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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감문산 비탈의 개령향교, 중턱의 천 년 고찰 계림사를 찾다

by 낮달2018 2024.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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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김천의 세 향교 중 하나인 개령(開寧)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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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령향교는 1473년(성종 4)이 건립돼 1610년에 수해 우려로 감천 가에서 유동산 남쪽으로 옮겼다가 1866년 현 위치로 이전했다.

영남 만인소에 참여한 개령향교

 

▲ 김천시 행정지도. ⓒ 나무위키 자료 재구성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이다. 전국의 지방 행정 체계에 맞추어 ‘1읍 1교(一邑一校)’ 원칙에 따라 한 고을에 1개씩, 즉 규모가 제일 작았던 현(縣)에까지 세워진 국립학교다.

 

성균관이 주로 대과(大科)를 준비하는 국가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수도에 세웠다면 향교는 소과(小科)를 준비하는 ‘중등교육’ 정도의 지방 학교였다. 교생의 나이는 보통 15∼20세 정도였고 평민도 입교할 수 있었다. 향교의 설립은 조선 초부터 본격화돼 건국 100년 후인 1488년(성종 17)에 나온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전국 8개 도에 모두 329개소의 향교가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 이처럼 많은 향교가 설립된 배경은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교 사상으로 인재를 양성하여 정치·사회적으로 유교 중심 사회를 건설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향교는 유교 교육[강학(講學)]과 함께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제향(祭享)] 2가지 역할을 맡았다.

 

김천의 3개소 향교가 있는 까닭

 

경북 김천시에는 모두 3개소의 향교가 있다. 김천 시내에 있는 김산(金山)향교와 함께 지례면의 지례(知禮) 향교, 그리고 개령면의 개령향교가 그것이다. 이는 조선 초기에 향교가 설립될 때, 김산은 군(郡)이었고, 지례와 개령은 독립적인 현(縣)이어서 각각 향교를 세웠었기 때문이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김산에 지례와 개령의 두 현과 성주군의 신곡면을 합쳐 새로 김천군을 만들어진 것이다. [관련 글 : 옛 이름의 향교에 남은 김산 의병의 자취가 덧없다]

▲ 아포읍 대동교에서 바라본 감천. 이 하천은 개령 동부리 앞을 지나 구미시를 거쳐서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 디지털김천문화대전
▲ 2009년 정월 대보름에 안동에서 공연 중인 빗내농악단. 빗내농악은 개령 광천리, 빗내마을에서 전승되는 풍물굿이다.

김천시 개령면은 구미시에서 아포읍을 거치면 한달음에 다다를 수 있는 고장이다. 원래 변진의 감문소국(甘文小國)이었는데 신라의 문무왕 때 감문군(甘文郡)으로 하였으며, 경덕왕 때 개령으로 고쳤고, 1413년(태종 13)에 개령현이 되면서 현감을 두었다.

 

‘빗내농악’과 독립운동가 김단야의 개령

 

개령면 광천리, 빗내마을에서 전승되는 풍물굿이 ‘빗내농악’이다. 경상북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가 뒤에 국가무형유산이 된 빗내농악은 내륙지방의 전형적인 풍물굿으로 ‘군악(軍樂)’적인 영향이 아주 강하다. 2003년에는 광천리에 지역 주민들의 숙원이었던 빗내농악전수관이 건립되었다. [관련 글 : 경북 김천 빗내농악의 한판 풍물굿]

 

개령에서는 1919년 3월 24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만세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 시위를 주도한 이 가운데 김단야로 더 잘 알려진 김태연(1900~1938, 2005 독립장)이 있다. 박헌영·임원근과 함께 트로이카 ‘화요파 3인당’을 구성해 식민지 조선의 신흥 사회주의 운동을 이끈 그는 조선공산당의 최고위급 지도자로 성장했지만, 사회주의 소련에서 ‘반혁명’ 혐의로 처형되었다. [관련 글 : 혁명가, 사회주의 소련에서 반혁명혐의로 처형되다]

▲ 경북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감문산 비탈에 있는 개량향교. 외삼문 지나면 명륜당, 그 뒤에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 배치다.

빗내농악과 김단야 덕분에 이웃 고장인 개령을 훨씬 가깝게 여기고 있었던 나는 지난해 9월에야 개령향교와 근처의 계림사를 다녀올 수 있었다. 내비게이션에 입력해 길을 나섰는데, 향교가 길가가 아니라, 감문산(320m) 비탈의, 꽤 꼬불꼬불한 골목길 안에 있어서 한참 헤매다가 간신히 닿을 수 있었다.

