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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쉰아홉 젊은이의 희생 앞 ‘ 무도(無道)한 권력’

by 낮달2018 2023.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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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1주기, 무책임과 무능으로 일관한 ‘무도한’ 권력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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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10월 사고 장소에 마련된 이태원 할로윈 참사 기억 공간. ⓒ 위키백과

어제는 이태원 참사 1주기였다. 시민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와 경찰력의 부재로 159명의 생때같은 목숨이 덧없이 스러져 간 날로부터 꼭 1년이 지났다. 그러나 사고의 진상은 물론, 아무도 그것을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고, 사고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사람도 없었다. 고작 용산구청장과 용산소방서장을 비롯한 하위직 실무자 6명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되었을 뿐이다.

 

이태원 참사 1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 메아리 없는 국가를 위해 절규하던 유족들의 뜻을 받아 야당들이 만든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야당 단독으로 통과했으나, 특별법 없이도 피해자와 유족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고 강변하는 여당에 가로막혀 공전하고 있을 뿐이다.

 

유족들은 어제 1주기 추모대회에 대통령을 초청했으나, 대통령은 야당이 개최하는 ‘정치집회 성격이 짙다’는 치졸하고 궁색한 이유를 내세워 이를 거부했다. 결국 여당에선 혁신위원장과 정책위의장, 사무총장만 ‘개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 경향신문 김용민 화백의 그림마당(10.30.)

해외 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44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비명에 죽은 전직 대통령을 찬양하며, 탄핵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손을 맞잡았다. 현직에 있을 때 딸인 박근혜조차 참석하지 않은 추도식에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이른바 ‘보수 결집’을 위해서 참석한 것이다. 자, 어느 쪽이 더 ‘정치적’인가.

 

박정희 추도식 쫓아간 대통령, 추모대회 불참하고 참모들과 함께 따로 추모예배

 

여러 차례 국내외의 공식적 연설에서 ‘자유’를 수백 번 외친 대통령은 심복의 총에 맞아 비명횡사한 독재자의 추도식에는 서둘러 쫓아갔다. 그러면서 자신의 임기 중 국가와 지자체의 직무 유기로 축제에 갔다가 스러져 간 젊은이의 희생을 추모하는 행사에는 야당 운운하는 ‘정치적’ 이유로 불참을 통고했다.

 

그런데 더 의아한 것은 대통령은 여당 대표 등 지도부를 대동하고 어릴 적에 다녔던 교회에 가서 추모 예배를 했다는 것이다. 그 교회는 실제 이 참사와 어떤 관계도 없는 곳인데, 굳이 거기 간 이유도 궁금하고, 대통령은 거기서 한 추도사에서도 유족을 위로하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다짐했을 뿐, 공식 사과나 특별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통령이 참석한 추모 예배는 그 교회 신자들과 함께한 예배가 아니라, 교회의 예배가 끝난 뒤 대통령 일행만을 대상으로 새로 마련한 예배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통령의 추도사는 결국 자기 일행을 대상으로 한 공허한 연설에 그친 셈이다. 비록 경호상의 문제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식의 추모가 왜 필요했을까. 상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행보로 이어지는 정신세계는 오묘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 이태원 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 ⓒ SBS 뉴스 갈무리
▲ 이태원 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진상 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손팟말을 들고 있다. ⓒ 쿠키포토

이태원 1년 지났지만, 참사 때도 지금도 정부는 없다” (한겨레)

시민 추모 행렬이태원 참사 1, 국가는 없었다 (경향신문)

 

대통령 자리를 비워두고 진행된 시민 추모대회를 알리는 진보지들의 기사 제목은 ‘정부’와 ‘국가’의 부재를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대회에 참가한 시민들 1만여 명의 ‘동행’이 유족들과 희생자들에겐 무엇으로도 얻지 못한 ‘위로’였을 것이다. 야당에 대회 개최를 맡겨 ‘정치적 집회’로 만든(?) 유족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해서 그 혐의를 완곡하게 부인했다.

 

“참사 이후 유가족들은 단 한 번도 정치적 행동을 한 적이 없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했을 뿐”

 

진상이 밝혀지지도,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1년이 흘렀고, 생존자와 유족들과 2차 가해에 시달리고 있다. 온라인 공간에서 ‘놀러 갔다 죽었다’라며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글 등 혐오 표현은 이어지고 있다. 오죽하면 1주기를 맞아 네이버와 다음 같은 포털들은 관련 기사에 댓글 창을 닫는다고 공지하기까지 했겠는가.

