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1935년 5월 20일, 카프 해산
1935년 5월 20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강조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표방하며 활동해 오다가 일제의 탄압, 자체 내의 내분과 전향 등으로 휘청이던 사회주의 문학단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이 자진 해산했다.
이날, 서기장 임화(1908~1953)가 동대문경찰서 고등계에 카프 해산을 신고함으로써 1925년 8월 결성되었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카프의 활동은 1931년과 1934년에 이어진 일제의 1·2차 검거를 통한 극심한 탄압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이어진 일제의 탄압과 조직 내부의 갈등으로 인한 조직원들의 전향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마침내 해체에 이른 것이었다.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문학가들의 실천단체로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이 결성된 것은 1925년 8월이다. 이 단체는 ‘카프(KAPF)’로도 불리는데 이는 에스페란토 식 표기인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의 머리글자를 딴 약칭이다.
카프는 3·1운동(1919) 이후 일제의 이른바 ‘문화정치’ 아래서 러시아혁명(1917) 이후 조선에서 시작된 공산주의운동의 발흥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카프는 소련의 라프(RAPF)와 일본의 나프(NAPF)의 영향을 받아 프롤레타리아 계급 운동의 하나로 문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초 일본에서 신사상의 세례를 받은 유학생들인 팔봉 김기진(1903~1985)을 비롯한 박영희(1901~1950), 이상화(1901~1943) 등이 예술지상주의를 반대하는 ‘생활을 위한 예술’을 소박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아직 관념적이고 심정적인 감정의 토로에 지나지 않았다.
카프의 선행 조직으로서 신경향파 조직이 있었다. 신경향파(新傾向派)는 1920년대 초 백조파의 감상적 낭만주의, 창조파의 자연주의 등 이전의 문학 경향을 부정 혹은 발전시킨 사회주의 경향의 새로운 문학을 이르고 있었다.
신경향파의 대표 조직이 ‘염군사(焰群社)’와 ‘파스큘라(PASKYULA)’였다. 염군사는 1922년 9월 이적효·이호·김홍파·김두수·최승일·심훈·김영팔·송영 등이 조직한 최초의 프로문학 단체였다. 이 단체는 ‘해방 문화의 연구 및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문학에 국한하지 않은 광범한 문화 운동을 표방했지만 데, 사회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좌익 문학청년 집단이었다.
신경향파 문학, 카프 결성으로 계급문학으로 전환
파스큘라는 박영희·안석영·김형원·이익상·김기진·김복진·이상화·연학년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무산(無産)계급 문학운동 단체였다. ‘PASKYULA’란 이름은 구성원 이름의 두문자(頭文字)를 딴 것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을 배격하고, 인생을 위한 예술을 건설한다.”라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강령이었다.
1925년 8월 염군사와 파스큘라는 통일된 단일조직으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으로 통합되었다. 염군사와 파스큘라가 합동한 카프의 구성원은 박영희·김기진·이호·김영팔·박용대·이적효·이상화·김온·김복진·안석영·송영·최승일·심훈·조명희·이기영·박팔양·한설야·김양 등이었다.
카프의 결성과 함께 신경향파 문학은 뚜렷한 목적의식에 기초를 둔 계급문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카프 결성 뒤에도 두드러진 창작 활동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은 대신 주로 평론을 통한 예술비평이 주조였다. 이 시기에 박영희·김기진·최서해 등이 단편소설을 발표했으며, 준 기관지 <문예운동(文藝運動)>(1926)을 발간했다.
1926년 말부터 카프 조직 내부에서 계급성을 강조하는 박영희와 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김기진 사이에서 ‘내용·형식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 논쟁은 결국 김기진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는 것으로 끝났고 이를 계기로 카프의 제1차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
1929년께부터는 신진이론가들이 계급 문예이론으로 카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임화·김남천(1911~1953) 등 소장파들은 당시 사회운동의 조류에 호응하여 ‘예술운동의 볼셰비키 화’(문학과 예술은 지도적 혁명가들이 이끄는 급진적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를 주장하고, ‘소부르주아적 편향을 척결할’ 목적으로 카프의 재조직을 단행하였다. 이것이 1930년 카프의 제2차 방향 전환이다.
