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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부음, 궂긴 소식들

박경리와 홍성원, 두 작가의 부음에 부쳐

by 낮달2018 2020.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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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서가에 꽂힌 <토지>.  모두 네 군데 출판사에서 펴낸 책들이다 .

박경리 1926~2008. 5. 1.

 

두 명의 작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났다. 지난 1일엔 홍성원(71)이, 오늘(5일) 오후에는 박경리(82) 선생이 각각 작가로서, 자연인으로서 당신들의 삶을 마감했다. 물론 그것은 가족이나 친지의 부음처럼 애잔한 슬픔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 작가 박경리(1926 ∼ 2008)

박경리 선생이 위중하다는 것을 이미 며칠 전에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던 까닭에 나는 ‘그랬구나……’ 하는 정도로 선생의 부음을 받아들였다. 향년 여든둘이라는 걸 확인하면서 나는 잠깐 아쉬움을 느꼈을 뿐이다. 82세라면 요즘 같으면 얼마든지 건강해도 될 연세이니 말이다.

 

선생의 부음은 신문과 방송에서 실시간으로 보도하면서 저마다 선생의 삶과 문학세계를 다투어 기리고 있는 듯하다. 나는 잠깐 그이가 살아낸 80여 년의 삶과 그 행간마다 고여 있을 실존적 고독과 상처를 생각했고 그이가 언제까지 담배를 피웠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물론 나는 작가 박경리를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선생과 관련된 가족 사항, 언론을 통해 공개된 근황 따위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그건 이런 형식이다. …… 그이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여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결혼해 딸을 낳았고 한국전쟁 때 남편과 사별했다. 유일한 혈육은 시인 김지하와 혼인했고, 박정희 독재와 싸웠던 사위는 70년대 내내 감옥에 갇혀 있었다…….

 

물론 나는 한 번도 그이를 만난 적이 없다. 숱한 무명의 독자 중 하나일 뿐이니 그이를 만나기 위해선 내가 그이를 찾아야만 한다. 그이는 내가 사는 안동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가면 1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원주에서 살았고 원주를 지나칠 때마다 나는 그이와 토지문화관을 생각하곤 했지만 한 번도 그곳을 찾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이가 거둔 문학적 성취는 20세기 이래 한국 현대문학이 이룩한 역사적 성취의 맨 앞자리에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선생의 문학은 대하소설 <토지> 한편만으로도 우리 문학의 모든 성취의 총합과 견줄 수 있다. 25년 동안, 원고지 4만 장에 문학적으로 재구성한 우리 근대사는 그것 자체로 이미 문학적 기념비다.

 

내가 그이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이었던 것 같다. 보라색 장정판 신구문화사 <한국문학전집>을 나는 거의 날 것(!)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읽은 선생의 단편이 ‘시계’나 ‘불신시대’ 따위였던 듯하다. 그러나 그이의 초기 단편들을 나는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

 

내가 <토지>를 만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당시 형이 받고 있었던 문예지 <문학사상>을 통해서였다. 습관적으로 읽을거리에 굶주려 있던 때여서 허겁지겁 읽기 시작한 <토지>에서 나는 서희와 길상을 만났고, 그들 삶의 자취가 이 땅의 근대사였다는 걸 막연하게나마 깨달았던 듯하다.

 

내 서가에 꽂힌 선생의 <토지>는 모두 네 군데 출판사에서 펴낸 것들이다. 1부에서 3부까지는 지식산업사에서 부별로 두 권씩 모두 6권인데 세로쓰기 본이다. 4부는 삼성출판사에서 편 하드커버본. 그리고 5부는 솔에서 펴낸 4권이다. 나머지는 지식산업사에서 낸 2부 첫째 권을 잃어버려서 새로 구매한 나남출판사 본 1·2부 8권이다.

 

나는 <토지>를 대여섯 번쯤 읽었다.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되풀이해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10년 전에 쓴 ‘문학 교사의 책읽기’라는 글에서 나는 그렇게 썼다.

 

“그러나, 여전히 내 독서의 본령은 문학이어서, 이번 겨울에도 나는 딸애가 읽고 있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 5부를 한 번 더 읽었고, 서사 문학이 다다를 수 있는 감동의 깊이를 다시금 확인했다.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살아간 이 땅의 사람들의 삶의 흔적들을 통해 내가 이해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쉼 없는 모색과 투쟁이었고, 한국인의 삵의 원형을 바라보는 이 위대한 작가의 따뜻하면서도 냉정한 시선이었다. 고교 시절, 한 문학 잡지에 연재되던 이 작품을 처음 만난 이래, 통틀어 네 번쯤 완독했는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새로운 이해와 깨달음을 새록새록 되새기곤 한다.”

 

선생의 부음을 듣고 나는 서가에 꽂힌 대하소설 <토지>를 꺼내 뒤적였다. 새로 구매한 나남출판사 본 <토지> 제1부 1권의 ‘2002년 판 <토지>를 내며’에서 작가는 그렇게 쓰고 있다.

 

어디 지리산뿐일까마는 산짐승들이 숨어서 쉬어볼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식물, 떠나버린 생명들, 바위를 타고 흐르던 생명수는 썩어가고 있다. 도시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 백팔번뇌, 끝이 없구나. 세사(世事) 한 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

 

그예 작가는 이승에서의 삶과 인연의 끈을 놓았다. 이제 선생은 그가 재구(再構)한 근대사의 슬픔과 고통의 역사, 거기 당신이 낳고 숨결을 불어 넣은 인물들의 삶에서 벗어나 ‘훨훨 껍데기를 벗어던지며 떠나시리라.’

