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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옛 이름의 향교에 남은 ‘김산 의병’의 자취가 덧없다

by 낮달2018 2023.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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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시 교동 김산향교(金山鄕校)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김천시 교동에 있는 김산향교. 산 중턱 급한 경사지를 3단으로 조성한 대지 위에 남향으로 앉았다. ⓒ 한국관광공사

한자로 ‘쇠 금(金)’ 자를 쓰지만, ‘김’으로 읽는 성씨와 지명이 있다. 본관과 상관없이 ‘쇠 금’ 자를 쓰는 김씨는 모두 ‘김’으로 읽고, 지명 가운데에는 김천(金泉)을 비롯하여 김해(金海), 김포(金浦), 김제(金堤), 김화(金化) 등이 ‘금’이 아닌 ‘김’으로 읽는다. (성씨 가운데 ‘금’씨는 ‘거문고 금(琴)’ 자를 쓴다.)

 

실제 글자와 발음을 달리하는 이유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공인된 것은 없다. 성호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고려시대에 여진의 후예인 금나라가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등장하면서 원래 ‘금’이었던 성씨가 ‘김’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일설’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고려가 금나라를 대국으로 섬겼으므로 금나라의 국호를 함부로 부르는 것을 피하고자 금씨가 김씨로 바뀐 것이라 한다.

 

김천의 옛 이름 ‘김산(金山)’

 

지명도 비슷한 예로 볼 수 있겠는데, 김천의 옛 이름인 ‘김산(金山)’도 마찬가지다. 김천은 신라시대부터 주요한 금(金)의 산지여서 ‘금산’으로 불리었는데, 이 ‘금산’이 병자호란(1636) 이후 ‘김산’으로 고쳐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김천이 김산군이 된 것은 조선시대인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지례와 개령의 두 군과 성주군의 신곡면을 합쳐 새로 김천군을 만들었다. (조선시대에 독립 군이던 지례와 개령이 김천으로 편입되는 바람에 김천에는 김산향교 말고도 ‘지례향교’와 ‘개령향교’ 등 향교가 세 곳이나 있다.)

 

김천은 1949년 김천읍이 김천부로 승격되고, 다시 김천시로, 김천군은 금릉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 정리된 것은 1995년 김천시와 금릉군을 통합한 김천시가 출범하면서다. 김천시는 현재 1읍, 14면, 7동으로 2022년 6월 기준 인구는 139,906명이다.

▲ 김산향교의 외삼문. 산비탈 경사면에 세운 서원이라, 외삼문도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 김산향교 명륜전 뒤뜰. 여느 서원과 달리 동재와 서재가 명륜당 뒤쪽에 있다. 가운데는 대성전의 내삼문이다.

모든 행정 구역 명칭이 김천으로 통일되었지만, 향교는 아직도 ‘김산’으로 쓴다. 김천시 교동 437번지의 김산향교는 조선 태조 1년(1392) 어진 선비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유학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서 창건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1634년에 진사 강설이 지역 유림과 함께 대성전과 명륜당만을 중건하였고, 그의 아들 강여호가 선친의 뜻을 받들어서 건립비용을 널리 모금하여 동·서재(東西齋)와 묘문(廟門)을 완공하였다.

 

1392년에 세운 김산향교, 임란 때 소실,  중건

 

강당인 명륜당이 앞, 사당 대성전을 뒤쪽에 세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김산향교의 건물은 그 당시의 것으로, 1970년 건물을 전면 해체, 보수할 때 이준이 쓴 중수 상량문과 함께 ‘숭정 7년(1634)에 상량하였다’라는 글이 확인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祭享)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봄·가을에 석전(釋奠: 성균관과 향교의 대성전에서 공자를 비롯한 선성과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하며, 전교(典校: 향교의 수장) 1명과 장의(掌議:유생의 임원 가운데 으뜸) 수 명이 있다.

