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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절집 안으로 들어온 숲, 직지사(直指寺)

by 낮달2018 2019.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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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악산 직지사 기행

▲ 천불선원 앞에서 건너다 본 경내. 건너편 건물이 서별당인지, 다원인지 헷갈린다.

망자에겐 서운할 터이나 호상(好喪)의 죽음이란 반드시 슬픈 것만은 아니다. 김천에서 나서 자라 만만찮은 보수의 구각과 맞서 싸워 온 선배가 부친상을 입었고, 지난 주말, 선배 한 분을 모시고 그 문상을 다녀왔다. 향년이 84년이라면 사람에 따라 ‘수(壽)했다’고 할 수도, ‘조금 아쉽다’고 할 수도 있는 다소 애매한 시간인 듯하다.

 

경상도에선 아직도 흔히 볼 수 있는 굴건제복의 상주들이 감정을 담지 않고 느리게 뱉는 호곡(號哭)이나 그들과 맞절을 하고 앉아서 나누는 문상객들의 대화에서 묻어나는 것은 형식화된 슬픔이다. 그러나 의례적인 슬픔과 위로의 수사(修辭)에서 가식이나 위선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노인들의 죽음이란 늘 준비되어 있는 일정 같은 것이며, 그 죽음으로 말미암게 되는 산 사람들의 만남이 만드는 우정과 연대가 훨씬 두텁고 짙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렇듯 우리는 살아생전의 망자를 뵙지 못했고 알지도 못한다. 우리는 그의 죽음이 아니라, 상주를 위로하기 위해 두 시간쯤 국도를 달렸고, 비록 잠깐의 만남이지만, 오래 지켜 온 우정과 연대를 확인한다. 노인의 죽음이 오래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게 한 것이다. ‘초상이 나야 자주 만나겠다’는 농을 나누며 우리는 다시 작별했다.

 

시간은 5시가 가까웠고, 어쩌나 직지사(直指寺)를 한번 둘러보나 마나, 하다가 황악산(黃岳山)으로 향했다. 신라 눌지왕 때(418) 아도(阿道) 화상에 의하여 인근 도개의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세워진 이 절의 이름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이 절집이 들어앉은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청도, 서쪽으로 전라도, 동남쪽으로는 경상도에 연이은 삼도(三道)의 경계에 접해 있다.

 

조선 중기의, 흔히 사명당으로 불리는 유정(惟政) 대사가 이 절로 출가하여 신묵(信默) 대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런 인연으로 친다면 대사를 사당에 모신 밀양의 표충사에 못지않다. 30세에 주지가 되어 임진왜란(任辰倭亂) 때 구국제민(救國濟民)의 큰 공을 세운 사명당의 공로로 직지사는 조선 8대 가람(伽藍)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한다.

 

개인적으로 세 번째 방문이다. 고등학교 적에 처음으로, 그리고 90년께 한 번 더 이곳을 찾았는데, 정작 이 절집에 대한 기억은 거짓말처럼 비어 있다. 10대 때야 어려서 그러려니 하지만, 90년의 기억도 절 외곽이 공사로 어지러웠다는 기억밖에 없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러니, 누구 말마따나 ‘철없이 산 세월이야 말짱 헛것’이라는 얘기가 전혀 터무니없지 않은 것이다.

 

애당초 이 글의 목적이 안내나 소개에 있지 않고, 내 사적 견문의 기록이고, 굳이 순서나 차례가 따로 있지 않으니 생각나는 대로 절집을 휘젓고 다녔다. 한 반 바퀴쯤 돌고 나서야 우리는 이 절집이 만만찮은 아름다움을 감추고 있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초행이 아닌 선배도 이 뜻밖의 발견에 당혹하면서도 아름다운 도량이라는 평가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 담 아래 계곡을 굽어보며 갖가지 꽃에 둘러싸인 망일전(望日殿)과 서별당(西別堂).
▲ 망일전 뜰에 흰 고무신과 털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였다. 그것은 무욕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계곡 쪽으로 돌아 절집에 들면 만나는 곳이 망일전(望日殿)과 서별당(西別堂)이다. 아마 높은 스님이 거처하는 공간인 듯했다. 낮은 담장 안팎에 피어 있는 꽃이 그 빛깔만큼 도드라지지 않는 것은 좁은 마당에 고인 적요(寂寥)와 댓돌에 가지런히 놓은 흰 고무신과 털실 한 켤레의 주인이 무작위로 연출하는 '무심' 때문일 터이다. 댓돌과 방문 사이, 드리워진 발 너머는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무욕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 계곡 쪽에서 본 망일전,서별당. 절집이라기보다 조신한 규수를 여며둔 여염집 같아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객쩍은 생각을 하게 한다.
▲ 서별당 아래 천불선원으로 가는 길. 잘 다듬은 수로에 맑은 물줄기가 시원하였다.

