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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7년 만에 다시 찾은 ‘대궐 밖 조선에서 제일 큰 집’, 선교장

by 낮달2018 2023.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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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여름 여행] ③ 강릉 선교장(船橋莊)(2023.7.28.)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집 앞이 경포호수였으므로 배로 다리를 만들어 호수를 건너다녔다 하여 '선교장'이 된 이 고택은 20세기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이다.

영랑호를 다녀와 잠깐 숙소에 들러 쉬다가 속초 관광수산시장을 찾았다. 7월 말, 한창 피서철이라고는 하지만, 시장 안은 인산인해라고 해도 될 만큼 사람들로 붐볐다. 대부분 외지인인 듯, 포장한 속초 명물 닭강정 상자를 든 이들이 온 시장 골목 안을 누비고 있었다.

 

숙소에서 찍은 해돋이 사진, 그리고 설악산자생식물원

 

딸애는 오징어순대와 튀김 등 안줏거리를, 아내는 반건조 오징어를 조금 샀다. 시장 어귀의 생대구탕으로 저녁을 먹었는데, 신선함과 뜨거운 국물이 좋아서 모두 만족했다. 속초 해수욕장 한 군데를 스치듯 들러보고 바로 숙소에 와서 맥주를 한잔하고 바로 자리에 들었다.

▲ 7월 28일 아침, 숙소 창으로 내다본 동해, 해가 뜨고 있다. 아들 아이가 대신 찍은 사진이다.

아들과 함께 잔 방에 바다 전망이 좋았던 모양이다. 아침에 그냥 누워서 뉴스를 보고 있는데, 아이가 창문을 열더니 해가 뜬다며 폰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해돋이나 해넘이 보는 거는 별로여서 아이에게 카메라로도 몇 장 찍어 두라고 주문했다. 나중에 아이가 찍은 사진을 보고, 한 장 찍어볼걸, 하고 잠깐 후회했다.

 

9시쯤 호텔을 나서 아침은 거르고 바로 설악산 근처의 설악산자생식물원에 들렀다. 속초시에서 운영하는 식물원인데, 입장료는 무료다. 이 식물원은 설악산을 축약해놓은 자연 생태학습장이다. 이곳에는 설악산에 자생하는 멸종 희귀식물부터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야생화까지 총 122종 5만여 본이 식재되어 있다고 했다.

▲ 속초시에서 운영하는 식물원인 설악산자생식물원. 날씨가 뜨겁지 않았다면 더 머물고 싶었던 장소다.
▲ 설악산자생식물원에는 수생식물원을 비롯하여 암석원, 자연 탐방로와 산책로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불볕이 후끈하게 우리를 반겨주었다. 식물원에는 수생식물원을 비롯하여 암석원, 자연 탐방로와 산책로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볕이 너무 뜨거워서 오래 머물 수 없어 잠깐 둘러보는 거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기초 자치단체도 고유의 사업을 시행할 수 있을 만큼 살림은 넉넉해졌고, 지방자치도 발전 중인 것이다.

 

2016년에 이어 두 번째로 찾은 선교장

 

점심을 먹고 유일하게 아들 녀석만 가 보지 못한 곳이어서 선교장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뙤약볕에 숨이 막힌다. 아내와 딸애는 근처 편의점으로 피신하고, 나는 아이와 같이 선교장으로 들어갔다. 입장료가 5천 원인데, 나는 경로 요금으로 2천 원을 할인받았다.

 

2016년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인데, 그때는 늦가을, 아내는 ‘대궐 밖 조선에서 제일 큰 집’이라는 명성에 머리를 내저었다. 아내는 선교장보다 뒷산 솔숲에 난 둘레길을 썩 마음에 들어 했다. 곧게 자라 하늘로 솟은 풍채 좋은 솔숲을 산책하며 눈 아래 내려다뵈는 고택의 운치를 즐기는 것은 선교장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여정이었다. [관련 글 : 하룻밤 숙소만 잡고 아내와 떠난 회갑 여행]

▲ 중사랑채 쪽에서 바라본 강릉 선교장. 99칸이 넘는 102칸집으로 하인들의 집까지 합치면 300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 강릉 선교장 누리집에서 내려받은 안내도를 재구성하였다.

