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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한가위 풍경, ‘귀성(歸省)과 ‘귀향’ 사이

by 낮달2018 2023.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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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명절, 귀성 없는 귀향

▲ 도시에 뜬 한가위 보름달(1969). 2010년의 달과 무엇이 다를까.

기다릴 어버이 계시지 않는 고향

 

한가위가 가깝다. 예년과 달리 징검다리긴 하지만 거의 한 주를 쉴 수 있는 연휴라 그런지 은근히 들뜬 분위기가 느껴진다. ‘아니, 들뜬 건 내 마음인지 모르지’ 하고 중얼대다가 다시 고친다. 내게 들뜰 이유가 있어야 말이지. 돌아갈 고향이 있나, 반겨줄 어버이가 계시나…….

 

아, 참. 선생님은 고아시니까 그렇죠? 공연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날이 갈수록 명절이 오히려 쓸쓸해진다고 했더니 동료가 농을 건넸다. 그렇다. 어버이를 모두 잃었으니 나는 고풍스럽게 말하면 ‘고애자(孤哀子, 어버이를 모두 여읜 사람이 상중에 자기를 이르는 일인칭 대명사)’인 셈이다.

 

부모님뿐이 아니다. 내게 열아홉 살 연상의, ‘아버지 맞잡이’였던 맏형님도, 그 형수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내겐 지차(之次)인 형제가 명절이면 들르는 ‘큰집’이 없다. 조카들도 고향을 떠나 타관에서 둥지를 틀고 사니 굳이 삼촌인 내가 조카에게 가서 명절을 쇨 일은 없는 것이다.

▲ 꼬리를 문 귀성 차량. 귀성은 여전히 전쟁이다.

막상 명절이 되면 가야 할 친가나 큰집이 없다는 게 이렇게 쓸쓸한 일일 줄은 나는 몰랐다. 아내와 혼인하면서 우리는 ‘법정 분가’되었다.

 

그것이 내 몫의 삶을 ‘알아서 살라’는 다소 비정한 절차였다는 걸 그때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내가 ‘호주 본인’이 되고, 아내와 아이들의 호주가 되는 그 성장의 길목에서도 여전히 정신적으로 친가에 내 적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기다리는 어버이가 계시지 않은 ‘귀성’은 단지 ‘귀향’일 뿐이었다. ‘귀향’이 단지 고향으로 돌아감을 뜻하는 것이라면 ‘귀성(歸省)’은 ‘부모를 뵙기 위하여 객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의 의미다. 귀성에서 ‘살필 성(省)’의 의미는 분명하다. 한가위나 설날 같은 명절의 귀향이 귀성이 되는 이유도 명백하다.

 

형님이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여읜 것은 2002년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귀성’과 ‘명절’을 잃었다. 명절이면 고작 고향 뒷산에 모신 부모님의 산소를 살피는 거로 나는 간신히 돌아가신 어버이, 형님 등 가족과의 유대를 확인하고 마는 것이다.

 

오늘 근무를 마치면 사람들은 유례없는 연휴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주말의 TV 프로그램은 서둘러 ‘한가위 특집’을 방영했고, 앞질러 곱게 한복을 입은 출연자들은 ‘넉넉하고 풍성한 한가위’를 연신 합창해 대고 있다.

 

오늘 자 신문은 이번 한가위에 무려 연인원 4949만 명의 민족대이동이 이루어진다고 전한다. 남한 총인구 4977만(2010 통계청) 명과 별로 다르지 않은 숫자다. 이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은 이날 하루, 한가위 명절을 쇠기 위해 어딘가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 숫자 가운데 성묘 차 고향을 들를 우리도 포함될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서둘러 고향을 찾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몇 해 전의 기사에서 한가위나 설날 같은 명절이 지닌 속뜻을 ‘만남과 기다림의 제의’[☞ 바로 가기]라고 쓴 적이 있다. 명절이면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고 귀향길에 나서면서 시작되는 이 ‘귀성 전쟁’은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니 그것을 ‘제의’로 규정하는 것도 그리 지나치지 않을 듯해서다.

▲ 객차에 매달린 사람들(위)와 객실의 선반에 오른 승객들. 1969년.
▲ 귀성길 풍경. 1970년(위), 1982년(아래). 형식만 바뀌었을 뿐 사람들의 '귀소본능'은 예전 그대로다.

고단한 근대화 시기의 삽화들

 

지인들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60~80년대의 추석 귀성 풍경을 담은 사진을 잔뜩 만났다. 올린 이에게 출처를 물어봐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같은 사진을 쓰고 있는 어떤 글에서는 <동아일보> ‘사진 DB’를 출처로 적고 있다.

