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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탁’의 이상무 화백을 배웅하며

by 낮달2018 2020.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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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3일

 

▲ <아홉 개의 빨간 모자>의 만화가 고 이상무 화백(1946~2016)

간밤 자리에 들어서 이상무 화백(1946~2016)의 부음을 읽었다. <허핑턴포스트>의 부음 기사는 그를 ‘독고탁의 아버지’로 부르고 있었다. 그의 이력을 보고서야 본명이 박노철인 그가 인근 김천 출신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향년 70세. [관련 기사  <‘독고탁’의 아버지 이상무 작가 별세>]

 

나는 아내와 그와 그의 만화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1970년대 학생 잡지에 연재한 만화 <노미호와 주리혜>의 작가로만 그를 알았던 내가 장편 야구 만화 <아홉 개의 빨간 모자>의 작가로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전역한 이듬해였다.

 

▲ 독고탁은 야구를 통해 패배주의와 절망을 넘어 분노를 배우게 된다 .
▲ 이상무의 만화들. 특히 그는 스포츠 만화 붐을 이끌었다.

오락기 제조업을 하던 형이 누구에겐가 위탁해 운영하던 만홧가게를 접으면서 수천 권의 만화책을 시골집에 보내왔다. 작은누나가 누군가의 가게를 인수했다면서 수천 권의 만화책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온 초등학교 5학년 때에 이어 우리 집은 두 번째로 만화책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반항아 캐릭터의 계보’, 훈이→독고탁→오혜성→이강토

 

세를 주었다가 비워둔 신작로에 붙은 가겟방에 그걸 부리자, 수업을 마친 초등학교 아이들이 드문드문 들면서 졸지에 우리 집 문간채는 만화방으로 변신했다. 스물여섯의 복학생은 거기서 <아홉 개의 빨간 모자>를 만난 것이다.

 

▲  반항아 캐릭터들 .  왼쪽부터 이강토 ,  독고탁 ,  설까치 ,  훈이 .

그 작품을 읽고 나서 나는 수천 권의 책 가운데에서 그의 만화만 골라 읽으며 한여름을 보냈다. 고아원에서 생활하는 반항아 독고탁이 한 교사의 지도로 야구를 통해 패배주의와 절망을 넘어 분노를 배우게 되는 과정을 극적으로 다룬 만화 <아홉 개의 빨간 모자>는 중독성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원장의 아들이면서 지역 최고의 야구선수인 준과 독고탁의 삶의 목표가 되는 준의 여동생 숙, 그리고 우연히 고아원의 야구단에 합류하는 소년 봉구. 그들이 연출해 내는 극적 대립과 승부가 어둡고 음울하게 그려지는 이야기는 비극적 파국으로 마감된다.

 

봉구와 대결에서 승리한 독고탁이 팔을 뻗어 숙의 방 유리창을 깨고 피 흐르는 손에 쥔 야구공을 건네주는 장면은 오래 잊히지 않는다. 그의 만화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삶과 운명의 결…, 나는 이상무의 만화가 보여주는 절망과 분노에 절대 공감한 듯하다.

 

독고탁은 이상무 만화의 ‘페르소나(persona)’인데 <아홉 개의 빨간 모자>에선 정제되지 않은 모습이지만 이후 작품들에선 다양한 성격으로 변주된다. 독고탁은 1960년대에 박기정이 창조한 ‘훈이’를 이은 70년대의 ‘반항의 캐릭터’였다. 이 캐릭터는 80~90년대 오혜성(이현세), 이강토(허영만)로 이어지며 발전했다. [관련 글 : 박기정의 만화 <도전자>, 그 서사의 미학]

 

이상무는 1963년 고교 재학시절, 대구의 <영남일보>의 어린이 지면에 주 1회 네 칸 만화를 연재하면서 만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상경해 박기정, 박기준 작가의 문하에서 배웠다. 1966년 잡지 <여학생>에 박기준이 ‘이상무’라는 이름으로 연재하던 <노미호와 주리혜>를 이어받으며 데뷔했다.

 

박기정·박기준의 제자, 70년대 스포츠 만화 붐 선도

 

이상무의 독고탁이 박기정의 훈이를 잇는 반항아 캐릭터가 된 것이 전혀 우연이 아니었던 이유가 있었다. <도전자>와 <레슬러>의 작가 박기정은 그의 동생이었던 박기준과 함께 이상무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이상무는 1976년 야구 만화 <우정의 마운드>를 시작으로 권투 선수가 등장하는 <비둘기 합창> 축구 만화 <울지 않는 소년> 등을 발표하며 당대의 스포츠 만화 붐을 이끌기도 했다. 그의 고유한 캐릭터 ‘독고탁’은 <우정의 마운드>, <아홉 개의 빨간 모자>, <달려라 꼴찌> 등 조금씩 다르지만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인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만화의 성공으로 1980년대에는 <내 이름은 독고탁>, <다시 찾은 마운드> 등은 TV 애니메이션, 영화 등으로 만들어져 인기를 누렸다. 1990년부터는 스포츠신문에서 골프 레슨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골프 전문 만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상무 화백은 15대, 16대 한국만화가협회 협회장을 지냈으며 1998년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 공로상, 200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딸이 있으며 장례식장은 서울대병원 2호실, 발인 5일 오전 11시다.

 

독고탁에 심취했으면서도 정작 나는 작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가 지역 출신이었다는 것과 나보다 10년 연상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조금 더 살 수도 있을 텐데……, 아쉬운 마음으로 ‘독고탁의 아버지’, 이상무 화백을 배웅한다.

 

2016. 1. 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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