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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마을 시지(時至)’, 수천 년 잠에서 깨어나다

by 낮달2018 2020.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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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 나들이] ④ 대구박물관(2)  ‘마침내 찾은 유적 고대마을 시지(時至)’ 전시회

▲ 전시회 리플릿

개관한 지 20년이 훨씬 지난 대구박물관을 처음 찾으면서 나는 조금 설레고 있었다. 내가 그린 ‘퇴임 후의 그림’에 없었던 박물관에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작 박물관에 가면서 유난을 떤다고 나무라지 마시라. 박물관이 일상이 되는 문화적 경험이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올해 나는 매월 두 차례씩 실시되는 동네 도서관 주관의 ‘인문학 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25인승 버스를 타고 두세 시간 안에 다녀올 수 있는 주변 지역의 절집, 문학관, 박물관, 도요(陶窯) 따위를 다녀오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빠듯한 시간에 숙제하듯 치르는 행사는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오가는 데 시간 대부분을 쓰고 불과 한 시간 남짓의 견학으로 끝나는 행사에서 참여자들은 시종 꿔다놓은 구경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집을 나서며 나는 박물관 나들이로 그런 아쉬움을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던 듯하다.

 

청동기 이래 마을 유적, 잠에서 깨어나다

 

‘마침내 찾은 유적 고대마을 시지(時至)’ 특별전 소식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시지’라면 내 친구가 근무한 학교가 있는 대구 외곽의 동네 이름이다. 그쪽 동네는 내가 대구에서 살던 때만 해도 옛 경산군(현재 경산시) 고산면이었다.

 

이 지역은 1981년 7월 대구가 직할시가 되면서 경산군에서 분리되어 대구로 편입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농촌 지역이었으나 1990년대 초반에 대규모 주거 지역으로 개발되어 현재는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신도시 지역이 되었다.

▲ 시지 특별전이 열리는 대구박물관 전시실 입구
▲ 여러면 석기 ( 대구 시지지구 생활유적 )
▲ 붉은간토기 [ 적색연마토기 ]( 청동기시대 )
▲ 항아리나 독 2~3개를 맞붙여 만든 관(棺)인 독널[옹관(甕棺)](초기 철기). 대구 욱수동 유적

시지(時至)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최동단 지역을 일컫는 명칭으로 좁은 의미로는 수성구 시지동을 지칭하고 넓은 의미로는 옛 경산군 고산면 일대를 이른다. ‘때맞춰 도착한다’는 뜻의 ‘시지’라는 지명은 전근대 숙박시설인 원(院)이 시지에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 시지 지역은 경산 서면으로 표기되어 있는, 옥산(玉山)과 사직단(社稷壇)이 있는 한적한 시골 마을일 뿐이었다. 그러나 안산과 성암산 등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고산 사이에 형성된 선상지에는 삼국시대 때부터 대규모 마을과 수많은 고분이 있었다.

 

시지동과 사월동 등에 산재한 고인돌은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시지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시지지역이 택지 개발지구로 선정되고 1992년부터 첫 발굴조사가 시작되면서 마침내 땅속에 묻혀 있던 청동기시대 이래의 마을 유적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지 유적은 수성구 시지동, 노변동, 매호동, 신매동, 욱수동 일대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선사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형성된 대규모 복합 유적이다. 이 유적은 1970년대에 존재가 확인되었으나 본격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92년부터다.

 

지금까지 50여 차례가 넘는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시대의 뗀석기부터 조선 시대의 도자기와 숟가락까지 약 4만 점이 넘는 다양한 문화재가 출토되었다. 그러나 시지 유적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화려한 껴묻거리[부장품(副葬品)]가 있는 지배계층의 대형 고분이나 대규모 건물터 같은 게 조사되지도 않았고, 명문 자료나 금공품이 많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피지배 계층 서민들의 삶의 자취

 

그러나 시지 유적은 왕실이나 귀족이 아닌 당시 사회의 대다수를 구성했던 서민들이 남긴 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오히려 더 흥미롭다. 지배계층이 아닌 피지배 계층의 자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느 전시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시지 지역의 55개 유적에서 출토된 문화재 1만여 점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았다. 전시는 크게 기획전시실Ⅰ과 Ⅱ로 나뉜다. 기획전시실Ⅰ은 유적에서 문화재를 시대별로 개관해 다루고 기획전시실Ⅱ는 삼국시대 토기 가마[요(窯)]와 생활유적, 고분을 소개하고 중요 유구별 출토 문화재의 특징을 보여주는 전시다.