 

수십 년의 시간은 우리의 균형 감각조차 왜곡하는 것일까. 그게 지난 시절,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그것은 쉽게 믿기지 않는다. 거기 담긴 우리 자신의 모습은 투박하고 촌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1960년대와 1980년대의 서울역 풍경은 쉬 구별되지 않을 만큼 닮았다. 아귀다툼하면서 열차나 버스를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6, 70년대 중고생 시절, 한가위를 맞아 시골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분투하던 버스 정류장을 떠올린 것이 이쯤에서다. 길은 멀었고, 차편은 적고 고향으로 가야 하는 사람은 사연만큼이나 많았던 때다.

▲ 대구 북부정류장. 6,70년대에 이 정류장은 원대동에 있어 '원대 주차장'으로 불리었다. ⓒ 대구 시티투어

대구에서 내 고향까지는 40km, 꼭 백 리 길이었다. 당시, 경북 북부를 여행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대구시 원대동에 있는 정류장을 이용해야 했다. 그 정류장은 정류장이라는 이름보다 ‘원대 주차장’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불렸다. 지금은 시 외곽에 큼지막한 정류장을 지어 이전했지만, 당시 정류장은 비좁고 낡은 시설이었다.

 

‘계집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이를 만큼 원대 주차장은 땅바닥이 질기로 유명했다. 대목에 비라도 조금 뿌렸다 하면 정류장 구내는 발 디딜 곳을 찾기 어려운 새까만 진흙 길이기 일쑤였다. 그 길을 조심스레 건너온, 나팔바지와 차이나 컬러의 상의로 멋을 낸 처녀·총각들과 대구로 유학 온 시골 학생들이 뒤섞여 연출하는 달착지근하게 들뜬 듯한 분위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요즘과 같은 지정좌석제 제도가 없을 때였다. 차가 플랫폼에 들어올 때마다 사람들은 아수라처럼 달려가 차창으로 버스에 올라 재빨리 자리를 잡곤 했다. 그러나 차가 떠날 때면 차 안은 정원의 1.5배를 간단히 넘긴 승객들로 가득 차곤 했다.

▲ 귀성길은 고되지만, 행복한 시간이다. 1980년 서울역(위), 1989년 용산역 예매행렬(가운데), 1989년 궁내동 톨게이트(아래). ⓒ 연합뉴스

6, 70년대의 사진을 보면서 미소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것은 우리 세대의 연대기의 일부고, 고단한 근대화 시기의 거친 삽화들이다. 전 시대처럼 기를 쓰고 차창으로 오르는 대신 이제 우리는 지정좌석표를 갖고 느긋하게 차에 오르면 된다.

 

역 앞 광장에서 밤을 새우는 대신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혹은 철도회원권으로 차표를 사는 것으로도 족하다. 결국, 명절을 맞아 기를 쓰고 귀향길로 나서는 저 설명할 수 없는 ‘귀소본능’은 한 세대 이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세상이 달라지고 세월이 바뀌었지만 사람살이의 기본은 예전 그대로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4949만 명의 대이동 가운데에 끼지 못한 이들도 숱할 터이다. 몸은 떠나지만 고단한 삶에 짓눌린 채 귀향해야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어떤 귀향, 혹은 아비들의 한가위

 

감태준의 시 ‘귀향’과 나태주의 ‘귀향길’은 그런 이들의 아픔과 슬픔을 마치 한지에 비쳐드는 여명처럼 아련하게 노래한다. 시에서 노래하는 귀향이 한가위 날의 그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화자는 ‘절도 2범’, ‘기차표 한 장’, ‘불구의 조각달’의 고단한 삶에 지친 벗을 만난 귀향길을 노래한다. ‘살아도 곱게 살자 꽃같이 살자’, 그 마음의 약속과 다짐은 얼마나 눈물겨운가.

 

나태주의 시는 ‘자랑스럽게 살지 못한 나날 / 아는 사람 만날까 두렵다’, 단 두 행 속에 이 시대의 고단한 삶을 그려 넣었다. 대체 무엇이 자랑스러운 삶인가. 출세와 부와 명예, 고급 승용차와 널따란 평수의 아파트는커녕 일상의 그늘조차 지우지 못하는 숱한 ‘부끄러운 나날’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아는 사람의 눈길이 두렵다….

 

열흘 전쯤에 부산 앞바다에서 몸을 던진 흑진주 아빠, 마창대교에서 11살 아들과 함께 바다로 뛰어든 40대 가장이 그들이다. 그들은 단지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라 삶에 힘겨워서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세 딸을 남긴 이나 마지막 길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간 이의 짐은 세상보다 무거웠으리라.

 

속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가 건네주는 것은 한가위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풍요다. 팔월 보름 한가위 만월은 온 세상을 골고루 비춘다. 그 평등한 달빛처럼 이 풍성한 계절의 수확이 모두에게 고루 나누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가위 연휴를 맞으며 한가위 보름달이 전해 주는 ‘평등’과 ‘나눔’을 다시 생각해 본다.

 

2010. 9.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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