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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의 비석……, ‘국가유산’의 의미를 묻는다

by 낮달2018 2024.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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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부, 친일 부역 국군 장성 관련 비석 등 보훈 상징물을 ‘국가유산’으로 지정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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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세워진 백선엽 동상. 저 아래엔 생뚱맞게 6.25전쟁 당시의 한미 대통령 이승만과 트루먼의 동상도 있다.

장관으로 ‘전문성’과 무관한 경영학자를 임명하며 논란이 되더니, 국가보훈부는 윤 정부와 코드를 맞추느라 여러 가지로 바쁘다. 대통령이 뉴라이트 인사를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한 데 반발하여 독자적인 기념식을 열고 정부를 강하게 비판한 광복회 예산을 삭감하는 등 논란을 일으키더니 최근에 또 한 건 한 모양새다.

 

뜬금없는 보훈 상징물의 국가유산 지정 논의, 보훈부는 바쁘다

 

보훈부는 지난달부터 역사적 가치가 높은 50년 이상의 보훈 상징물을 국가유산으로 지정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검토 작업에 들어갔다는데, 그 대상이 영 미심쩍기 짝이 없다. 이 보훈 상징물은 모두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보훈부가 의원실에 제출한 ‘현황 목록’에는 △백선엽 장군 호국구민비(경북 칠곡) △백선엽 장군 전적비(경북 칠곡) △유재흥 장군 제승 기념지(경북 경산) △김백일 장군 동상(전남 장성)이 검토 대상으로 올라가 있다. [관련 기사 : 이승만 논란 아직인데보훈부, ‘친일백선엽 비석 국가유산지정 검토]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부터 백선엽 등 친일, 독재 등 역사적 논란이 있는 인물을 재평가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23년 1월에는 경북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백선엽 동상 건립을 지원한 바 있고, 지난해 7월에는 백선엽의 국립현충원 안장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구를 삭제하기도 한 것 등이 그것이다.[관련 글 : 왜 백선엽과 한미 대통령은 6·25 격전지 다부동에서 다시 만났나]

▲ 백선엽 장군 호국구민비. 1951년 칠곡주민들이 세웠다.
▲ 경북 칠곡군 동명면 동명초등학교 교정에 세운 백선엽 장군 전적비(1973). ⓒ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백선엽은 항일 무장세력을 토벌한 간도특설대 복무 이력 등으로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 인명사전>이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한 인물이다. 그는 한국전쟁 초기 전세를 뒤집은 ‘낙동강 다부동 전투(1950)’를 비롯하여 ‘평양전투(1950)’와 ‘중공군 춘계공세(1951) 저지’ 등 여러 차례 승전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두 차례나 받았던 백선엽을 현충원에 안장하는 문제로 논란이 있었다.

 

나는 2020년 6월, 이 논란에 대해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여 세운 비시 정부(Vichy France)의 수반으로 나치에 협력하여 결국 ‘국가반역죄’와 ‘간첩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페탱 원수를 비교한 글을 썼다. 두 사람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것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돌아보려 한 것이다.

 

프랑스의 앙리 필리프 페탱(Henri Philippe Pétain, 1856~1951) 원수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육군을 패퇴시킨 베르됭(Verdun)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프랑스의 국부’로 칭송받았지만, 나치 독일에 협력한 죄로 기소되었다. 최고재판소는 페탱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드골이 사형 결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지만, 결국 그는 대서양 되섬의 감옥에 이송되어 5년 8개월간 복역하다가 1951년에 옥사했다. [관련 글 : 백선엽과 필리프 페탱, ‘구국반역사이]

▲ 경북 경산 하양초등학교의 세운 유재흥장군 제승기념지 비. 1950년 7월 다부동·영천 전투를 승리로 이끈 걸 기렸다. ⓒ 현충시설정보서비스

그러나 논란은 논란으로 그쳤고 그해 7월 사망한 백선엽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8월, 경북 칠곡경북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에는 백선엽의 동상과 함께 이승만·트루먼의 동상까지 세워졌다. 백선엽의 국립현충원 안장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구를 삭제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관련 글 : 왜 백선엽과 한미 대통령은 6·25 격전지 다부동에서 다시 만났나]

 

백선엽과 김백일은 간도특설대 출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되고 <친일 인명사전>에도 올랐다

 

국가유산으로 검토되는 대상은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세워진 백선엽의 ‘호국구민비’(1951)와 경북 칠곡 동명초등학교의 ‘백선엽 전적비’(1973), 경북 경산의 ‘유재흥 장군 제승 기념지비’(1956), 전남 장성 보병학교의 김백일 장군 동상(1955) 등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친일 인명사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된 인물이다.

