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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부음, 궂긴 소식들41

박경리와 홍성원, 두 작가의 부음에 부쳐 박경리 1926~2008. 5. 1. 두 명의 작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났다. 지난 1일엔 홍성원(71)이, 오늘(5일) 오후에는 박경리(82) 선생이 각각 작가로서, 자연인으로서 당신들의 삶을 마감했다. 물론 그것은 가족이나 친지의 부음처럼 애잔한 슬픔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박경리 선생이 위중하다는 것을 이미 며칠 전에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던 까닭에 나는 ‘그랬구나……’ 하는 정도로 선생의 부음을 받아들였다. 향년 여든둘이라는 걸 확인하면서 나는 잠깐 아쉬움을 느꼈을 뿐이다. 82세라면 요즘 같으면 얼마든지 건강해도 될 연세이니 말이다. 선생의 부음은 신문과 방송에서 실시간으로 보도하면서 저마다 선생의 삶과 문학세계를 다투어 기리고 있는 듯하다. 나는 잠깐 그이가 살아낸 80여 년의 삶과 .. 2020. 5. 5.
지아비와 함께 편히 쉬시라 김지원 1959~2012.4.26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떼어낼 방법은 없다. ‘낙양성 십 리 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을 굳이 불러오지 않더라도 인간의 삶은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고매한 사상가도, 억만금을 가진 부자도, 대중의 사랑을 먹고살던 연예인도,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숱한 선남선녀들도 죽음의 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슬프다. 그러나 우리는 살 만큼 산 ‘자연사’는 비교적 담담히 받아들인다. 호상(好喪)이란 이름이 따르는 부음이 그것이다. 그 죽음이 더욱더 애틋한 것은 아이들의 죽음이고, 좀 이르게 찾아온 죽음이다. 그것은 ‘자연사’와 달리 쉬 받아들일 수 없는 안타까운 죽음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목요일 오후에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4년 전에 우리가 저세상으로 배.. 2020. 4. 26.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를 보내며 1927년 3월 6일 ~ 2014년 4월 17일어제 오후에 나는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8~2014)의 부음을 전해 들었다. 그는 지난 10여 년간 림프암으로 투병해 왔고, 2012년부터는 치매 증상으로 집필을 중단한 바 있었다. 마르케스는 멕시코시티의 자택에서 아내와 두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87년의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살아생전에 작가로선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 노벨상을 받았고, 우리 나이로 치면 여든여덟, 미수(米壽)를 누렸다. 우리 식으로 보면 호상(好喪) 중의 호상이니 의례적 수사는 생략하자. 나는 그의 대표작 을 만났던 스무 살 무렵을 아련하게 떠올렸다. 번역본으로는 민음사에서 펴낸 (조구호 옮김, 아래 )이 널리 알려졌지만, 내가 처음 만난 은 김병호가 옮기고 육문사에.. 2020. 4. 18.
<산문에 기대어>의 송수권 시인 떠나다 송수권 시인(1940 ~ 2016. 4. 4.) 원로 서정시인 송수권 선생이 돌아가셨다. 시인은 지난 4일 낮 12시 40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940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일흔일곱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면서 나는 해마다 선생의 대표작 ‘산문에 기대어’를 가르쳤지만, 선생이 나보다 16년이나 연상이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갓 스물에 만났던 시인 선생을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나는 1975년, 집에서 구독하고 있던 월간 에서 그의 대표작 ‘산문(山門)에 기대어’와 함께 그를 처음 만났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갓 스무 살의 문학도였다. 한 면 전체에 실린 신인상 수상 시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의 나이를 가늠해 보았을까, 말았을까.그때 나는 ‘산문’이란 낱말.. 2020. 4. 5.
「성탄제」의 김종길 시인 타계 1926 ~2017년 4월 1일 지난 1일, 원로시인이자 영문학자인 고려대 명예교수 김종길(1926~2017) 선생이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달에 부인을 잃고 힘들어하다가 그예 뒤를 따랐다고 한다. 향년 91세. 내외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나시어 유족들의 슬픔은 크겠지만 두 분은 인연이 남달랐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생의 본명은 김치규, 경북 안동 출신이다. 1947년 신춘문예에 시 ‘문’으로 입선하며 등단했다. 그는 “서양 이미지즘 시학을 받아들이면서도 기교에 치우치지 않고 고전적 품격을 지닌 시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은 시인이다. 나는 1980년대 초임 시절에 제4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그의 대표작 ‘성탄제’를 여고생들에게 가르쳤다. 갓 대학을 졸업하고.. 2020. 4. 1.
‘배뱅이굿’의 이은관 명인, 타계 1917~2014년 3월 12일 새벽에 자리 속에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다가 이은관(李殷官) 옹의 부음을 확인했다. 아, 그이……, 향년 97세라고 했다. 이태만 더 살았더라면 백수(白壽)인데……. 나는 아내를 툭 건드렸다. “여보, 이은관 옹이 세상을 떠났다는구먼. 배뱅이굿의 이은관.” “배뱅이굿? 아, 왔구나, 왔어. 그 영감님?” “그래. 아흔일곱 살이래. 장수했네.” “아, 사는 김에 백수하시지……. 아깝네.” 내가 이은관의 ‘배뱅이굿’을 처음 들은 것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다. 부모님과 한방에서 잤는데 새벽에 잠에서 깬 어른들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그이의 ‘배뱅이굿’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라디오는 구경하지 못하고 ‘앰프’라고 하여 삐삐선으로 보내주던 유선방송 시절의 이.. 2020. 3. 12.
