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 강원도 회갑 여행] ① 강릉의 솔향, 선교장과 경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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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월 중순에 나는 ‘회갑’을 맞았다. 올해는 병신(丙申)년, 60년 전 내가 태어난 잔나비 해가 한 바퀴 돌아 다시 온 것이다. 한 40~50년 전만 해도 소나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겠지만, 우리 가족은 모여서 밥을 한번 같이 먹는 거로 이날을 기념했다. 그리고 새로 시작하는 주초에 아내와 함께 강원도 여행을 떠났다.
제주도를 생각하다가 비행기와 숙소 등 이것저것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게 성가셔 포기하고 선택한 데가 강원도였다. 나는 강릉을 거쳐 설악산을 다녀오는 일정을 짰다. 그러나 내가 준비한 것이라곤 한 달 전쯤에 호텔 어플을 통해 첫째 날 숙소로 정동진의 리조트를 예약한 게 다였다. 첫날만 예약한 것은 어차피 평일이니 우리 한 몸 뉠 데가 없겠느냐 싶어서였다.
회갑에 떠난 강원도 여행
강원도는 경상북도와 붙어 있지만, 우리에게 그 심리적 거리는 서울과 다르지 않다. 그나마 서울은 열차든 고속버스든 곧장 이를 수 있지만, 강원도는 그 접근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하루 두 차례 강릉으로 운행하는 열차 편은 영동선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강릉역이 폐쇄되면서 현재 정동진까지밖에 운행하지 않는다. 이 열차로 정동진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거의 6시간에 가깝다.
그러나 강원도 도계와 가까운 안동에 살 때의 느낌은 좀 달랐다. 중앙고속도로에 차를 올려서 한 시간쯤만 달리면 원주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말에 두 차례나 강릉 여행을 시도한 것은 그런 셈속에서였다. 그러나 두 번 다 우리는 원주 지나 새말에서 차를 돌려야 했다. 한번은 교통 정체로, 또 한번은 심상찮게 날리는 눈발 때문이었다.
강릉이란 도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신사임당 얘기를 통해서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국어 시간에 배운 음운 현상으로 강릉을 다시 만났다. 강릉은 ‘자음접변’ 현상에 따라 ‘강능’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이다.
강릉이 구체적인 도시로 처음 다가온 게 우리 세대 대부분이 그렇듯 고교 수학여행을 통해서였다. 당시 수학여행은 대구에서 열차를 타고 강릉까지 간 다음 거기서부터는 전세버스로 설악산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기차에는 우리 학교뿐 아니라 일정이 같은 여학교 학생들도 타고 있었다.
학교별로 객차는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지만, 기차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진행할 때면 저쪽 앞 객차에 타고 있는 세일러복 여고생들을 볼 수 있었다. 급우들은 차창을 올리고 상체를 내밀어 여자아이들을 향해 거의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그럴 때 먼빛으로 바라본 저편 객차의 여학생들은 마치 우리가 생전 만나지 못했던 불가사의한 존재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내가 그 까마득한 과거의 장면을 불러내자, 아내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던 것 같아. 그리고 우리는 마치 더벅머리와 단발머리 고교생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으로 예국(濊國)의 땅, 하슬라(河瑟羅)로 들어갔다. 집에서 출발한 지 4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고교 수학여행의 기억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내가 그린 여정은 단순했다. 나는 이곳저곳 기웃대는 여행 대신 한두 군데 집중하는 여정을 짰다. 물론 머릿속에서만이다. 출발 전에 강릉시에 신청해 ‘강릉 관광 안내 책자’도 받았지만 나는 선교장과 경포대, 난설헌 생가터, 정동진과 안목항의 커피 거리 정도를 찾을 작정이었다.
여행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느긋하게 여행을 즐기는 법이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거라는 걸 깨닫고 있어서였다. 시간 단위로 여정을 짜는 바람에 일정에 떠밀리듯이 다니는 여행이란 다만 일상의 연장에 그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일정에 얽매이지 않고 여유롭게 보고 즐기되 필요하면 한두 일정쯤이야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여정마다 인증 도장을 받아야 하는 숙제도 아니니 발걸음은 한층 가볍지 않겠는가. 여정을 마칠 때마다 차의 시동을 걸어놓고 우리는 다음 여정을 합의하곤 했다.
선교장(船橋莊) 주차장에 닿았을 때 해가 머리 위에 있었다. 아내는 한눈에 들어오는 선교장의 규모에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예전엔 집 앞이 경포호수였으므로 배로 다리를 만들어 호수를 건너다녔다. 이 유서 깊은 전통가옥에 ‘배다리[선교(船橋)]’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이다.