 

김산향교를 처음 찾은 것은 2018년 1월이다. 의성단장 편강렬(1892~1928) 선생[관련 글 : 의성단장 편강렬 의사, 만주에서 순국하다]의 순국 기념비를 찾아 김천 남산공원에 들렀다가 온 김에 연화지(鳶嘩池)와 함께 들른 곳이 김산향교였다.

▲ 김산향교의 명륜당. 앞면 5칸 옆면 2칸으로 지어졌으나 경사면이라 앞은 2층 누각, 뒷면은 단층이다. 동서재도 뒤에 있다.
▲ 명륜당 왼쪽의 비석군. 향교 중건 기념비 등이다.
▲ 명륜당은 앞쪽은 2층 누각이지만, 뒤쪽은 단층이다. 앞면 5칸 중에 가운데 세 칸은 마루, 양쪽은 각각 1칸 방을 들였다.

그러고는 나는 향교도 연화지도 잊어버렸다. 올 5월에 연화지에 들렀다가, 문득 기시감이 있어 확인해 보니 내 컴퓨터 사진 폴더 안에 황량한 겨울의 연화지와 함께 김산향교 사진이 시치미를 떼고 가득했다. 올해 찍은 사진과 5년 전 사진을 골라 김산향교를 들여다보았다. [관련 글 : 벚꽃이 지고 없어도 연화지 봉황대는 아름답다]

 

김산향교는 연화지에서 멀지 않은 교동 437번지 산 중턱 급한 경사지를 3단으로 조성한 대지 위에 남향으로 앉아 있다. 향교가 있는 동네는 시 단위 지역이면 ‘교동(校洞)’이고, 군 단위의 읍면 지역이면 ‘교리(校里)’로 불린다. 향교는 공자와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니 동네 이름과 함께 남았다.

 

명륜당 뒤쪽에 동서재를 둔 김산향교

 

웬만한 고을이면 기본으로 세워진 향교는 건축 구조나 형식을 공유했다. 명륜당과 유생의 숙소인 동·서재가 강학 공간을 형성하고, 내삼문과 동무(東廡), 그리고 대성전(大成殿)이 제향 공간을 형성하는 점은 우리나라의 모든 향교가 공통이다.

 

*동무(東廡):향교의 대성전에 배향하지 못한 유현(儒賢)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대성전 앞 동쪽에 세운 건물. 서쪽에 있는 건물은 서무(西廡)다.

*대성전(大成殿) : 문묘 안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

 

산비탈에 세운 김산향교는 일반적인 전학후묘에 따라 명륜당이 앞에 대성전이 뒤에 배치되었다. 보통은 동·서재를 명륜당 앞에 마주 보게 두는데 김산향교의 동·서재는 명륜당 뒤에 배치하였다. 물매가 급한 비탈에 건물을 앉히다 보니 통례를 따를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명륜당 뒷마당. 마주 보이는 세 칸 건물이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다. 상류층 자제가 묵은 곳이라 한다. 왼쪽 위의 건물은 동무(東廡)다.
▲ 명륜당 뒷뜰의 서재. 서민계급 자제들이 묵은 곳이라 한다.
▲ 선산향교 대성전의 내삼문. 좌우에 배롱나무가 서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동무다.

골목 끝 산비탈의 향교는 외삼문부터 높다란 계단 위에 세웠는데, 문 안으로 들어서면 좁은 마당 끝에 성큼 높은 누각으로 선 건물이 명륜당이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집으로, 정면은 누각의 형식이지만, 뒷면은 단층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의 동·서재와 바로 이어진다.