이성부 시인, ‘벼’와 ‘우리들의 양식’ 남기고 떠나다 시인 이성부(1942 ~ 2012. 2. 28.) 선생‘벼’의 시인 이성부(1942~2012) 선생이 돌아가셨다. 시인의 죽음 따위는 세상이 별로 기리지 않는가, 지난달 29일에 에 난 선생의 부음 기사 외에 선생을 다룬 기사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는 모모한 시인들처럼 ‘유명’하지도 않고 모모한 시인처럼 감옥을 다녀온 ‘투사’도 아니어서일까. 나는 고교 시절 내내 이성부 시인의 이름을 바라보면서도 그의 시를 읽지 못했다. 우리 집에는 민음사에서 펴낸 ‘오늘의 시인 총서’가 몇 권 있었고, 그 책날개에 그의 시집 이 소개되어 있었다. 정작 내가 이성부의 시를 만난 것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면서다. 고등학교 에서 그의 시 ‘벼’는 6, 70년대의 참여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다루어진다. ‘.. 2020. 2. 27.
교사들의 스승, 김창환 선생을 보내며 김창환(1949~2013) 김창환 선생이 돌아가셨다. 토요일(2월 23일) 아침에 선배 김 선생의 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잔뜩 긴장했다. 설을 못 넘기시는 게 아닌가 할 만큼 병환이 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선배는 그래 돌아가셨어,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웃으로 지난해 여름, 병의 발견에서부터 투병 과정까지 지켜본 이로서의 허탈감 같은 것이었을까. 나는 몇몇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로 선생의 부음을 전했다. 나머지는 조직에서 알아서 하리라. 그리고 아내에게 선생이 세상을 버리셨다고 말했다. 결국, 가신 거유. 아직 예순다섯인데, 조금 더 사시지 않고선……. 사모님도 그리 가시더니……. 아내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그렇다. 사모님께서 세상을 뜨신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 2020. 2. 23.
원로 배우 김지영 떠나다 배우 김지영(1937~2017.2.19.) 배우 김지영(1937~2017) 씨가 19일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연기자로 살아 한국영상자료원 기록만으로도 출연 영화가 200편이지만 늘 ‘조연’으로만 기억되는 배우, 팔도 사투리 연기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선보인 배우, 김수용 감독과 임권택 감독의 말투를 가장 잘 흉내 냈다는 배우, 만년에야 그 진가를 조금씩 알리기 시작한 배우 김지영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200편의 영화, 그러나 조연으로만 기억되는 배우 유족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지난 2년간 폐암을 앓으면서 연기를 계속했지만 결국 급성 폐렴으로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1955년, 김승호의 극단 대중극회의 무대에서 시작한 연기자의 삶이 무려 62년이다. 함경도 청진에서 태어나 인천에 자란.. 2020. 2. 19.
‘독고탁’의 이상무 화백을 배웅하며 2016년 1월 3일 간밤 자리에 들어서 이상무 화백(1946~2016)의 부음을 읽었다. 의 부음 기사는 그를 ‘독고탁의 아버지’로 부르고 있었다. 그의 이력을 보고서야 본명이 박노철인 그가 인근 김천 출신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향년 70세. [관련 기사 ] 나는 아내와 그와 그의 만화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1970년대 학생 잡지에 연재한 만화 의 작가로만 그를 알았던 내가 장편 야구 만화 의 작가로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전역한 이듬해였다. 오락기 제조업을 하던 형이 누구에겐가 위탁해 운영하던 만홧가게를 접으면서 수천 권의 만화책을 시골집에 보내왔다. 작은누나가 누군가의 가게를 인수했다면서 수천 권의 만화책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온 초등학교 5학년 때에 이어 우리 집은 두 번째로 만화책으로 가득.. 2020. 1. 27.
고 박병준 선생을 추억함 교육 동지 박병준, 그는 너무 빨리 떠났다 죽음이 삶의 대립 항인 이상 그것은 언제나 낯설어야 마땅하다. 2·30대 팔팔했던 시절에는 ‘죽음’은 늘 ‘강 건너 불’ 같은 거였다. 때때로 만나는 지인의 부음도 지극한 ‘우연’일 뿐, 그것은 일상과는 무관한 특별한 무엇에 그쳤다. 그러나 40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죽음’을 비로소 일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 ‘돌연사’가 주변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지인들의 부음을 ‘심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우울한 50대에 접어든다. 안부를 묻는 게 ‘건강’을 묻는 인사로 대치되고, 오랜만의 만남에서 나누는 것은 주변의 죽음이다. 아무개는 혈압으로 아무개는 심장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주고받으며 사람들은 아직 ‘괜찮은 내 .. 2020. 1. 21.
‘시대의 스승’ 신영복 선생을 보내며 1941 ~ 2016년 1월 15일 쇠귀 신영복 선생이 돌아가셨다. 나는 어젯밤 늦게 인터넷 뉴스를 통해서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고 난 직후였던 듯하다. 아, 신영복 선생이 돌아가셨어.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아내가 연세가 어떻게 되우, 하고 물었었다. 일흔다섯인데……, 하고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88년, 당시 창간된 의 지면에서였다. 선생이 옥중에서 가족과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글이었는데 거기서 나는 꽤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의 글은 그때까지 내가 읽은 어떤 글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기품과 향훈을 그득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글에는 지혜(이성)와 감성이 가장 완벽하고 조화롭게 만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드넓은 인식의 지평은.. 2020. 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