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김효순 지음 <간도특설대>
1930년대 일제가 편제·운영한 ‘친일 토벌부대’ ‘간도특설대’가 간간이 소환되는 것은 이 부대 출신 인사의 친일 전력에 대한 논란이 벌어질 때다. 2020년에는 현충원 안장과 관련해 백선엽 전 대장의 간도특설대 이력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관련 기사 : 백선엽과 필리프 페탱, ‘구국’과 ‘반역’ 사이).
간도특설대 출신의 한국인 장교들은 일제가 세운 괴뢰 국가 만주국의 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군 장교로 일제가 요구하는 항일, 항 만주국 세력에 대한 이른바 ‘토벌’을 수행했다. 이들의 주 타격 대상은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부대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마땅히 반민족적인 부역 행위자로 단죄돼야 하지만, 이들은 해방 후 귀국, 국군으로 변신해 군 간부가 돼 안락한 삶을 살았다.
독립운동가와 친일 부역자가 이웃한 국립묘지
해병대 초대, 2대 사령관을 지낸 신현준(1915~2007)과 김석범(1915~1998)을 비롯하여, 흥남철수작전에서 피란민 수송에 이바지한 1군단장 김백일(1917~1951), 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된 백선엽(1920~2020) 등이 그들이다. 백선엽의 현충원 안장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었을 때 간도특설대가 다시 소환됐지만, 언론보도는 늘 그만그만한 내용을 소개하는 데 그쳤다.
간도특설대에 관한 책을 찾다가 <한겨레> 대기자 출신의 언론인 김효순이 쓴 <간도특설대>를 뒤늦게 읽었다. 2014년에 초판이 나온 책을 무려 7년이나 지나서 읽게 된 것이다. 마침맞게 홍범도 장군 묘소 참배에 동행하지 않겠냐는 지역 후배들의 제의를 받고 동행해 대전현충원을 찾아, 그들의 무덤도 둘러봤다.
일제와 싸운 홍범도 장군과 간도특설대 출신의 친일 부역자들이 같은 묘지에 안장되는 현실은 일제강점기 시대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 현대사의 오욕이고 비극이다. 애국지사묘역과 장군묘역이 떨어져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는지(관련 기사 : 백선엽과 불과 340m…친일파들 아래에 모셔진 홍범도 장군).
1938년, 간도특설대는 만주에서 항일 무장세력 ‘소탕’을 목표로 일본 관동군 간도 특무기관장 오코시 노부오(小越信雄) 중좌의 통제 아래 창설됐다. 특설대는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800~900여 명 규모의 대대급 부대로 1939년부터 본격적인 작전을 수행했으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했다. 부대장은 일본인이었지만, 장교들은 조선인이 많았고 병사들 역시 전원 친일 조선인으로 구성됐다.
항일 무장세력 ‘소탕’을 목표로 창설된 간도특설대
전투 상대인 동북항일연군 등 항일조직이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간도특설대는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됐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 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이르렀다. 무려 7년 가까이 활동한 부대지만, 이 부대의 전모에 대한 정보는 제한되어 있고, 이에 관한 연구도 지지부진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친일 잔재 청산 문제와 마찬가지로 “진상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 세력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위협하고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간도특설대를 가장 잘 아는 이는 특설대 복무자이지만, 이들은 한국군 간부로 출세를 거듭하며 국립묘지에 묻혔다. 하지만 자신들의 친일 부역 사실에 관해서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간도특설대 헌병 중위 백선엽의 창씨명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2009)에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베일에 싸인 특설대의 진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책에서 저자는 백선엽의 상사였던 옌지(延吉) 헌병분단장 소네하라 미노루의 회고록을 인용해 그의 창씨명이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였음을 처음 밝혀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의 윤봉길 의거로 폭사한 상하이파견군 사령관이다. 그가 왜 이런 이름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고 죽었다. 백선엽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간도특설대에서 3년간 근무했다고 밝혔지만,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간도특설대를 “체계적으로 다룬 연구서가 아니”라고 한 저자의 말대로 382쪽에 이르는 묵직한 책이지만 <간도특설대>에도 그 활동의 구체적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독립운동의 성지였던 간도에 조선인으로 구성된 친일 토벌부대가 어떻게 등장해 활동할 수 있었는지를 더 넓은 시각에서 틀에 얽매이지 않고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중국 당국이 공인한 옌볜(延邊)의 ‘항일 열사’ 3125명 가운데 조선인의 비율이 98%에 이른 만주는 일제(만주국)의 토벌과 이에 맞선 항일세력의 ‘반토벌’이 격돌하는 엄혹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한계상황에 내몰린 무장투쟁의 주역들이 투항 변절하는 역사의 변곡점에서 일제의 명령에 따라 동포들에게 총을 겨누었던 간도특설대의 부역자들이 전후 어떻게 한국 사회의 주역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저자는 냉정하게 추적한다.
