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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사회주의 소련에서 ‘반혁명’ 혐의로 처형되다

by 낮달2018 2021.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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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⑤] 조선공산청년회 중앙위원·코민테른 전권위원 김단야(1901~1938)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이 세상에 나온 것은 1848년 2월이었고, 69년 뒤인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식민지 치하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것은 1925년 4월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혁명’의 과제를 민족해방혁명,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과업을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도 헌신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 후 38도선 이남에 친미반공국가가 세워지면서 잊히기 시작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 이들이 벌인 계급투쟁도,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도 이념 저편에 묻혀 버린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후한, 이 잊힌 혁명가들의 삶과 투쟁을 돌아본다.

▲ 김단야. 처 윤재분이 간직해 온 사진이다. ⓒ 김단야 손녀 김현숙 제공

안동 지역의 김재봉·권오설·이준태가 조선공산당 출범의 주역으로 활약하면서 ‘풍산 트로이카’를 이뤘다면, 김단야(金丹冶, 1900~1938)는 박헌영(1900~1956)·임원근(1900~1963, 1993 애국장)과 함께 또 다른 트로이카 ‘화요파 3인당’을 구성했다. 세 마리 말이 끄는 러시아식 마차, ‘트로이카’는 식민지 조선의 신흥 사회주의운동을 이끌어가는 동갑내기 삼두마차의 지칭으로 더할 나위가 없는 호칭이었다.

 

동갑내기 삼두마차 김단야·박헌영·임원근

 

▲ 1920년대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후해 화요회 3인당, 트로이카로 불린 김단야, 박헌영, 임원근과 박헌영. 김단야와 각각 결혼한 주세죽

세 사람은 1920년에 김만겸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에 입당했고 1921년 늦가을 고려공산청년동맹 대표 자격으로 모스크바의 극동 민족대회와 극동 청년대회에 참석했다. 또, 1921년에 상하이 고려공산청년단 상하이 지부에 참가하였고, 1922년에는 재편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중앙위원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1922년 4월, 이들은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서울로 이전해 본격적인 공산주의 청년운동을 전개하려고 국내로 잠입하다가 모두 체포됐다. 긴 조사과정에도 이들은 입국 목적을 숨기는 데 성공했고, 1922년 5월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각각 1년 6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4년 1월 출옥한 김단야는 박헌영·임원근과 함께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그는 극동 민족대회에서 만난 레닌에 관한 기사 ‘레닌 회견 인상기’를 게재하는 등 기명 기사를 많이 썼다.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동맹 등 청년운동 단체에 참가했고, 당 건설을 위한 조직 ‘화요회’에 가입해 당 건설의 기반을 닦았다.

 

김단야는 1925년 2월 전조선 민중 운동자대회 준비위원이 됐고, 4월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뒤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으로 선임됐다. 1920년 상하이로 망명했던 갓 스물의 청년이 불과 5년 만에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이다. 식민지와 혁명의 시대가 청년에게 부여한 짐은 그러나 무겁고 비장했다.

 

김단야는 경북 김천 출신으로 본명은 김태연(金泰淵)이다. 개령의 중농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915년 대구의 계성학교에 입학했으니 이듬해 일본인 교사와 미국 선교사인 교장에 반대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1917년 일본 도쿄로 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6개월간 공부하다가 돌아와 서울 배재학교에 들어갔다.

▲ 김단야의 조부 김지옥이 1915년에 설립한 개령교회. 100년이 넘은 오래된 교회다.

1919년 3월 말 고향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태형 90도를 선고받았다. 그해 12월에 상하이로 망명, 이듬해 배정학교와 안성중학교 등에서 공부하면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웠다. 그가 본격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21년 3월 상해 고려공산청년단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돼 기관지 <벌거숭이> 편집인으로 일하면서부터다. 그의 사회주의 사상은 극동 민족대회에서 레닌을 만나면서 확고해진 듯하다.

 

고려공산청년회(공청) 중앙총국을 국내로 이전하려던 계획은 입국 과정에서 좌초했지만, 1925년 조선공산당(조공) 창당에 이은 공청의 중앙위원으로 선임된 김단야는 연락부 책임자가 됐다. 그는 해외에 있는 조봉암과 상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비서부 그리고 국제공청과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9월에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김단야는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책임 비서 박헌영과 당원 100여 명이 검거되자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6년 1월부터 7월까지 조공 기관지 <불꽃(火花)> 주필이 됐고, ‘해외부’ 설립에 참여해 국내 공산당의 재정을 조달했다.

 

코민테른 전권위원으로 당 재건 운동

 

1926년 8월에는 그해 코민테른이 모스크바에 설립한, 사회주의 ‘책임 일꾼’ 양성 기관인 국제레닌대학에 입학했다. 1928년 11월에 그는 코민테른 산하 조선문제위원회에 조선공산당 문제를 검토할 참고자료를 제출했다. 김단야는 1929년 6월, 코민테른 전권위원(the Representative of the Comintern)으로서 국내 당 재건 운동에 직접 참여하고자 귀국하여 11월에 ‘조선공산당 조직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1930년 2월, 그는 일경의 탄압을 피해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 그해 중반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근무한 김단야는 9월에 다시 상하이로 가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코민테른의 재정지원을 받아 기관지 <코뮤니스트>를 7호까지 발간해 국내에 배포했다.

