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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최초의 노벨상 수상에 부쳐

by 낮달2018 2024.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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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수상을 축하하면서 ‘노벨문학상’에 거는 딴지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2024년 10월 10일 목요일, 스톡홀름 스웨덴 아카데미에 전시된 한국 작가 한강의 책들

우선 한강 작가의 한국문학 최초의 노벨상 수상을 마음 깊이 축하해 마지않는다. 작가에 대한 선호와 무관하게 그가 노벨문학상의 견고한 성채를 무너뜨렸다는 건 모든 한국인이 함께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할 일이다. 한국인 최초이면서 아시아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 사실도 뜻깊다.

 

그러나, 나는 최초 수상이라는 갈채에 흥분 속에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떠들썩한 뉴스를 소비하면서 우리가 간과해 버릴 수 있는 문학과 한국문학에 대한 이해에 관한 몇 가지 단상이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인상에서 비롯한 것이므로, 어떠한 학문적·이론적인 근거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다.

 

나는 20대의 몇 해를 소설 습작을 하면서 보냈던 문청(文靑 : 문학청년) 출신으로, 국문학을 공부해 30년 넘게 중고등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가르친 게 고작인 백면서생이다. 쉰이 넘어 십몇 년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이런저런 기사를 썼고, 이를 블로그에 쟁여오다가 책 한 권(부역자들, 친일 문인의 민낯)을 펴낸 게 그나마 이력의 한 줄을 보탠 수준에 그칠 뿐이다. [관련 글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따라서 문학을 바라보는 나름의 관점이나 이해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공인받은 문학 이론을 주워섬길 능력도, 인류 보편의 예술 장르로서 문학에 대한 이해도 내세울 만한 수준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문제에 대한 생각을  밝히지 못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문학의 창작(공급)은 작가의 몫이지만, 그것을 해석(수용·소비)하는 이는 독자들이다. 그것이 독자들이 100이면 100이라는 해석과 평가가 있을 수 있다는 원론의 전제일 터이다. 나는 내 나름의 관점으로 우리 문학과 그것을 수용하는 세계를 말해보려고 한다. 

 

노벨상이 문학적 성취를 평가하는 ‘유일하거나 절대적인 척도’는 아니다

▲ 123년의 역사를 지닌 노벨문학상의 공정성과 선정기준은 그간 끊임없는 비판에 노출되어 왔었다.

1901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노벨상 첫 시상식이 열린 이래,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한강 작가까지 포함하여 모두 121명이다. 그중 91명(소련 포함)이 유럽 출신일 만큼 노벨상은 구미(歐美)에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아시아는 지금까지 인도 1(타고르), 중국 2(가오싱 젠, 모옌), 일본 2명(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 등 6명에 그치는 게 그것을 반증한다.

 

실제로 2인 이상의 수상자를 낸 국가는 16개국인데, 이들 나라에서 배출한 수상자는 전체 수상자의 78.5%에 이른다. 그리고 16개국 가운데, 비유럽 국가는 남미 1(칠레) 아시아 2(중국, 일본), 그리고 아프리카 1(남아공화국)개국이니, 이들을 빼도 미국과 유럽이 83명으로 전체의 68.5%를 차지한다.

 

그러나 123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노벨문학상는 세계 문학의 성취를 충분히 반영하고 대변하지 못했다. 그것은 작품에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 수여하며, 생존 작가에게만 수여한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톨스토이와 릴케, 제임스 조이스조차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는 건 허수로이 넘길 문제는 아니다.

 

톨스토이와 릴케, 제임스 조이스도 받지 못한 노벨상

▲ 이 쟁쟁한 작가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은 노벨상과 인연이 없었다는 점이다.

노벨상을 받지 못한 문호는 그들뿐만이 아니다. 조지프 콘래드, 안톤 체호프와 마르셀 프루스트, 프란츠 카프카와 D. H. 로런스,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에즈라 파운드, 폴 발레리, 니코스 카잔차키스, 생텍쥐페리도 노벨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프랑스 작가 장 폴 사르트르는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다. [관련 글 : 첫 시상, 이후 노벨상 이야기]

 

‘문학상’이라고 하지만 ‘Literature’가 문학에만 국한된 단어가 아닌, ‘쓰는 행위(Literacy)’ 일반에 대한 것이어서 역사가나 철학자에게도 수여되기도 한다는 점도 일반 독자에게는 불만스러운 부분일 수 있다. 영국의 처칠이나 버트런드 러셀, 앙리 베르그송 같은 이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다. 2016년에는 가수인 밥 딜런이 이 상을 받았으니…, 하긴 상이란 ‘주는 사람 마음’에 달리긴 했다.