 

백선엽과 김백일은 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 만주군 장교로 임관하여 만주에서 항일 무장세력 ‘소탕’을 목표로 일본 관동군 간도 특무기관장 오코시 노부오(小越信雄) 중좌의 통제 아래 창설된 간도특설대에 배속되어 활동한 자들이다. [관련 글 : 독립군 토벌부대 출신 군인은 어떻게 창군 주역이 됐나]

 

김백일(1917~1951)은 만주군 상위로 1938년 간도특설대 창설 요원으로 활동했는데, 일본 패망 뒤, 귀국하면서 이름을 ‘백일’로 바꾸어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육군 소장 재직 중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전쟁 중인 1951년 3월 강원도 대관령 인근의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전쟁 중 흥남 철수 작전 당시에 미군 민사부 고문으로 통역을 맡고 있던 현봉학과 함께 피란민들을 수송선에 수용하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김백일은 미군이 피란민을 태우지 않으면 한국군 제1군단도 수송선에 타지 않고 피란민을 엄호하며 육로로 퇴각하겠다고 경고함으로써 피난민들이 수송선을 탈 수 있었다. 이러한 공적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김백일의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 보병학교에 세운 김백일 동상에 있는 헌시.

이번 대상이 된 전남 장성 육군보병학교(상무대)의 김백일 동상은 1955년 당시 육참총장이던 만주군 헌병 상위 출신의 정일권이 세우고, 친일 역사학자 이병도가 이를 기념하는 헌시를 썼다. 이 동상은 광주·전남 시민단체로부터 철거 요구를 받고 있다. 김백일의 동상은 전쟁기념관에도 있다고 한다. 김백일은 백선엽과 마찬가지로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 인명사전>이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되었다.

 

일본 육사 출신 유재흥, 한국전  ‘최악의 패전’ 장군

 

유재흥(1921~2011)은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군 대좌에까지 오른 부친 유승렬(1893~1953)과 함께 부자가 <친일 인명사전>에 오른 친일반민족행위자다. 그 역시 일본 육사를 나온 일본 육군 대위 출신으로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육군 대위로 임관했다.

 

전쟁기념관에는 그를 6·25전쟁의 영웅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그는 “한국전 ‘최악의 패전’ 장군”이었다. 1950년 10월, 평양으로 북진 중 창설된 3군단의 지휘를 맡은 유재흥은 이듬해 5월 중공군 2차 춘계 공세 때에 벌어진 현리전투로 병력 60%를 잃은 채 창설 8개월 만에 부대가 해체되는 치욕을 겪었다. 그는 “작전회의에 참석한다”라며 작전 중 경비행기를 이용해 작전지역에서 도주하고 사단장 등 최석 9사단장 등 군지휘관들도 허둥지둥 탈주하는 군기 문란을 저질러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린 인물이다. [관련 기사 : 한국전 최악의 패전장군, 국립현충원에 안장]

 

현리전투에서 참패한 3군단은 미 제8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에 의해 그해 5월26일 전격 해체됐다. 또 1군단 지휘권도 미 8군이 직접 통제하는 등 작전 통제권이 미군으로 넘겨지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의 전시 작전통제권에 강력히 반대한 퇴역 장성이 유재흥이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관련 글 : 한국전쟁 때 이양한 평시 작전통제권’ 44년 만에 회수]

 

1950년 7월, 유재흥은 1군단의 김홍일 군단장을 보좌하는 부군단장을 거쳐 새로 창설된 2군단장에 보직됐다. 이때, 낙동강 방어선에서 1·6사단을 지휘해 다부동·영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경북 경산 하양초등학교에 세워진 ‘유재흥 장군 제승지(制勝址) 비’는 이 승리를 기념하는 빗돌이다. 그러나 유재흥의 2군단은 이듬해 중공군 참전 이후 벌어진 덕천 전투에서 지휘 실수로 중공군 38군과 42군에 포위를 허용하여 제2군단 6사단, 7사단, 8사단이 괴멸적 타격을 입고 해체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국립현충원 안장된 세 사람, 이젠 상징물을 ‘국가유산’으로?

 

위의 세 장군은 모두 국립서울현충원(김백일)과 국립대전현충원(백선엽, 유재흥)에 안장됐다. 백번 양보하여 현충원 안장을 용인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전승을 기린 빗돌을 새삼스레 ‘국가유산’으로 지정하는 건 다른 문제 아닌가. 국가유산포털에서는 ‘국가유산’을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민족적 또는 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또는 경관적 가치가 큰 우리나라의 소중한 유산”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되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오른 백선엽은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 오마이뉴스

이들은 인물과 행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국민적 합의도 없는 문제의 인물, 그것도 국가가 확인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거나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될 만큼의 친일 부역으로 민족을 등진 이들이었다. 창군 초기에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불과 2, 30대에 벼락출세로 장군이 된 이들의 전승과 그 기념비를 국가유산으로 지정하는 게 국민적 합의에 얼마나 가까운가 말이다.

 

국정농단, 총선개입, 주가조작 등으로 논란이 논란을 낳고 있는 어지러운 시국을 틈타, 국가보훈부가 더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최소한 지금까지 저질러 버린 실정에 또 실정을 보태지 않는 일이지 않겠는가.

 

 

2024. 10.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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