 

 

2009년 통영, 박경리 기행

지난 5월 5일은 작가 박경리 선생의 1주기였다. 따로 문상하지 않았던 나는 원주를 찾아 그이의 흔적을 잠깐 더듬었다. 원주 시내에 있는 ‘토지문학공원’에서, 그리고 그이가 살던 슬래브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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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주기, 작가 박경리를 다시 생각한다

5월 5일은 작가 박경리 선생의 11주기다. 선생은 강원도 원주에서 살다가 2008년 5월 5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마음으로 꽃 한 송이 바치며 선생을 배웅했다. 일찍이 고교 시절에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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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원 1937 ∼ 2008. 5. 5. 

 

▲ 홍성원(1937∼2008)

작가 홍성원의 부음을 들었을 때 나는 옅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대하소설 <남과 북>(전 6권)으로 내 서가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이다. 나는 일찌감치 그가 ‘소설 공장’이라 불릴 만큼 다작의 작가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 서가에 그의 작품은 <남과 북>이 다인 것이다.

 

내가 읽은 그의 첫 작품이 <남과 북>이었는지 <D데이의 병촌(兵村)>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남과 북>은 우리 집에서 구독하고 있던 월간지 <세대>에 <6·25>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작품이었다. 그가 소설에서 그리고 있던 한국전쟁은 갓 20대에 접어든 청년을 매료시켰던 듯하다.

 

“한국적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개척자’라 불릴 정도로 건조하고 긴박한 문체로 남성적 세계를 주로 그린 작가”(김원일-한겨레 기사에서 재인용, 이하 같음)라는 평가에 걸맞게 그가 그리는 전쟁의 포연 속에 ‘인간’임을 증명하고자 싸웠던 숱한 주인공들의 삶은 그것 자체로 지독히 ‘낭만적’이었던 것 같다.

 

“<남과 북>은 사실(史實)의 기록을 픽션화시키고 픽션을 사실화시키는 탁월한 능력으로 6·25를 거시적으로 포착하면서 개개인, 개개 집단의 수난과 변모를 전시한 것”(김병익)이라는 평가대로 이 대하소설은 작가의 스토리텔러 재능을 유감없이 내보인 작품이다. 작가는 그렇게 말한다.

 

그 엄청난 규모와 집약된 힘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생산하는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다. 적도 살고 나도 사는 일이란 전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은 인간의 생명을 포함하여 인간들에게 온갖 희생을 최대한 강요한다. 가장 지혜로운 인간들 간의 싸움이기 때문에 전쟁은 또 가장 비열하고 흉포하고 잔인하다. 말하자면 전쟁은 그 규모나 파괴력에 있어 인간이 연출할 수 있는 최고 최대의 조직적인 폭력인 것이다.

     - <남과 북> ‘작가의 말’ 중에서

 

동아일보의 장편 공모 당선작 <D데이의 병촌(兵村)>을 읽은 것은 대구 시립도서관에서였다. 그날은 전기 대학입시일이었는데, 나는 집에는 한 전기 대학에 응시한다면서 정작 그날은 시립도서관에서 소설을 읽으며 보냈다. 불합격할 게 뻔한 입시에 매달리는 바보짓 대신 나는 독서를 선택한 것이었다.

 

하드보일드에다 매우 속도감 있는 문체, 현역 군인의 사랑을 다룬 예의 소설에다 나는 코를 박았고 아마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전편을 읽어 치웠던 것 같다. 이어서 내가 만난 그의 작품은 구한말부터 3·1운동까지 한국 근대사를 조명한 <먼동>이었다. 역시 어느 신문에 연재된 작품인데, <먼동>을 나는 끝까지 읽지 못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기 때문에 평생 직장 한번 안 가져 본 채 소설로만 생계를 해결한 한국 최초의 전업작가”(김원일)라거나 “구한말부터 현대까지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탄탄하고 뛰어난 서사로 그려냈다”(황현산)는 평가를 의례적인 상찬으로 폄하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거두절미한 거친 평가’라 하더라도 그를 ‘거대 서사의 상상력’(박혜경)으로 이르는 데 과부족이 없다. 한 작가가 고통스러운 창작으로 일관한 일생은 ‘위대하다’. ‘위대하다’는 평가는 반드시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객관적 상찬이 아니어도 좋으리라. 향년 71세. 박경리 선생에 비하면 홍성원 선생은 11년이나 빠르게 삶을 마감한 셈이다. 조만간 창비에서 간행한 <20세기 한국소설> 홍성원 편을 사서 읽어야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청소년 드라마 <반올림>을 쓴 홍 자매, 홍진아·홍자람씨가 고인의 딸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부전여전, 서사에 대한 재능을 속일 수는 없는가 보다.

 

사람들이 이내 세상을 떠난 두 작가를 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작품은 오래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유전되면서 한 시대를 살아갔던 인간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한 시대와 사회를 성찰하게 될 것이다. 삶과 사회에 대한 기억과 성찰에 바친, 위대한 작가들의 영면을 빈다.

 

 

2008. 5.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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