경내를 한 바퀴 돌고 나서 우리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직지사는 큰 절이다. 공간도 그렇거니와 여러 차례의 불사로 이루어진 강원이나 선원을 빼더라도 경내의 전각과 부속 건물의 배치가 오밀조밀하지 않고 시원한 것은 경내 면적만 3만 평이라는 이 절집의 품이 여간 넉넉한 게 아니라는 방증이다.

 

대웅전 앞뜰에서 내려다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만세루와 범종각뿐, 나머지 전각은 경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그 각각의 건물이 마치 숨은 듯 없는 듯, 호젓하게 들어앉은 것처럼 여겨진다.

 

여기저기 흩어진 적지 않은 전각과 부속 건물들이 호젓하게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은 반드시 경내가 널러서가 아니라, 절집 안으로 들어온 숲 덕분이다. 전각과 전각, 그리고 요사(寮舍) 사이를 무심한 듯 들어선 나무와 숲이 경내에 시나브로 녹아 있는 무심 무욕의 질서를 해치지 않고 살갑게 젖어 들기 때문이다.

 

건물들의 높이나 규모도 만만찮은 데도 그것들이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도 따로 손을 대지 않은 오래된 나무와 수풀들 가운데서 내로라 시위하지 않고 무심히 하늘 한 자락을 비껴 바라보는 듯한 전각들의 소박한 모습 때문이다. 요사인 향적전(香積殿)과 서별당이 가지런히 기와를 얹고, 담쟁이덩굴을 휘감은 나지막한 흙담으로 자신을 여미고 있는 것도 그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다.

▲ 풀과 나무에 파묻힌 관음전(觀音殿). 관세음보살이 거처하기에 합당한 불전인 듯하다 .
▲ 관음전 주변의 단풍 숲. 이 넉넉한 진록의 풍경에다 적당량의 가을바람과 서리를 더 해 보라. 달빛은 즈믄 가람[천강(千江)]을 비추나니.

관음전은 풀과 나무에 파묻혀 있었다. "세상을 구제하는 보살[救世菩薩], 세상을 구제하는 청정한 성자[救世淨者], 중생에게 두려움 없는 마음을 베푸는 이[施無畏者], 크게 중생을 연민하는 마음으로 이익되게 하는 보살[大悲聖者]"인 관세음보살이 거처하기에 합당한 불전인 듯했다.

▲ 영조 11년(1735)에 중창했다는 직지사 대웅전은 중심 법당답게 크고 짜임새가 있다.

직지사 대웅전은 영조 11년(1735)에 중창했는데 중심 법당답게 크고 짜임새가 있다. 특히 높은 천장에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장식이 장엄을 더 한다. 앞면 5칸, 옆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이 전각 내부에는 약사·석가·아미타불 등 불상 세 분을 모시고 있다. 또한, 영조 20년(1744)에 만들어진 불화도 있는데 6m나 되는 비단 위에 그려졌다. 모두 짜임새 있는 구성과 불·보살상의 뛰어난 묘사, 안정감 있는 색깔, 정교한 장식표현 등이 조선시대 후기 불화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한다.

▲ 직지사의 공양간, 향적전(香積殿). 불전에 올리는 공양미는 향나무를 때서 밥을 짓는다는 고사(古事)에 따른 이름이다.

직지사의 공양간은 향적전(香積殿)이다. 불전에 올리는 공양미는 향나무를 때서 밥을 짓는다는 고사(古事)에 따른 이름이다. 낮은 담으로 둘러싸인 조그만 건물인데, 발을 드리운 대청의 모습은 은밀하기보단 소박하고 겸손해 보인다. 배롱나무의 화사한 그늘로도 그 질박함을 덮지 못한다.