선교장(船橋莊)은 예전엔 집 앞이 경포호수였으므로 배로 다리를 만들어 호수를 건너다녔다. 이 유서 깊은 전통가옥에 ‘배다리[선교(船橋)]’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이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1703~1781)이 건립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상류 주택이다.

 

현존 살림집 한옥 중 가장 큰 집 선교장, 자급자족의 경제적 시스템

 

궁궐이 아닌 양반집으로 지을 수 있는 집의 최대 규모는 99칸이라고 알려져 있다. 낭비를 막으려고 집의 규모를 제한했다는 것이지만, 꼭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99칸보다 큰 102칸, 하인들의 집까지 합치면 300칸에 이르는, 현존 살림집 한옥 중 가장 큰 집이 바로 강릉 선교장이다.

 

보통 양반집은 ‘당(堂)’이나 ‘각(閣)’ 등의 이름을 붙이는데, 유독 선교장에 ‘장(莊)’ 자가 붙은 것은 집의 경제 규모가 큰, ‘장원(莊園)’이기 때문이다. 장원은 단순히 식구가 많고 큰 집이 아니라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경제적 시스템을 갖춘 집’이다. 선교장은 건물과 가구 등을 전담하는 목수, 옷가지를 짓는 침모 등 전용 전문 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장원이라 불리는 부잣집은 조선시대 만석꾼 집안 가운데에서도 유례가 거의 없다. 더구나 너른 들을 갖춘 전라도나 세도가들이 살던 경상도가 아닌 산 많고 기후마저 거친 강원도에서 만석꾼이 된 집은 선교장이 유일하다고 한다. 한때 선교장 소유지는 북쪽으론 주문진, 남쪽으론 울진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상상을 넘는 규모다.

 

선교장은 10대에 걸쳐 3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살며 원형을 잘 보존하면서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명성과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1967년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20세기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으로 선정되었다. 대문간 왼쪽에 있는 선교장 박물관에는 이 집안에서 300년 동안 사용되고 소장된 유물 3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 구한말에 세운 활래정은 선교장에 딸린 외별당. 외부 벽면이 모두 분합문으로 되어 연못과 경포호수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구조다.
▲ 활래정은 정조가 낚시를 즐겼다는 창덕궁 후원 부용정과 비슷하고, 연못도 부용지와 비슷한 규모와 형태로 궁궐 후원을 연상시킨다.

구한말 지방 부호의 호화생활을 보여주는 활래정

 

매표소를 지나 선교장 내부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네모 난 인공 연못과 정자 하나가 방문객을 맞는다. 검푸른 연잎이 덩실대는 연못 한가운데 섬에는 소나무 몇 그루, 건너편의 정자가 선교장에 딸린 외별당(外別堂) 활래정(活來亭)이다.

 

활래정은 ㄱ자형으로 온돌방과 마루로 만들어진 몸채와 방지 속에 높은 돌기둥을 세우고 연못 쪽으로 돌출시킨 마루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른쪽인 남쪽에 누마루를 설치하고, 왼쪽 북측에는 온돌방을 배치한 평면이다. 외부 벽면이 모두 들어열개의 분합문으로 되어 연못과 경포호수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구조다.

