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일하면서 배우는 삶과 사회
농사 안 짓는 집에서 자라며 일을 배우지 못한 유소년시절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농사일을 해 본 적도, 그걸 배운 적도 없이 자랐다. 방앗간을 운영한 부모님께서는 따로 논밭을 마련하지 않으셨고, 당연히 농사도 따로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부모님께서는 가끔 아버지 친구분의 밭을 빌려 감자 농사를 짓거나, 두어 마지기의 벼농사를 지은 게 고작이었다. 그것도 아버지의 뜻이라기보다는 친구분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으니, 어린 아들에게 일을 시킬 계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잠깐이었지만, 소를 친 적이 있어서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에 나는 꼴망태를 메고 들로 나가 쇠풀을 베어오는 게 다였다. 그것도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 어쩌다 하는 일이어서 아버지에게 잠깐 낫으로 풀 베는 법을 배운 내 낫질이 그리 능숙하지 못했던 건 말할 나위가 없다.
나는 어른이나 동무들이 낫만을 재바르게 놀려서 풀을 베는 신기에 가까운 낫질을 경이롭게 바라보면서 내 서툰 낫질을 부끄러워했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아무것도 시키지 않아서 일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라는 얘기를 걸핏하면 이웃에게 하는 걸 은근히 고까워하곤 했다. 나는 동무들과 달리 일하지 않고 자랄 수 있는 자신의 유복한 처지를 내심 미안해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내가 일은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서 나는 일 대신 책을 읽거나 유선 방송의 잡음 섞인 라디오를 들으면서 여가를 보내곤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도회의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나는 집안일과는 더 멀어졌다. 방학 때 가끔 부모님을 거들던 내가 집안일로 온전히 돌아온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였다.
그것도 농사일이 아니라,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는 일로서였다. 그 무렵 몸이 불편한 부친을 대신해 나 어머니와 함께 방아를 찧었다. 주로 벼를 찧는 일이 중심이었고, 어머니는 ‘로라’라고 부른 곡물 분쇄기로 쌀이나 콩, 고추 등을 가는 일을 도맡아 하셨다. [관련 글 : ‘택택이 방앗간’의 추억]
방앗간을 돌리던 젊음의 한 시절
젊고 힘이 좋을 때여서 방앗거리를 져 나르는 일부터 도정(搗精)의 전 과정을 내가 맡아서 했다. 뒷날 형님이 돌아와 전기로 공장을 돌리기까지는 방앗간은 발동기를 돌려서 동력을 얻었는데, 그걸 수동으로 돌리는 것은 적잖은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발동기로 움직이는 축에 피댓줄을 걸어서 현미기, 백미기, 분쇄기를 돌린다. 그런데 피댓줄이 벗겨질 때마다 이를 다시 걸어주는 것은 꽤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는데, 나는 그것도 너끈히 치러냈다.
설날 대목에는 가래떡을 뽑는 일을 사나흘 간 거의 밤늦게까지 해야 했는데, 그건 현금 수입이 짭짤하게 들어오는 작업이었다. 나는 방앗간을 돌리고, 가래떡을 빼는 모두 10년 넘게 했다. 외지를 떠돌다가 돌아와 방앗간을 운영하던 형님이 세상을 떠나자, 해직 시절에는 형수의 요청에 따라 걸핏하면 집으로 불려 가 방아를 찧어야 했다.
때론 고단하긴 했지만, 그 시절은 내게는 온전히 집안일을 돕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일하면서 나는 농사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데서 온 열패감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때 배운 낫질은 그나마 조금씩 진보하여 지금은 흉내 내는 수준은 훨씬 넘어선 듯싶다. 그러나 엔간하면 예초기가 쓰이는 시절이니 이제 낫질은 예전만큼 소용에 닿지 않는 때가 많아졌다.
교단생활에서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도우며 공부하는 아이들을 관찰하면서 그들이 또래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안정적이며, 폭넓은 태도를 익히는 것을 감동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고작 중학생일 뿐인데, 병든 부모 대신 동생들에게 밥을 지어주고 보살피며 살림을 살아야 하는 아이들, 가난을 온몸으로 겪으며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여자아이들을 바라보면 먹먹할 때도 많았다.