 

김산향교는 규모가 중설(中設 : 중간 규모)로 50명의 유생을 수용해 훈도가 교육을 담당하던 곳이었다조선 후기에 양민의 입학이 늘면서 동재는 양반의 자제, 서재는 양민의 자제가 사용하여 교생들의 신분을 구별하기도 하였다. 여이명 1718년에 작성한 <금릉지>에는 유생이 백여 명으로 늘면서 기강이 흐트러진 18세기 김산향교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 전에 동·서재에 유생이 오, 육십여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백여 명이 넘어, 향사일과 문회 때에 큰 소리로 떠들어 대고 아무렇게나 앉아서 농지거리나 하고,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은 이를 이기고, 천한 사람이 귀인을 능멸하는 등 망측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동·서재가 마주 보는 뜰 뒤로 높다란 계단 위에 내삼문, 그리고 대성전이다. 대성전 앞 오른쪽에 세로로 세워진 건물이 동무다. 대성전 안에는 5성(五聖 : 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과 송조2현(宋朝二賢 : 정호·주희)이, 동무(東廡)에는 동방(우리나라) 18현(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내삼문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바라본 명륜당. 마당 오른쪽의 구조물은 정료대(횃불을 피우는 곳)다.

1896년 ‘김산의병’이 일어난 김산향교

 

김산향교는 1896년 3월 여영소·여중룡(1856~1909, 1990 애국장) 등이 김산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여영소와 여중룡을 비롯한 김천 유생들은 1896년 1월 김산향교에 모여 통문을 띄우고 이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이에 상주의 이기찬(1853~1908), 선산의 허위(1855~1908, 1962 대한민국장) 등이 통문을 보고 의병을 이끌고 김천으로 들어왔다.

 

김산의 의병들은 이들과 연합하여 3월 24일 김산향교에서 김산 의병을 결성하였는데 이기찬(1853~1908, 1993 애국장)을 대장으로, 허위를 참모장으로 추대했다. 대구로 진격하기 위해 3월 25일 김산향교를 출발하였으며 3월 26일 김천 지례에 이르렀으나 대구에서 출동한 경상감영의 관군 수백 명이 김천에 도착하고, 고종 황제가 은밀히 내린 해산 종용을 받아 3월 29일 해산했다.

▲ 김산의병장 여중룡 선생의 순충기념비. 남산공원에 있다.

1905년 7월 여중룡은 이병구(1862~1916, 1990 애국장)·지우룡 등과 일본공사관을 폭파하려다가 일본 헌병대에 연행되어 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06년 5월 그는 다시 허위·이강년 등과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 최익현(1833~1907, 1962 대한민국장)과 힘을 모아 서울에 입성한 뒤 통감부를 격파할 것을 계획하여 8월 2일에 포 80발과 무장 의병 180명과 군비 200원을 마련해 준비하던 중, 수감 중 얻은 병과 과로로 숨졌다.

 

허위는 1907년 다시 이인영(1868~1909, 1962 대통령장) 등과 원주에서 전국 의병 대연합 부대를 조직하여 서울을 향했고, 허위는 정병 3백의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 동대문 밖에 이르렀으나 후진이 일본군에게 진로를 차단당해 포위되어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이듬해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관련 글 : 경성감옥에서 이강년, 허위 선생 순국하다]

 

김산향교의 외삼문 앞에 ‘국가보훈부 지정 현충 시설 - 김산의병 창의지’ 안내판이 서 있다. 지난 4월에 들렀을 땐 동재에서 쉬던 문화유산 해설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김산향교를 찾는 이는 드물다. 워낙 외지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근처에 있는, 대중 가수인 김호중의 모교인 김천예술고등학교와 인근 연화지를 연계하여 만든 특화 거리인 김호중 소리길을 찾기가 더 쉬운 까닭도 있으리라.

 

600년도 전에 세워진 김산향교나 100년도 전에 떨쳐 일어선 김산 의병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간다고 하더라도 그것과 무관하게 역사는 이어지고 흐른다. 좀 기분이 허해진다면, 연화지에 들러, 수면에 흔들리는 나무와 빌딩 그림자를 즐겨도 좋겠다. 

 

 

 

2023. 9.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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