사실상 일제가 만주 일원의 주도권을 장악해 버린 1930년대 후반의 만주에서 조선인 혁명가에게 남은 길은 “싸우다 죽든가, 아니면 변절해서 목숨을 부지하든가” 두 가지뿐이었다. 수십 년간 항일 투쟁으로 살아온 이들 가운데서도 투항 변절하여 일제의 앞잡이가 되는 현실은 그런 실존적 상황의 결과였다.
항일연군의 중국인 전사는 물론, 김일성 부대의 핵심 참모 가운데서도 투항이 이어졌다는 것은 만주의 상황이 그만큼 엄혹했다는 방증이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주인공 김산(장지락)이 가장 믿을 수 있는 동지로 꼽은 의열단의 오성륜(1898~1947)도 1941년에 투항함으로써 혁명 활동 경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간도특설대가 수행한 토벌 기록은 중국 측 자료 외에는 파악이 어렵다. 부대 창설 이후 해산 때까지 108차례의 토벌이 행해졌다고 하는데, 특설대가 사살한 항일 게릴라 항일 군중은 172명이고, 체포한 이는 139명이다. 만주국으로부터 만주의 치안 숙정에 공을 세웠다고 훈장은 받은 특설대원은 175명인데 그중 167명이 조선인이었다.
간도특설대 장교들, 1~3대 해병대 사령관 지내다
소련의 참전과 만주국이 무너지면서 간도특설대는 해산됐다. 무장 해제된 특설대의 한인 장교들은 각각 고국으로 돌아왔다. 만주군 헌병 중위 백선엽은 가족과 함께 열차 편으로 평양에 들어왔다가 나중에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특설대 정보반 책임자였던 김석범은 해로로 인천에 들어왔고, 만군 보병으로 전속되었던 상위(대위) 신현준은 신징(新京) 군관학교 1기와 2기 출신인 이주일과 박정희 중위를 만나 함께 이듬해 5월 미국 함정으로 부산항에 들어왔다.
국내로 들어온 이들 간도특설대 출신 장교 가운데 신봉균, 김찬규는 각각 신현준과 김백일로 이름을 바꿨다. 어쨌든 독립한 조국의 군인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데 만주군 장교 적의 이름이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간도특설대 출신 장교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국군 장교로 변신하여 별을 달았고, 이들은 예편 후에도 공기업과 대기업의 임원 등을 지냈다.
간도특설대 하사관 출신 임충식(1922~1974)은 육사를 나와 대장까지 올랐고, 박창암은 5.16 쿠데타 뒤에 혁명검찰부장으로 서슬이 시퍼렜다. 3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김대식(1918~1999)도 간도특설대 창설 요원으로 차출된 준위 출신이었다. 어쩌다가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긍지를 자랑하는 해병대의 1~3대 사령관이 죄다 독립군 토벌부대 출신이라는 흑역사를 사람들은 얼마나 알까.
일제의 장교가 돼 천황을 위해 싸우겠다고 나선 식민지 청년에게 민족적 정체성 문제로 고민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생활고 때문에, 입신출세하기 위해, 친일파 친족의 권유 등 이유는 달라도 이들이 “일본군이나 만군 장교로 가는 길에 위화감을 갖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간도특설대가 ‘역사적 청산 대상’이라는 공론도 형성 못한 대한민국
끝내 간도특설대 시절에 대해 침묵하면서도 이들에게 양심의 가책 따위도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 시절의 기억을 긍정적으로 떠올리며 당시 행적을 합리화하기도 했다. 간도특설대의 조선인 선임지휘관이었던 김석범은 1987년에 나온 <만주국군지(軍誌)>라는 책자의 서문에서 만군에 있던 사람들이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예를 연마했다고 쓴 것이다.
백선엽도 일어판 회고록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에서 러허(熱河) 지역에서 팔로군과 대치할 때의 심리 공작을 회고하면서 “간도특설대는 민중의 편, 팔로군도 민중의 편, 민중의 편은 민중의 편을 공격하지 않는다”라는 논리를 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억설을 태연히 기술한 것이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한국과 중국에서 간도특설대에 대한 역사적 청산의 진행을 일러 ‘비교할 건더기조차 없다’고 말한다. 전후 20년이 지난 문화대혁명 시절에도 간도특설대 출신들이 혹독한 수모를 겪었던 중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간도특설대가 역사적 청산 대상의 하나라는 공론조차 형성되지 않았다.”
모두가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항일운동의 반대쪽에 섰던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파렴치한 짓은 용납돼선 안 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간도특설대가 민족의 자랑거리’였고, ‘민중의 편’이라는 ‘몰역사’가 허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2021. 10. 3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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