 

전 정부를  무도하다’고 한 비판, 현 정부에 되돌려져야 한다

 

취임 1년 반이 지나면서 누구 말마따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로 바뀐 퇴행적 현실 앞에 대중은 무력감과 함께 어려워진 경제 상황 때문에 고통스럽다. 마음속 깊이 쟁여 둔 낱말, ‘무도(無道)하다’를 떠올리는 이유다. ‘무도’는 대통령이 후보 때부터 당시 민주당 정부를 공격할 때 즐겨 쓰던 낱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무도’를 “말이나 행동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나서 막되다”라는 뜻의 형용사로 풀이하고 있다.

 

“무도하고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바꿔야 한다.”

“(당시 민주당 정부가) 국가와 국민을 약탈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무식한 3류 바보들 데려다 정치해서 경제, 외교, 안보 전부 망쳐 놓았다.”

 

당시 그런 보도를 접할 때마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무능하다’라는 비판은 얼마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지만, ‘무도하다’나 ‘부패했다’라는 비판은 결이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 정부에서 권력 주변에 부패 따위가 드러난 적은 없다. 더구나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 막되다’라는 뜻의 형용사 ‘무도하다’는 왕조시대의 폭군에게나 쓰는 표현이다.

▲ 흔히 '황음무도'한 폭군으로 묘사되는 연산군. 영화 〈간신〉에서 연산군으로 분한 배우 김강우. ⓒ (주)수필름

이른바 “거칠고 음란한 행동을 거듭하면서 인간의 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황음무도(荒淫無道)’ 같은 표현으로 떠올리는 임금은 조선왕조의 폭군 연산군 정도인 이유다. 그 표현 속의 함의를 민주공화국에서 쓰기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현대의 정치 체제에서 권력은 일정하게 견제되고 감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이태원 참사의 대응 과정에서 드러난 현 정부의 민낯은 차마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진상은커녕 정무적 책임조차 묻지 않으며 허송한 세월이 지난 1년이었다. 한 번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고, 책임 있는 자들의 사과조차 받지 못한 유족들은 그래서 여전히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반성하지 않는 마음과 책임지지 않는 태도가 오송 참사와 해병대원 사망이라는 또 다른 비극을 낳았다”라고 지적한 야당 대표의 추도사에 시민들이 머리를 끄덕이는 이유다. 이태원 참사에서 보여준 정부 여당의 무책임하고 무능한 대응이야말로 “말이나 행동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나서 막되다”라는 뜻의 형용사 ‘무도하다’를 불러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무책임·무능·무도한 대응 1년 …그러나 역사는 진보한다

 

이태원 참사에 드러난 무책임·무능·무도한 대응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는 듯 보인다. 참사의 직접적 책임은 경찰과 소방 같은 실무자, 하위직에 묻고, 대통령의 언급 “책임은 있는 사람에 딱딱 물어야” 해 검경은 윗선 책임을 차단하는 데 골몰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 일어난 오송 참사, 해병대 병사 사망사건 등에서 되풀이되었다.[관련 기사 : 윗선 책임 차단사활 건 검찰, 무책임·무성의만 확인한 이태원 참사 1]

 

오송 참사에서도 실질적인 책임을 져야 할 충북도지사와 청주시장은 빠지고, 하위직만 줄줄이 문책당하는 상황이고, 해병대원 사망사건도 “이런 일로 사단장을 처벌하면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겠느냐”는 대통령의 질책으로 꼬였다는 사실은 뉴스를 놓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아는 일이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이 상황들이 개선되거나 바로잡힐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는 데 있다.

 

유족들은 대회에서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온전하게 추모할 수 있도록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을 제정하여 진실을 함께 찾아가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정한 애도”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전망은 밝지 않다. 여당인 국민의 힘이 이 법안 제정에 반대하고, 국회에서 통과하더라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전하기만 하는 참사와 진상규명 요구, 여야의 대립과 갈등 등의 반복되는 악순환은 언제쯤 멈추게 될까. 정권의 교체나 혹은 새로운 대통령을 맞아야 그게 가능하다면, 우리의 민주주의와 우리의 공화국 체제는 얼마나 허술하고 무력한 것일까.

 

지방에서 참사 1주기를 맞아 마음으로 백쉰아홉 젊은이의 희생을 애도하면서, 느리고 때론 퇴행하기도 하지만, 가늠할 수 없어도 마침내 진보하는 역사를 생각한다.

 

 

2023. 10.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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