 

국제레닌대학을 마치고 뒤늦게 합류한 박헌영과 함께 김단야는 <코뮤니스트>를 국내로 들여오고 이를 고리로 당 재건의 기반을 닦아, 국내에 20개 남짓한 비합법 조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일제의 혹독한 탄압은 조직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1933년 7월, 상하이에서 박헌영이 체포된 이후 국내의 모든 연결망이 무너졌다.

 

김단야와 주세죽(1899~1953, 2007 애족장)은 일제의 추적을 피해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1934년 결혼했다. 그 무렵 그는 조선공산당의 최고위급 지도자로 성장해 있었고, 1936년까지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한국학부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소련에 사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1933)와 <어떻게 콜호즈원은 유족하게 되었는가>(1934)를 등의 팸플릿을 외국노동자 출판부에서 펴냈다.

▲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있었던 건물. 김단야는 여기서 근무했다.
▲ 모스크바에 있었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학부 건물. 김단야는 이 대학 조선학부장으로 근무했다. ⓒ 독립기념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5개월 남짓 공부한 뒤 외국노동자 출판부에서 일하며 아들을 낳은 주세죽과 김단야는 지하운동 시절에 비하면 훨씬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봄날은 너무 짧았다. 1936년 8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한국학부가 폐지되면서 김단야는 가족이 살던 관사를 비워달라는 독촉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러시아 전역에서 스탈린의 숙청이 진행 중이었다. 대대적 숙청이 이어지던 1937~1938년 2년간 내무인민위원부 비밀경찰에 체포된 사람은 158만 명, 처형으로 목숨을 잃은 이는 68만 명이 넘는 공포의 시대였다. 숙청의 광풍은 러시아에 망명한 외국인 혁명가들도 비껴가지 않았다.

 

갑작스레 폐지된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한국학부장 김단야는 내무인민위원부로부터 ‘인민의 적’ 혐의를 받았다. 그가 ‘일제의 밀정’이 아니냐는 것으로, 그것은 단순히 동료로부터 의심받는 차원이 아니라 숙청을 담당하는 국가기관의 서슬 푸른 추궁이었다.

 

‘스탈린의 광기’에 ‘반혁명’으로 희생되다

 

내무인민위원부는 1929년 조공 재건 운동을 위해 국내에 잠입해 활동할 때 적지 않은 동료들은 모두 체포되었는데 그만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점, 그가 혁명가후원회 업무를 맡긴 김한(1887~1934, 2005 독립장)이 밀정으로 처형됐는데, 당시 왜 그의 정체를 몰랐던가 등을 캐어물었다.

 

김단야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이를 증명하는 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코민테른 동방부의 임직원들이 구명에 나섰고, 이들의 제안에 따라 김단야는 장문의 해명서를 써서 제출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김단야는 자신을 혁명 일선으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고, 코민테른은 내무인민위원부에 조공의 당면 사업을 위해 김단야를 현지 파견 대표로 선임하고자 그 집행 여부를 물었는데, 회신은 김단야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은 권고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로써 여러 달 동안 이어진 구명운동은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그리고 1937년 9월, 언론인 출신의 사회주의자로 모스크바에 망명해 있던 이성태가 코민테른에 낸 의견서는 낭떠러지에 버티고 선 김단야를 떠밀어버렸다. 그는 김단야가 화요파 출신의 종파주의자이고 가까운 동료 중에는 밀정으로 전락한 자로 김찬, 조봉암, 박헌영, 김한, 고명자 등을 지목했다. 김단야는 검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체포되지 않은 극소수에 속했고, 두세 차례 체포됐을 때도 다른 동료들보다 현저히 낮은 형량을 받고 풀려났다고 했다.(이상 임경석, ‘스탈린 광기에 희생된 혁명가’,<한겨레21> 1194호 참조)

 

그리고 1937년 11월 5일, 소련 내무인민위원부는 김단야를 전격 체포했다. 김단야는 마침내 조공 지도자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내몰린 것이다. 1938년 2월, 소련 최고 인민 재판소 군사 법정은 그에게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반혁명 폭동과 반혁명 테러활동을 목적으로 한 조직의 지도자로서 1급 범죄자”라는 판결을 내리고 당일 바로 김단야를 처형했다.

 

향년 38세. 흔히 김단야는 ‘조선의 가타야마 센(片山潛)’이라고 불리는데, 가타야마 센은 일본 사회주의 제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코민테른 상임집행위원으로 소련에 머물면서 일본의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했고, 1933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김단야와 달리 처형된 것은 아니었다.