▲ 2천 기가 넘는 고분이 만들어졌던 삼국시대 시지는 생산시설-취락-고분이 함께 어우러져 번성했다 .
▲ 대구 노변동 154 호 덧널무덤 [ 목곽묘 ( 木槨墓 )] 출토품
▲ 대구 욱수동 고분군 돌방무덤 [ 석실분 ( 石室墳 )] 출토품
▲ 암키와와 수키와 ( 경산 옥산동 유적 고려 시대 기와 가마 )

기획전시실Ⅰ에 전시된 대구에서 확인된 최초의 구석기인 여러면 석기(돌의 모든 면을 깨뜨려서 둥글게 만든 석기)는 뜻깊다. 가천동과 중산동의 원삼국시대 널무덤에서 출토된 각종 철기류, 노변동과 욱수동 등 시지지구 고분군의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다양한 토기와 철기 등도 선보인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기획전시실Ⅱ에서 전시된 시지 유적의 중심이 되는 삼국시대 토기 가마와 생활유적, 고분 등을 통하여 유추한 ‘고대마을 시지’다. 시지 유적에서는 옛 인간들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인 많은 유구(遺構)가 발굴되었다.

유구란 ‘인간의 활동으로 만들어진 움직일 수 없는 잔존물’, 즉 살아가는데 필요한 공간적 요소다. 시지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 근대까지 4천여 개의 중요한 유구가 조사되었다. 마을을 꾸리는 데 필요한 집, 건물, 우물, 도로 등과 밭, 토기와 기와를 만들었던 가마, 무덤 등 유구는 시지에서의 과거의 삶을 유추할 수 있게 해 준다.

 

시지에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로 추정한다.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시지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경산 옥산동과 옥곡동에서 대규모 청동기시대의 마을 유적이 확인된 것이다.

 

40기의 토기 기마, 시지의 삶과 사람들

 

청동기시대부터 시지에는 대규모 취락이 형성되었다. 사람들은 땅을 얕게 파서 기둥을 세워 움집을 지었는데 집안에는 겨울철 난방과 요리를 위한 화덕도 있었다. 죽은 사람을 위해 고인돌[지석묘(支石墓)]과 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을 만들었다.

▲ 우두머리의 표상인 돌칼 . 청동기시대 대표적 의례의 도구와 무기였다 .

돌널무덤 속에는 붉은간토기, 간돌 칼, 간돌 화살촉 등을 넣었다. 사람들은 나무를 베고 농사를 짓고, 사냥하기 위해 다양한 석기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2년 시지동 고인돌 부근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발굴되었다. 주변에서 무덤과 경작지 등 당시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유구도 확인되었다.

 

이 무렵에 벼농사가 이루어졌고 농경문화가 발달하여 생산물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잉여 생산물이 생겨나면서 빈부의 차이 나타났고 이는 곧 지배자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당시 지배자는 마을 내부나 마을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기능을 담당했는데 고인돌, 돌널무덤 안에서 출토되는 간돌검[마제(磨製)석검(石劍)]은 이들 지배자의 권위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다.

 

한편 대구 욱수동과 경산 옥산동에는 4세기 중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모두 40기가 넘는 토기 가마가 대규모로 운영되었다. 이는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토기 생산 유적이었다. 토기 가마는 당시 최고 지배계층에 의해 운영된 대규모 토기 전문 생산시설로 지역에 토기를 공급하였다.

 

5세기 중후반부터는 시지에서 철기도 제작하였다. 시지에 토기와 철기 장인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레 대규모 취락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욱수동과 노변동 등 시지 지역에는 2천 기가 넘는 고분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삼국시대의 시지는 생산시설-취락-고분이 함께 어우러져 번성했다. 그러나 6세기 중반 토기 가마의 운영이 중단되자 시지 취락도 그 기능이 위축되면서 점차 소멸되어 갔다.

 

그리고 천년도 뒤에 이 지역이 개발되면서 대규모 주거단지가 들어섰다. 도시의 팽창으로 인한 택지 개발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대규모 취락이 형성될 수 있었던 시지 지역의 입지 조건이 20세기에 새롭게 조명 받은 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수장고 보관형 방식으로 전시

▲ 이번 전시는 문화재를 최대한 많이 공개하기 위해 수장고 보관형 방식을 택하고 있다 .

이번 전시회는 시지에 살았던 선조들이 남긴 문화재를 최대한 많이 공개하기 위해 수장고 보관형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또 전시품 가운데 일부는 출토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하여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는 동시에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하였다.

 

전시실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유물과 유적 자료들은 둘러보면서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그래야 시지지역의 55개 유적에서 출토되어 바야흐로 수백 년에서 수천 년에 이르는 길고 깊은 잠에서 깨어난 문화재 1만여 점에 서린 선인들의 숨결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전시회는 기획전시실Ⅰ은 오는 8월 6일까지, 기획전시실Ⅱ는 오늘 4월 2일까지 운영된다. 5월 6일까지 매주 토요일에는 고고학자들의 전시 해설이 이어진다. 누리집에 가입하여 사전 예약해야만 강의를 들을 수 있다. 국립대구박물관 누리집 참조. 전화 문의는 053-768-6051.

 

*사족 : 박물관을 향하며 느꼈던 설렘이 궁금하신가. 전시 유물에 관해서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나는 오직 스스로 읽고 보는 데 그쳤지만, 거기 머물렀던 시간 동안 나는 매우 충만해 있었다. 한적한 전시실을 지키고 있던 중년의 직원에게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

 

2017. 4.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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