이 저택은 효령대군의 후손인 입향조 이내번(1692~1781)이 들어와 안채 주옥(住屋)을 지은 이래 100여 년 동안 꾸준히 건물을 늘렸다. 열화당(悅話堂), 별당, 중사랑, 행랑채를 짓고 1816년에는 활래정(活來亭)과 연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어 마침내 선교장이 완성되었다.
대장원 ‘선교장’과 뒷동산 둘레길
‘대궐 밖 조선에서 제일 큰 집’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전형적인 양반 상류 주택 선교장의 규모는 엄청나다. 현재 남아 있는 본채의 규모는 건물 9동에 총 102칸이며, 건평은 318평에 이른다. 근방에 있던 부속 건물과 별채 초가까지 포함하면 대략 300칸에 이르는 대장원(大莊園)을 형성하고 있다.
관동팔경과 경포대를 유람하는 선비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는 23칸의 행랑채, ‘줄행랑’의 규모는 이 만석꾼 반가가 일상적으로 치른 접빈객(接賓客)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하게 할 정도다. 안채와 사랑채, 별채와 부속채 등으로 이루어진 만만찮은 건물군 앞에 입이 벌어지는데 아내가 또 삐딱선을 탔다.
“아이고, 팔자 좋아서 이런 고대광실에서 위세 부리고 사느라 하인들 골병을 좀 들였을까.”
지난봄, 로마의 고대 건축물 앞에서 탄식하던 아내의 버릇이 또 나온 게다. 젊을 때 같았으면 ‘관점 좋다’고 받았을 테지만 나는 은근히 아내의 심드렁한 심사를 달래느라고 이 만석꾼 부호의 상생 철학을 불러냈다.
“그려. 그래도 이 댁의 만석꾼 주인들은 소작인들이 배고프지 않게 하는 상생을 원칙으로 삼았다는구먼. 일제 강점기 때엔 독립운동자금을 은밀히 지원했으며,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곳간을 열어 수천 석의 쌀을 내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니까…….”
나는 개인적으로 선교장보다는 큰 사랑채인 ‘열화당’을 먼저 알았다. 물론 그것은 이 선교장의 큰 사랑채가 아니라 미술과 사진, 전통문화 관련 서적을 펴내던 출판사였다. 열화당은 1980년대에 ‘한국의 굿’ 시리즈를 냈고, 나는 한동안 그 책에 푹 빠져서 지냈다.
열화당이 선교장의 사랑채라는 것, 도서출판 열화당의 이기웅 대표가 선교장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이 대표는 열화당을 ‘선교장이라는 거대한 장원의 사랑채요, 일종의 도서관’이라고 했다. 선교장은 강원도 최고의 장서가로, 일반인들에게 이를 개방함으로써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대를 이어 문집과 저서를 저술하고 출판하였다고 한다.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가운데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 가까운 이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는다)에서 따온 것이다. 영동지방 선비들이 묵었던 이 사랑채가 수천 권의 서책을 갖춰 놓고 문집과 족보를 찍어내고 필사했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기다란 행랑채 너머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안채와 바깥채, 별채 등 미로 같은 집안을 빠져나와 뒷산 소나무 숲으로 오른다. 선교장의 전경을 아우르고 저 멀리 들판까지 내려다보이는 이 둘레 길을 아내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곧게 자라 하늘로 솟은 풍채 좋은 솔숲을 산책하며 눈 아래 내려다뵈는 고택의 운치를 즐기는 것은 선교장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여정이라 해도 좋다. 야트막한 언덕으로 오르는 넓적한 돌계단과 군데군데 세운 낮은 키의 가등(街燈)도 좋았다. 아내는 살림집은 전혀 부럽지 않은데, 이 뒷동산이 탐난다고 했다.
강원도의 소나무, 강릉의 ‘솔향’
그리고 2박 3일간 강원도를 오가면서 우리는 이 지역의 소나무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소나무야 이 나라 어디에도 있다. 그러나 여타 소나무 가운데 으뜸은 태백산맥 동부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강송(剛松, 또는 금강송)인데, 우리가 강원도에서 일상으로 목격한 것이 바로 이 강송이었다.
특히 강릉은 우리나라 소나무의 대표적 자생지 가운데 하나다. 나는 무심코 보아 넘긴 ‘솔향 강릉’이 강릉의 도시 브랜드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관광 휴양도시와 소나무의 고장 강릉의 가치를 표현’했다는 이 도시 브랜드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첫날의 마지막 여정은 경포대(鏡浦臺)였다. 내비게이션이 잠깐 헛갈리는 바람에 경포를 두 바퀴나 돌아 닿은 경포대 앞에서 아내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앞면과 옆면이 각각 5칸인 팔작지붕 누대(樓臺)는 호수 옆 도로가 언덕에 육중하게 서 있었다.