내분, 노선 대립, 검거 등으로 약화
방향 전환 이후 문학 대중화론에 대한 내부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는 프로문학 창작이 위축되고 발표한 작품조차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할뿐더러 검열의 문제가 심각해지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비평가 김기진이 제기한 것이었다.[관련 글 : 김기진, 황민 문학으로 투항한 계급 문학의 전사]
그의 대중화론은 카프의 당위론적, 추상적 문예운동에서 한 걸음 나아간 것으로 평가되었지만, 문예를 정치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조직 내부의 반론에 부딪혀 봉쇄되었고 이 이론을 계기로 카프의 주도권은 카프 동경지부를 이끄는 소장파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용 문제도 적극적으로 거론되면서 리얼리즘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고, 작가들이 창작을 통하여 사회적 실천을 하려는 노력이 활발하여졌다. 이는 최서해의 ‘먼동이 틀 때’, 한설야의 ‘과도기(過渡期)’, 이기영의 ‘고향(故鄕)’(1933), ‘서화(鼠火)’, ‘홍수(洪水)’ 등 일정한 수준에 이른 작품들이 산출된 배경이 되었다.
조직 내부의 논쟁에 이어 임화 등이 만든 영화 <지하촌> 사건으로 1931년 카프 구성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때 약 넉 달 동안 안막, 임화, 김남천, 박영희, 김기진, 이기영 등 17명의 임원이 구속되고, 30여 명의 인사가 검거되었다.
박영희는 1931년 6월,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가 이듬해 봄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났다. 카프의 볼셰비키화와 계속되는 내부의 노선 대립에 회의를 느낀 그는 1933년 12월 카프를 탈퇴했다. 그가 <동아일보>에 ‘최근 문예이론의 신 전개와 그 경향’이라는 사설을 기고하여 공개적으로 카프 탈퇴와 전향을 선언한 것은 이듬해인 1934년 1월이다.
“잃은 것은 예술,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
“잃은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다.”라고 하는 유명한 발언이 나온 게 이때였다. 카프 탈퇴 이후, 그는 순수 문학과 예술주의로 방향을 전환했고 일제 강점기 말기 중일 전쟁 발발과 함께 사상전향을 발표하고 친일 문인으로 변절했다. [관련 글 : 박영희, ‘문학도 이데올로기도 잃고’ 잊힌 문인]
1934년 6월에는 ‘신건설사(新建設社) 사건’이 일어나 박영희, 김기진, 이기영 등의 간부와 맹원을 체포하고 1년에서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지하촌 사건에 이은 2차 검거였다. 신건설사라는 연극단이 지방 공연에서 뿌린 선전 전단이 발각된 것이었다.
이미 전향 선언을 한 박영희에 이어 재판 과정에서 많은 맹원이 전향 의사를 밝히고, 더욱이 일본 나프(NAPF)의 해체 소식까지 들려오면서 카프는 조직을 유지해 갈 동력을 잃고 있었다. 카프 조직이 해체를 두고 치열한 내부토론이 전개되었다.
조직 내부에서는 해체에 찬성하는 ‘해소파’와 이에 반대하는 ‘비해소파’의 대립이 첨예하게 드러났으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임화 등에 의하여 결국은 해체가 결정되었다. 서기장 임화가 동대문서에 해산을 신고하게 된 것은 이런 과정의 결과였다.
1925년 결성 이래 부침을 거듭했던 카프는 조직의 노선 대립에 따른 내분과 전향 등으로 마침내 그 역사를 접었다. 경직되고 관념적인 창작론으로 비판받기도 했지만, 카프가 추구한 문학은 오늘날에도 ‘민중문학’이라 부르는 변혁 지향적 문학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1930년대 말, 대부분 전향하거나 침묵으로 자신들의 이념을 고수하게 된 프로문학은 기나긴 잠복기에 들어갔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면서 프로문학은 카프의 주요 성원이었던 임화, 이태준, 김기림, 김남천, 이원조 등이 조직한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조선문학가동맹 등의 단체로 이어졌다.
2018. 5. 19. 낮달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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