 

유동산 아래 감천(甘川) 변에 개령향교가 설립된 것은 1473년(성종 4)이었다. 두 차례의 중건을 거쳐 1610년(광해군 2)에는 수해 우려가 있는 감천 가에서 유동산 남쪽으로 향교를 옮겼다. 1866년(고종 3) 현 위치로 이전 중수하였으나 일제 강점기 말 김산향교로 폐합되었다. 개령향교가 복안(復安)된 것은 1946년이었고, 1961년에 문묘를 수리했고, 1988년부터 정부 보조금으로 명륜당, 대성전, 단청과 관리사, 대지 매입과 담장 수축 등을 시행하였다.

▲ 개령향교의 강학 공간이 명륜당. 향교가 잠겨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담장을 따라 돌면서 찍은 사진이다.
▲ 개령향교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맞배집으로 일반 향교의 명륜당과 달리 대성전을 향해 돌아앉아 있다.
▲ 개령향교 명륜당 정면은 대성전을 바라보고 있다. 왼쪽의 처마만 보이는 건물이 동재, 서재다.

축대를 쌓은 산비탈에 올라앉은 향교 앞에 도착하긴 했지만, 늘 그렇듯 문이 잠겨 있었다. 산 아래 민가에 물었더니 담장을 돌아가면 담을 넘을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묵직한 사진기까지 들고 넘기에는 담은 높고 위험해서 포기했다. 이리저리 담장 주변을 돌아다니며 찍을 수 있는 정도까지만 사진을 찍는 데 그친 이유다.

 

전형적 전학후묘의 개령향교

 

향교 건물 구조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이다. 정문인 외삼문 뒤에 명륜당이, 그 뒤에 내삼문을 지나면 대성전이다.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에 동재·서재가 좌우에 세워져 있는데 담장 밖에서 그러려니 할 뿐, 마땅하게 사진을 찍을 각도가 나오지 않았다.

 

개령향교에는 5성(공자, 안자, 자사, 맹자, 증자)과 송조(宋朝) 2현(정호, 주희),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을 모시고 있는데, 이 배향 인물은 지례향교와 같다.

▲ 개령향교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 디지털김천문화대전.

1881년 영남 만인소에 참여한 개령향교

 

개령향교는 규모가 작은 향교로 농소면·남면·아포읍·개령면·감문면을 관할했다. 1881년 안동의 도산서원, 영주의 영주향교와 더불어 만인소(萬人疏) 사건을 주도하였다. 조선시대에 1만 명 내외의 유생들이 연명해 올린 집단적인 소(疏)인 만인소는 주로 성균관 유생들이 주도했지만, 16세기 중엽 이후 지방 유생들이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만인소는 18세기 말 이후에 총 7차례 이루어졌는데, 1881년의 영남 만인소는 1881년 황준헌의 <조선책략(朝鮮策略)>과 미국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약 체결(1882)에 반대하며 이만손을 중심으로 한 영남 지역 유생들의 올린 소였다.

 

개령향교에서는 매년 가을, 개령면, 감문면, 아포읍, 농소면, 남면 등 5개 면의 65세 이상 노인 100여 명을 모셔 대접하는 기로연(耆老宴)을 베풀고 있고, 공자 탄신일에 석전(釋奠)대제를 지내고 있다. 최근에는 김천의 3개 향교의 관계자들이 모여 개령향교는 음력 8월 상정일(上丁日)에, 지례향교와 김산향교는 음력 2월 상정일(上丁日)에 배향하기로 합의하였다고 한다.

 

감문산의 천년 고찰 계림사(鷄林寺)

 

▲ 감문산 계림사의 대웅전과 요사채. 천년 고찰이라고 하나, 오래된 전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쩐지 편안한 느낌을 주는 절이다.
▲ 대웅전 앞 널따란 마당 오른쪽의 요사채 뒤쪽의 느티나무 고목이 아름다웠다.

개령향교를 돌아보고 나서 인근 산기슭의 계림사를 찾은 것은 향교를 찾아 뺑뺑이를 돌 때 보았던 이정표 덕분이다. 한 번 들러 본다는 기분으로 찾았는데, 정작 계림사는 419년(눌지왕 3) 아도(阿道)가 창건하였다는 고찰이다. 신라에 불교를 전했다는 아도는 선산과 김천에 절집 몇 곳을 창건했다.