 

비극은 김단야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내인 주세죽의 삶도 만리타국 모스크바에서 내동댕이쳐졌다. 백일을 갓 지난 아들 김비딸리이는 곧 죽었고, 보육원에서 자란, 박헌영과 낳은 아홉 살 난 딸 비비안나는 1933년부터 이바노브에 있는 정치적 망명자를 위한 국제어린이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제1급 범죄자’의 아내로 체포된 주세죽은 두 달여 심문 끝에 사회적 위험분자로 지목돼 5년간 카자흐스탄으로 유배됐다. 그는 유배지에서 피혁공장 개찰원과 협동조합에서 근무했다.

 

화요회 트로이카의 엇갈린 운명

▲ 국제레닌대학 시절의 김단야와 주세죽.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단야. 가운데 줄 왼쪽 세 번째가 주세죽이다. ⓒ 손녀 김현숙 제공

주세죽이 1934년 남편의 친구이자 동지인 김단야와 결혼한 것은 그가, 병보석으로 출옥한 박헌영이 1933년 다시 상하이에서 검거된 것을 남편의 죽음으로 받아들인 탓인 듯하다. 남편의 건강을 아는 그가 공산당 재건 운동의 핵심 간부인 남편이 일경의 가혹한 심문을 견뎌내고 살아남으리라고 낙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주세죽이 박헌영의 생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46년 <프라우다> 신문의 기사를 통해서였다.

 

주세죽은 열여덟 살이 된 딸에게 <프라우다>에 실린 기사를 오려 보냈다. 신문엔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 관련 기사가 있었는데 그는 ‘박헌영’ 아래에 밑줄을 긋고 딸에게 그가 아버지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자신을 혁명 활동에 종사하게끔 조선으로 파견해 주거나, 그게 불가능하면 딸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원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세죽은 1953년 딸을 만나러 모스크바에 왔다가 병사했다.

 

해방 후 북한에서 부수상과 외상을 지낸 박헌영은 1952년 체포돼 1955년 재판에서 ‘미 제국주의 고용 간첩의 두목’ ‘공화국 전복 기도’ 혐의로 사형과 전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7월, 그는 김일성의 긴급 처형 지시에 따라 약식으로 처형됐다. 일제냐, 미제냐가 달랐을 뿐 김단야와 박헌영은 각각 간첩 혐의로 극적 생애를 마쳤다.

 

1920년대 화요파 트로이카 셋 중 둘은 비명에 갔지만, 임원근은 좀 다른 길을 갔다. 1925년 11월 조공 1차 검거 사건 때 체포된 그는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32년 사회주의운동 일선에서 물러나 이듬해 <조선중앙일보>에 들어가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 1946년 좌우합작운동 시기에 결성된 민주주의독립전선 준비위원회에 참가했고, 1963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권은 1989년 주세죽을, 해체 후 러시아연방은 2001년에 김단야를 복권했다. 한국 정부는 2005년 김단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2007년에는 주세죽에게 애족장을 각각 추서했다. 1928년 주세죽과 박헌영이 일제의 추적을 피해 도피하던 함경선 기차 안에서 태어나 러시아 이고르 모이세예프 국립민속무용단의 유일한 한인 무용수와 소련 국립 민속무용학과 교수를 지낸 박비비안나는 2007년 부모의 나라에 와서 어머니의 훈장을 대리 수령했고 6년 후 세상을 떠났다.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해방을 꿈꾼 젊은이들이 교직해 낸 역사는 그러나 모두 비극으로 끝났다. 김단야는 사회주의의 조국 소련에서, 박헌영은 한반도 북쪽에 수립한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각각 적의 간첩으로 몰려서 처형됐다. 같은 사회주의자였지만 하나는 해방 전에 죽임을 당해 조국의 기림을 받았고, 하나는 스스로 한반도 북쪽을 선택했지만 남과 북에서 모두 잊힌 존재가 됐다.

 

주세죽이 복권되고 난 2년 뒤,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그들이 혁명의 전범으로 따랐던 소비에트연방도 붕괴했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이념이 갈라놓은 남북의 대립과 갈등, 분단 76년의 현실 앞에서 김단야와 그의 시대에 내연했던 혁명의 열정은 지금 혁명가들의 낡은 사진 속에서 희미하게 바래어 가고 있다.

 

 

2021. 1. 16. 낮달

 

덧붙이는 글 |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시리즈는 여기서 1차 마무리합니다. 짧은 지면 안에 그들의 투쟁과 삶을 갈무리하긴 쉽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참고하여 접근하였지만, 이들 혁명가들의 삶을 일면적으로만 살핀 듯하여 두렵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열정은 민족해방 투쟁과 만나면서 기림 받았지만, 우리의 역사로서 그들의 혁명 투쟁도 객관적으로 기억되어야 하리라는 점을 사족으로 붙여둡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①]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 비서 김재봉(1890~1944)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②]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 권오설(1897~1930)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③] 제3차 조선공산당(안광천) 조직부장 김남수(1899~1945)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④]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이준태(1892~1950)

 

 

혁명가, 사회주의 소련에서 '반혁명' 혐의로 처형되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⑤] 조선공산청년회 중앙위원·코민테른 전권위원 김단야(1901~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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