 

구한말에 세워진 이 건물은 당시에 유행하던 건축양식들이 반영됐다. 정조가 낚시를 즐겼다는 창덕궁 후원 부용정과 비슷하고, 연못 또한 부용지와 비슷한 규모와 형태로 궁궐 후원을 연상시킨다. 이는 조선왕조의 질서가 무너졌던 구한말 지방 부호들의 호화스러웠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 선교장의 솟을대문 좌우로 행랑채기 길다랗게 이어져 있다. 집 밖으로 낸 굴뚝이 인상적이다.
▲ '선교유거'라는 현판이 걸린 솟을대문. 왼쪽의 23칸에 이르는 행랑채는 강원도의 문화 사랑방 구실을 한 선교장의 사랑채였다.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이어진 행랑채가 끝이 까마득할 만큼 기다랗다. 일반적으로 행랑은 하인들의 숙소지만, 안내판에는 “선교장을 찾는 손님과 주인의 심부름을 하는 집사들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안채로 가는 안대문, 사랑채로 가는 큰 대문이 따로 있어서 남녀유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라고 씌어 있다.

 

선교장의 접빈객, 혹은 변방의 문화 네트워크

 

행랑채 맞은편이 사랑채 열화당이고 열화당과 행랑채 사이의 동향 건물이 중사랑채다. 선교장은 사랑채가 여느 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데, 이는 사랑채가 남성들의 공간이자 손님을 만나는 공간으로서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집안은 ‘접빈객(接賓客)’, 손님을 환대하고 교류하는 걸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사랑채가 3채나 된다.

 

흔히 줄지어 있다고 ‘줄행랑’이라고 부르는 행랑채가 이 집안에서 세 번째 사랑채 구실을 했다. 이 행랑 건물은 작은 삼간집 8채를 붙여 지은, 23칸에 이르는 유례 없는 규모의 행랑채다. 보통 행랑은 하인들 숙소와 마구간, 창고 등으로 쓰이는 건물인데, 선교장의 행랑은 열화당을 찾는 손님을 물론이거니와 선교장에 부른 각종 전문인력이 머문 곳이었다.

▲ 선교장 사랑채. 오른쪽이 중사랑채, 왼쪽이 행랑채다. 열화당 옆에서 찍은 사진이다.
▲ 선교장의 23칸에 이르는 행랑채. 이 행랑채는 열화당을 찾는 손님을 물론, 선교장에 부른 각종 전문인력이 머문 곳이었다.
▲ 선교장의 사랑채 열화당. 같은 이름의 출판사는 선교장 후손이 운영한다. 차양의 지붕은 구리로 만든 것이다.

도성 한양을 기준으로 보면 강원도는 변방이다. 변방의 선교장이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접빈객’으로 ‘문화적 소통’을 추구해서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양반 유람 코스는 관동팔경과 금강산이었고, 그 길목에 있는 선교장은 환대를 통해 문화적 인맥, 요샛말로 네트워크를 유지했고, 중앙 정계와 선을 이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선교장은 절정기에는 손님용 밥상 소반만 300개가 넘었고, 머물다 떠나는 이들에겐 일일이 옷을 한 벌씩 만들어줬다고 한다. 그래서 옷 만드는 침모(針母)들이 쓰는 건물이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 이런 환대에 보답하고자 명필들이 선교장 곳곳에 글씨와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사랑채 열화당, 격조 높은 손을 모신 곳

 

순조 15년(1815)에 지은 사랑채 열화당(悅話堂)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기쁜[열(悅)] 이야기[화(話)]를 나누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이 낯설지 않은 것은 그렇다, 미술 전문 출판으로 유명한 열화당의 사장이 바로 선교장 사람이어서다.

 

열화당은 선교장의 사랑채 세 곳 중에서 가장 상석의 큰사랑으로 여기서는 선교장 주인이 직접 접대하는 중요한 손님이 숙식하고, 토론도 하고 잔치도 벌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열화당은 손님 가운데 격이 가장 높은 이를 모시는 사랑채였다는 얘기다.