 

‘해동 최초 가람’이라는 태조산 도리사(桃李寺)도, 김천 황악산 직지사(直指寺)도 아도가 창건한 절집이다. 감문산 계림사는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다. ‘계림(鷄林)’이라면 경주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 절의 이름이 계림이 된 사유는 전설로 전한다. [관련 글 : 도리사, 드는 이 편안히 품어주니 최초 가람아닌들 어떠랴 / 절집 안으로 들어온 숲, 직지사(直指寺)]

 

이 절집이 ‘계림사’가 된 까닭

 

계림사가 자리한 감문산의 봉우리 중 하나인 호두산(虎頭山)은 호랑이가 고개를 들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이 살기가 강해 감천 너머 맞은편 아포의 함골에서 연이어 사람이 죽어 나갔다. 선산 도리사에서 직지사를 지으려고 선산과 김천을 오가던 아도화상이 호두산의 살기를 누르기 위해 절 이름을 ‘계림’으로 붙였다.

 

아침에 길게 닭이 울면 호랑이는 활동을 멈추게 된다고 하여 호랑이와 상극인 닭이 숲을 이루어 산다는 뜻의 ‘계림’인데, 맞은 편 함골 뒷산의 이름을 ‘개를 매달았다’라는 뜻의 구현(狗懸)산으로 바꾸었더니 살상이 그쳤다는 것이다.

 

창건 이후의 기록은 자세히 남아 있지 않으나 <감주 계림사 개건기>와 <계림사 사적기>에 따르면 1804년(순조 4)에 주지가 결원된 채 주민들이 계를 조직하여 대웅전과 요사(療舍), 공루(空樓)를 확장하고 향연각(香烟閣) 등을 건립했다고 전한다. 지금의 대웅전은 1990년에 중건된 것이고 괘불은 1809년(순조 9)에 관민들의 시주로 제작되어 개령 쌍룡사(雙龍寺)에 봉안되었다가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 절집은 고적했고, 풀과 이끼가 자라고 있는 대웅전 앞마당도 편안했다.
▲ 대웅전 뒤쪽의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 삼성각 앞쪽에 서 있는 석불. 어떤 설명도 없어, 언제쯤 조성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전각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인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세 동의 요사가 남아 있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젊은 스님을 만나 잠깐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요즘 출가하는 이가 줄어서 절집을 지키는 이도 모자란다고 말했다. 그게 계림사에 정기나 부정기 법회가 따로 없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어쩐지 나그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 절집

 

이 절의 유산으로는 1809년(순조 9)에 조성한 높이 20m, 너비 5m의 괘불탱화(掛佛幀畵)가 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가뭄이 심할 때는 동부리 마을 입구에 있는 쌍샘 가에 이 탱화를 모셔놓고 기우제를 지냈다고도 한다. 이 탱화는 1978년 도둑에 의해 훼손되었는데, 그때 탱화 가장자리에서 사리 1과가 나왔다.

 

감문산에는 명당이 많이 있으나 무덤은 하나도 없다. 그 까닭은 이 산의 명당에 묘만 쓰면 마을 입구에 있는 쌍샘의 물이 변색하여 식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은 최근에도 종종 일어나 마을 사람들이 산을 뒤져 몰래 매장한 묘를 파낸다고 하는데 글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알 수 없다.

 

신라 시대에 창건한 절집이라곤 하나, 뒷날 새로 지은 전각들이니 오래된 고찰이라는 느낌을 주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대웅전 앞 평평한 마당이 시원했고, 오른쪽 요사채 뒤의 느티나무 고목이 아주 수려했다. 무엇보다도 잠깐 머물렀는데도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서 그 느낌이 좋았다. 그런 느낌을 받는 일이 드문 데도 그랬다.

 

대웅전 앞마당으로 오르는 언덕길에 낸 일각문도, 이어서 두른 담장도 좋았다. 삼성각 뒤쪽에 전각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는데도 절집 안은 고적했고, 풀과 이끼가 적당히 돋아난 마당을 밟는 기분도 괜찮았다. 언제 다시 한번 더 찾으리라고 마음먹었지만, 해가 바뀌어 한 돌이 내일모렌데 이제야 간신히 그 답사기를 끄적인다.

 

 

2024. 8.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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