혼란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경포대라고? 분명 20여 년 전에 아이들 수학여행을 인솔해 다시 찾은 곳이었다. 그런데 호숫가에 바투 붙은 게 아니라 일주도로 이편 언덕바지에 올라앉은 이 정자가 경포대라고? 아내는 몹시 심란해하는 표정이었다.
“분명 난간에서 바로 아래 호수를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은 것 같은데…….”
고교 수학여행 때의 기억과 현실과의 간극은 사십몇 년의 시간만큼이나 멀어 보였다. 내 기억도 애매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분명 왔다 간 곳인데도 그 위치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왜 이다지도 심할까. 분방했던 젊음의 기억은 본래 믿을 수 없는 것일까.
강릉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외지인들은 경포호와 경포대, 바다와 호수, 정자 따위를 마구 섞어서 기억한다. 경포호(鏡浦湖)는 바다와 이어지는 자연 석호(潟湖), 즉 사취(砂嘴), 사주(砂洲) 등에 의하여 바다와 거의 분리되면서 생긴 호수다. 거울(경(鏡))같이 맑고 깨끗하다는 이 호수의 물은 바다로 흘러든다.
경포대는 그 호숫가에 세운, 기둥이 48개나 되는 대형 누각이다. 일찍이 송강 정철은 경포대를 관동팔경의 으뜸이라 기렸고 가사 ‘관동별곡’에서는 경포호를 “십 리나 뻗쳐 있는 얼음같이 흰 비단을 다리고 다시 다린 것 같은 / 맑고 잔잔한 호숫물”이라 노래했다.
경포대와 40년 세월, 그 기억의 편차
경포대에 올라서도 아내는 기억의 간극을 부른 세월을 돌이키며 무언가 마뜩잖아 보였다. 40여 년 전의 기억이 초로의 시간을 환기해 주었던 것일까. 나는 수학여행을 떠나던 1972년, 단발머리의 소녀를 상상해 보았다.
해가 설핏 기울어진 시간, 혼잣말로 오늘은 달이 뜰까, 하고 중얼댔더니 아내가 이번 달은 음력과 양력이 같이 간다고 말해 주었다. 닷새 뒤면 보름이니 오늘도 달은 제법 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아내에게 뻔한 질문을 했다.
“경포대에 뜨는 달이 몇 갠지 알지?”
“다섯 개 아니우.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그렇다. 경포대에 오르면 다섯 개의 달을 만날 수 있다는 것쯤은 우리 세대에는 진부한 얘기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에게 이는 별로 익숙한 얘기가 아니다. 하늘과 호수, 바다까지는 쉽게 맞히지만, 나머지는 아이들의 경험 영역에선 생소하다. 같은 질문을 던져도 남학생과 여학생의 반응이 다르다.
사내아이들은 가끔 ‘술잔의 달’을 맞힌다. 글쎄, 내 기억에 마지막 답을 맞히는 아이는 만나지 못한 것 같다. 얼마간 뜸을 들이다가 ‘그대 눈동자에 뜬 달’이라고 알려주면 사내애들은 씨익 웃고 말지만, 여자아이들은 자지러지는 것이다.
나는 잠깐 1997년도의 수학여행을 함께 한 시골 고등학교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 아이들과도 이 누대에 올랐을 터인데도 내겐 그 기억이 까맣다. 1학년에 이어 3학년에도 담임으로 만났던 아이들과는 졸업 후 10년째인 2008년에 하룻밤을 같이 했다(관련 글 : 그 아이들과의 10년, 1998에서 2008까지). 그리고 그들도 어느새 마흔을 앞두고 있다.
아이들은 아마도 내가 교직을 떠난 것을 알지 못하리라. 그러고 보면 내 삶은 온통 아이들과 함께한 기억의 축적으로 점철되어 있다. 나는 떠난 뒤 처음으로, 잠깐 학교가, 아이들이 그리워졌다. 나는 난간에 기대어 호수를 바라보면서 그런 기억의 편린을 떠올리고 있었다.
땅거미가 내리고 있는 호수를 등지고 우리는 천천히 경포대를 내려왔다. 다음은 강릉 시내를 빠져나오면서 우리 내외가 나눈 수작이다.
“이제 숙소로 가는 거지? 정동진으로?”
“그래. 언제 같이 거기 간 적이 있지? 기차를 타고…….”
“아니. 난 처음이야. 당신 다른 사람과 가놓고 그게 나라고 착각하는 거 아니우?”
“아닌데…….”
“아니긴 뭘 아니야. 곧이곧대로 말해도 돼요.”
아내든 나든, 기억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나는 정말로 억울해서 ‘아닌데’만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2016. 11. 21. 낮달
[2박3일 강원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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