▲ 직지사 천불선원. 불사로 지어진 새 건물이건만, 앉음새나 그 풍모가 경박하지 않고 깊고 그윽하다.

천불선원은 불사로 지어진 새 건물이건만, 앉음새나 그 풍모가 경박하지 않고 깊고 그윽하다. 선원으로 들어가는 다리 이름이 ‘도피안교’였는데, 그 이름이 과해 보이지 않을 만큼 기품과 여유가 넘쳤다. 이 역시 숲과 나무 등의 조경에 힘입은 듯하다. 문이 잠겨 있어 천불은 보지 못했다.

▲ 대웅전 삼층 석탑(보물)은 비로전 앞 삼층석탑(보물)과 함께 원래 경북 문경의 도천사 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

직지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삼층 석탑(보물 606호)은 비로전 앞 삼층석탑(보물 607호)과 함께 원래 경북 문경의 도천사 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세 탑 모두 크기, 양식, 세부가 같다. 이처럼 똑같은 석탑 3기가 한 곳에 서 있는 경우는 그밖의 예가 없어서 매우 특별한 경우라 한다.

 

3층 석탑이면서 2중 기단이 아닌 단층 기단 양식은 문경, 상주, 선산 지역에 주로 분포한다. 기단이 1단이고, 지붕돌의 들린 정도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상륜부는 탑을 옮겨 세울 때 새로 만들어 장식해 놓은 것이다.

 

때가 마침맞아서 저녁 예불시간이었다. 멀리서 법고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내에 있던 대중들이 약속이나 한 듯 범종각 곁에 모여들었다. 정연한 동작으로 중년의 스님이 법고 두드리기를 마치자, 젊다기보다 어려 뵈는 스님 하나가 범종을 치기 시작했다. 저녁 예불을 구경하기는 부석사에 이어 두 번째인데, 직지사의 범종은 몹시 높은 금속성 소리를 냈다. 카랑카랑하고 여운도 높게 이어지는 종소리가 울리면서 산사는 더욱 적막해졌다.

 

천상과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님의 음성이라는 종소리 앞에 부처님을 경배하든 하지 않든 범종각 곁에 모여든 대중들은 숙연해진다. 때맞추어 대웅전 앞 두 기의 삼층석탑 주변을 몇 명의 여인들이 두 손을 모은 채 돌기 시작했다. 이른바 탑돌이다.

 

가장 낮은 데서 부대끼며 살고 있는 여인네들의 저 소박한 믿음이 설사 일신과 일가의 안녕을 비는 데 그치는 ‘기복신앙’이라 한들, 누가 오연히 손가락질할 것인가. 도회의 웅장한 고딕 건물 아래서 행해지는 세련된 서구식 신앙도 기실은 미리 얻은 힘과 권세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표현일진대.

▲ 직지사의 불전 사물은 범종각에 모셔져 있다. 법고는 짐승을 비롯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울린다.
▲ 자하문. 엄청난 규모로 새로 지은 일주문 덕분에 새 이름을 갖게 된 게 아닌가 싶은 정겨운 산문.

아름다운 명승을 떠나면서 누구나 그렇게 자신에게 약속을 한다. 꽃이 피면, 또는 가을이 깊어지면 다시 이곳을 찾으리라. 그러나 그 다짐이 지켜지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도 굳이 손가락을 걸어 제게 약속하는 것은 마저 마음에 새기지 못하고 떠나는 미련 때문이고, 잠시나마 옷깃을 열어 틈입자를 용납해 준 그 땅과 나무, 숲과 돌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일 뿐이다.

 

누군가 그랬다. 직지사가 들어앉은 황악산은 가을이 좋지요. 계곡을 따라 오르노라면 무릎까지 빠지는 낙엽이 제격이지요. 저마다 허허로운 몸짓으로 이 넉넉한 품의 산사를 지키고 서 있는 나무와 숲은 가을이면 어떤 의상으로 사부대중을 맞이할지……. 다시 산문을 지나는 하산길 옆, 시에서 만든 직지문화공원이 천천히 불을 켜고 있었다.

 

 

2006. 9. 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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