“어릴 때 집안일 하며 자란 아이들이 성공한다”
그런 생각은 2015년에 보도된 신문 기사로 사실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청소와 심부름과 같은 허드렛일을 많이 한 어린이가 여러 방면에서 성공한다는 보도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의 기사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 허드렛일해야 성공한다”는 예의 기사는 집안일이 “책임감·성취도 높여…친구 관계 좋아지고 직업적으로도 성공”한다는 게 요지였다. [기사 바로가기]
신문은 집안일 정도와 집안일의 시작 단계가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한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가급적 어릴 때부터 어른을 도와 집안일을 많이 한 어린이일수록 숙달·통찰력, 책임감, 자신감 등을 갖게 돼 여러 분야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 연구 결과는 집안 사정 때문에 스스로 성큼 자라야 했던 아이들과는 다소 다르긴 하지만, 그 본질적인 부분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때의 아이들이 지금 사회에서 모범적인 시민으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으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집안일을 하고 자란 동료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내 소년 시절을 떠올리고 아련해지기도 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벗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쟁기질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내 친구 하나가 그 쟁기질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그래도 써레질보다는 쟁기질이 낫다고 하면서.
마주 앉은 친구도 거들었는데, 그의 이야기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걸 보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호강스럽게 자랐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가끔 방앗간 일을 하느라 땀을 흘릴 때 그들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쟁기나 써레질을 하면서 성장한 것이다.
농사일을 하며 자란 벗들과 후배, 그리고 드라마의 주인공들
나보다 나이가 20여 년 가까이 어린 여자 동료가 고등학교 때 깨를 심고, 깨밭을 매고 학교에 가야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 어린 후배가 더 어른스럽고 대견해 보였었다. 집안일 하며 자라는 이들은 내 주변에만 있는 건 아니다.
2022년에 제이티비시(JTBC)에서 방영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주인공들도 집안일에 힘을 보태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휴일이면 아버지의 논밭에서 일을 해야 하고, 그건 그 가족의 의무다. 경기도에 살면서 서울의 직장으로 출퇴근하는 주인공들이 주말이면 부모의 농사일을 도와야 하는 장면을 보면서 내가 벗어나 있던 집안일이 여전히 우리 주변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농사일 돕기, 유구한 전통과 관습, 혹은 가족의 유대
그것은 이 난만한 21세기에도 농업 생산의 일정 부분을 가족노동이 감당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삶이 유구한 전통과 관습의 울타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음의 방증이다. 비록 당사자들에겐 달갑지 않고 성가신 노동일 수도 있겠지만, 그걸 강제하는 게 가족의 유대이며 공동체의 묵시적 의무다.
도회에서 자라 우리 아이들은 집에서 어떤 노동도 하지 않고 자랐다. 스무 살 전후에 아들 녀석이 벌초에 동행하여 힘을 쓴 게 고작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노년의 어떤 순간에는 아이들은 스스로 우리가 해야 할 노동을 대신할 것이며, 제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깨닫고 그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세대는 교체되고, 우리의 삶은 이어질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맡아 온 벌초를 끝낼 때가 되었다고 가늠하게 만드는 것은 해마다 달라지는 몸의 변화, 그 노화를 새삼 깨닫게 되어서다. 죽기 전에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산소를 없애야 한다는 데 동기들 간에 의논을 끝냈는데 남은 것은 그 실행이다. 자식들에게 조상의 무덤을 관리하는 일을 물려주어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말이다.
2024. 9. 28. 낮달
'이 풍진 세상에 > 길 위에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선엽의 비석……, ‘국가유산’의 의미를 묻는다 (7) | 2024.10.21 |
---|---|
한국문학 최초의 노벨상 수상에 부쳐 (9) | 2024.10.12 |
한가위 풍경, ‘귀성(歸省)과 ‘귀향’ 사이 (17) | 2024.09.17 |
[카드 뉴스] 어떻게 이런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나? (5) | 2024.09.11 |
‘역사 교과서’, 첫 번째는 ‘비극’이었지만, 이번엔 ‘희극’이다 (10) | 2024.09.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