 

그 자신 노벨문학상 수상자(1982)였던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노벨상의 환영’이란 글에서 노벨문학상의 공정성과 선정 기준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그래서다.

 

“그러나 문제는 최종 결과가 후보의 고유 권리와 상관있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는 하느님의 정의도 어찌할 수 없고, 단지 스웨덴 학술원 위원들의 헤아릴 수 없는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노벨상 선정이) 어떻게 진행되며, 어떻게 합의를 보고, 무엇이 그들의 생각을 결정짓는 진정한 타협점인지는 아직도 우리 시대에 가장 잘 보관된 비밀 중의 하나이다. 그들의 범주는 예측 불가능하고, 모순적이며, 심지어는 전조(前兆)마저도 무시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결정은 비밀이며, 공동 책임이고 번복 불가능한 것이다.”   

 

     - 노벨상의 환영(마르케스, <꿈을 빌려드립니다>, 하늘연못, 2006) 중에서

 

노벨문학상 시상과 수상의 현실은 세계 문학사의 일부를 구성할 뿐, 모든 문학적 가치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부커상이, 프랑스의 메디치 상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동인문학상이나 이상문학상, 김수영 문학상 등도 같은 그런 측면에선 근원적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같다.

 

흔히 지금껏 우리나라가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은 번역의 문제를 꼽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게 영향을 미친 점은 분명하고 우리 문학의 해외 소개가 사실상 폭넓게 이루어지지 못한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구미를 세계 문학의 중심으로, 주류로 바라본 현실의 영향에 비길 수는 없다. 

 

 “노벨문학상은 문학적 가치보다 다른 요인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 알다시피, 국적이나 인종 같은 정치적인 요인이다.”라고 한 미국의 문예비평가 해럴드 블룸의 지적이 두루 공감 받는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구미의 수상자들을 살펴보면 너무나 생소한 이름이어서 그들이 소설가인지 시인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든 경우도 많다. 고명한 스웨덴 한림원의 종신회원들에겐 톨스토이의 명성마저 이르지 못한 시절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이번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이 모두를 놀라게 한 것도 최근에 세계 곳곳에서 문화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한국의 위상이 일정한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건 자명한 일 아닌가.

 

노벨상이 문학적 수준의 ‘절대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노벨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이 당대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결코 규정하지 못한다. 문학 작품의 우열을 계량화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로 쓰인 문학적 구조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제적 평가와 상관없이 그간 노벨상 후보로 추천된 바 있는 우리 작가나 시인들은 노벨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이들이라는 점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한국문학이 전작 장편의 전통은 다소 아쉽지만, 중·단편소설에선 그 수준이 세계의 그것을 능가한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소개되지 못했지만, 시문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미 작고한 문인들 가운데, 넉넉히 노벨상에 이름을 올릴 분들이 적지 않다. 일찍이 현대문학 초창기의 염상섭, 현진건이 이룩한 소설적 성과, 이후 극적인 현대사를 관통해 오며 숱한 시인 작가들이 이룩한 빛나는 문학의 성채는 그것 자체로도 빛난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돌발적 현상이 아니라, 오랜 세월 성찰적 성장을 이어 온 한국문학의 전통, 그 저력이 마침내 구체화된 것이기도 하다. 

 

한국문학, 노벨상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가 이룬 인류 보편의 ‘문학적 성취’다

▲ 작가 한강(1970~ ). 그는 국제 부커상과 메디치상에 이어 우리나라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 작가 한강의 소설집들. 맨 오른쪽은 외국에서 출판된 "채식주의자"다.

한국문학은 노벨상과 무관하게 인류가 이루어낸 문학적 성취의 일부다. 나는 중고생에게 그것을 깨우치면서 아이들에게 한국문학을 자랑스럽게 가르쳤었다. 생존 여부와 상관없이 한강 이전의 선배 작가들, 혹은 후배 작가들이 보여준 문학적 헌신과 성과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것은 “삶의 의미를 탐구한 선배 작가들의 노력과 힘이 자신의 영감이었다.”라는 한강 작가의 고백에도 벅차게 담겨 있다.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면서도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죽음들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고 기자회견을 하겠느냐고 한 작가의 결정에도 경의를 표한다. 작가가 더 낮고, 더 겸손하게 수상을 받아들이면서 그가 천착해 온 세계를 더 치열하게 탐구하고, 그 과실들을 독자들과 공유할 수 있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2024. 10. 1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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