 

그런데 열화당의 건물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건물 전면에 큰 차양을 단 것인데, 이는 외국 양식 같아 보이지만, 우리 전통 건축양식 중의 하나다. 창덕궁 연경당의 선향재의 경우 이보다 훨씬 큰 차양이 달렸다. 이 건물 차양의 지붕은 선향재와 마찬가지로, 선교장의 초청으로 방문했던 러시아 공사가 답례품으로 선물한 구리로 만든 것이다. [관련 글 : 창덕궁, ‘후원을 품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 사랑채에서 바라본 일각문. 오른쪽에 솟을대문이 있고, 건너편 일각문을 지나면 안채로 든다.
▲ 이씨 집안의 서고 겸 공부방으로, 그리고 맏며느리에게 살림을 물려준 할머니의 거초로 이용된 서별당.
▲ 서별당 앞의 ㄴ자형 건물인 연지당은 지금은 방과 마루로 되어 있지만, 최근까지도 열화당으로 통하는 통로와 곳간으로 사용되었다.

20세기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

 

사랑채를 되짚어 나와 다시 일각문을 지나면 선교장이 명품 고택으로 선정되면서 명품화한 ‘서별당(西別堂)’과 ‘연지당(蓮池堂)’이다. 전주이씨 가의 서재와 서고로 사용되었던 서별당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던 것은 1996년에 복원했다. 서고는 누마루 형식이어서 문을 열면 통풍이 잘되고 마루는 여름철, 방은 겨울철의 독서실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서별당 앞의 ㄴ자형 건물인 연지당은 지금은 방과 마루로 되어 있지만, 최근까지도 열화당으로 통하는 통로와 곳간으로 사용되었다. 당시의 철저한 남녀유별 풍속에 따라 전면 남서쪽에 안채와 사랑채 사이를 구획하는 벽돌 담장과 출입문이 있다.

 

안채는 1748년 처음 배다리에 전주이씨 가의 터전이 열리면서 지어진 건물이다. 오른쪽에 동별당, 왼쪽은 서별당과 이어져 있는데 집의 규모에 비하여 소박한 건물이다. 안채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따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내부로 들어서면 안채 앞쪽으로 안뜰이 있고, 그 뒤로 대청과 방, 우측에 방과 부엌이 있다.

▲ '오은고택'이란 현판의 동별당은 1920년에 지었는데, 안채와 연결된 별당으로서 주로 건물 주인이 거처하며 생활하던 곳이다.
▲ 선교장에서 가장 오래된 안채는 1748년 배다리에 전주이씨 가의 터전이 열리면서 지어진 건물로 규모에 비해 소박하다.

동별당(東別堂)은 1920년에 지었는데, 안채와 연결된 별당으로서 주로 건물 주인이 거처하며 생활하던 곳이다. 가족들 간의 단란을 위하여 이 집에 찾아오는 많은 친척이나 외척 등 내객과 접하는 공간으로 외부와 분리하도록 건축되었다. 동별당에는 한국 최고의 서예가로 꼽힌 김응현의 글씨로 쓴 현판 ‘오은고택(鰲隱古宅)’이 걸렸다. 오은은 선교장의 3대 주인이라고 한다.

 

본채를 돌아서 나오니 더위에 지쳐서 더는 돌 기력이 없다. 아이는 본채만 봐도 5천 원 입장료 값은 되겠다고 했다. 맞다. 선교장 둘레길을 도는 것도 괜찮겠지만, 더위 앞에 장사가 없고, 기다리는 사람 때문에 서둘러 선교장을 나서는데, 불볕에 정수리가 익는 듯했다. 엄벙덤벙, 결국 지난번에 이어 선교장 옆 김시습 기념관을 또 빼먹고 말았다.

 

 

2023. 8. 17. 낮달

 

 

[2023 여름 여행] ① 칠성조선소-그 조선소엔 속초와 실향민들의 현대사가 있다

[2023 여름 여행] ② 영랑호-“구슬을 큰 못에 담아 둔 것 같은호수와 범바위

 

참고

100칸 넘는 조선 살림집의 비밀은 족제비?(2012.6.15.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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