기씩 서 있었다. 오른쪽에 있는 게 대구 매여동 삼층석탑이고 왼쪽이 정도사 터 오층석탑이다.

▲  대구 매여동 삼층석탑 ( 고려 시대 , 10 세기 )

매여동 삼층탑은 10세기 고려 시대 작품이라는 팻말 외에는 특별한 설명이 없다. 부재로 발굴된 것을 맞추어 놓은 것이라는데 따로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소박한 모습이 괜찮았다. 마치 안동의 임하리 마을에 흩어져 있는 돌탑들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관련 글 : 탑의 마을, 임하리]

 

왼쪽 탑은 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의 정도사(淨兜寺) 터 오층석탑이다. 1924년 경복궁으로 이전했다가 1994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약목 복성리라면 가까운 데여서 그 절터가 어떻게 남아 있나 검색해 봤는데 거기 경부선 철길이 지나간 모양이었다.

 

이 탑은 신라 석탑의 양식을 이은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원래 5층이었으나 현재는 5층 지붕돌은 남아 있지 않고, 5층 몸돌 위에 머리 장식 받침인 노반(露盤)만 얹혀 있다. 아래층 기단 각 면에는 안상(眼象, 불상의 대좌나 석등, 석탑, 목조건축 등, 불교 미술의 모든 장르에서 흔하게 나타나며 연화문과 함께 가장 많이 쓰이는 문양)을 세 구씩 조각하고 안상 무늬의 아랫부분에 귀꽃을 표현하였다.

▲  칠곡 정도사 터 오층석탑 .  보물 제 357 호

탑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돌 하나로 되어 있고 지붕돌은 너비가 좁고 두꺼우며, 추녀 끝은 살짝 위로 들려 있다. 몸돌의 높이가 2층으로 올라가면서 급격히 줄어서 이른바 ‘체감률’이 크다. 위층 기단 한 면에는 이 탑이 고려 현종 22년인 태평 11년(1031)에 국가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건립하였다는 명문이 있다.

 

탑을 옮길 때 탑 안에서 형지기(形止記, 탑 조성 때의 전말을 적은 기록)와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형지기에는 탑의 이름과 1019년부터 1031년에 걸쳐서 약목군의 향리와 백성들이 발원하여 건립하였다는 것 등을 이두식 표현으로 기재하고 있다. 이는 고려 시대의 이두 연구와 고려 전기의 사회·경제·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정도사 터 오층석탑은 보물 제357호로 지정된 유물이니 매여동 삼층탑과는 그 격에 있어서 비교를 불허한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두드러지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다. 집에 와서 찾아보고서야 이 탑이 예천의 개심사지 오층석탑(보물 53호)과 닮았다는 걸 알았다.

 

개심사지 탑은 고려 현종 1년(1010)에 조성되었으니 정도사 터보다 20여 년이 빠르다. 같은 오층탑에다 갑석에 탑기(塔記)가 음각된 점도 비슷하다. 무엇보다 전체적으로 아담하고 정돈된 느낌 등이 닮았지만 비례나 세련미로 따지면 개심사지 탑이 앞선다.

 

상설전시

 

공공기관이면서 직원들이 방문자들에 대해 각별한 예의를 갖추는 곳이 도서관과 박물관이다. 이들은 대체로 방문자들을 반색하며 반길 뿐 아니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을 베풀고자 애쓴다. 아무도 찾지 않는 도서관이나 박물관을 상상할 수 없으니 그들이 시민을 대하는 태도는 그런 데서 연유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한적한 금요일 오후의 박물관을 돌아보며 나는 근무자들의 친절한 응대를 받았다. 작정하고 갔는데도 박물관에 머문 것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전문 길라잡이의 안내를 받는 것도 아닌 이상, 박물관 구경이 어디 소설책 읽는 것처럼 이 잡듯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도 거기 머무르는 동안 나는 무언가 충만한 느낌을 겨워했다. 나는 각 전시실을 돌면서 거기 고여 있던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서 만나는 돌과 흙으로 된 유물들이 뿜어내는 시간의 자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굳이 설명을 읽지 않아도 그 돌과 흙에 서린 숨결들을 상상할 수 있었다.

▲ 대구 서변동 출토 빗살무늬 토기(신석기 시대)
▲ 대구 평촌동에서 출토된 배 모양 토기(삼국시대)
▲ 공주나 옹주 또는 사대부가에서 주로 혼례 때 입던 예복 활옷(조선 시대)

서둘러 한 바퀴 돌고 말았지만, 상설전시도 훌륭했다. 상설전시는 고대 문화실, 중세 문화실, 섬유 복식실 등 세 군데서 나누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 지역에서 출토된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고고, 역사 관련 유물을 소개하는 고대 문화실에선 후기 구석기 시대 유적인 안동 마애리 출토 주먹도끼를 만날 수 있었다.

 

주먹도끼는 사냥·도살·나무 가공·뼈 가공 등에 다용도로 사용되는 대표적인 구석기 유물이다. 1978년에 경기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 처음으로 발굴됨으로써 이른바 동아시아에는 주먹도끼 문화가 없다는 기존의 학설을 폐기하게 만든 석기다. 안동 마애리 구석기 유적은 2006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중세문화실은 대구·경북 지역의 불교문화와 유교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실이다. 불교문화의 수입 창구이자 신라불교의 보급 통로로 일찍부터 불교문화가 성행했던 경북 북부지역 등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금동불 등과 함께 조형미가 우수한 불교 조각품과 불교 공예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실에는 또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賜額)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과 유학자인 안향 선생 관련 유물들과 퇴계 이황의 글씨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내가 흥미로웠던 것은 한글 편지 몇 점이었다. 옛 한글로 쓴 세로쓰기 편지 글씨는 우리 어머니께서 지은 제문에 있던 바로 그 글씨였다.

▲ 한글로 쓴 편지. 내 어머니가 제문을 지으며 쓰던 바로 그 글씨체다.

섬유 복식실은 ‘실, 직조, 색채, 옷이라는 4개의 키워드를 통해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 옷의 기원에 대해 전반적으로 소개’하는 전시실이다. 나는 조선 시대 혼례 때 신부가 입었다는 붉은 활옷을 오래 감상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혼례 때는 일반 서민들도 궁중 예복을 착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고 한다.

 

1층 중앙홀 왼쪽에 기념품 판매장이 있었다. 나는 ‘시지 특별전’ 도록을 사고 싶었으나 값이 거의 4만 원 돈이어서 접고 대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행한 전시 소도록 두 권을 샀다. 저녁에 만나기로 한 벗들에게 주려고 <한국 고대 문자전> 도록은 두 권을 더 샀다.

▲&nbsp;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행한 소도록&nbsp; 2 권

나는 박물관 앞 정원에서 잠시 쉬었다. 역시 대구의 꽃 소식은 빠르다. 담장 가까이 백목련이 막 하얀 꽃잎을 열고 있었다. 박물관 시청각실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후에 ‘전시 해설’ 강의가 있다고 한다. 4월 말께 그 강의를 들으러 와야겠다고 마음먹지만 그게 어찌 될는지는 알 수 없다.

 

 

2017. 4.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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