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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둘에 처음 만난 가야산 해인사, 40년 만에 다시 찾다

by 낮달2018 2023.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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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 답사기(2017.5.24.)] 법보종찰, 화엄십찰, 해인총림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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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 말사와 16 부속 암자를 거느린 해인사는 조계종의 '선원 강원 율원 등을 갖춘' 8개 총림 가운데 하나다. <현대불교신문> 사진

절에 다니는 사람이 전혀 없는 집안에서 불교는 물론, 모든 종교와 무관하게 자랐지만, 어릴 적부터 귀에 익은 절집이 불국사요, 해인사였다. 불국사는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가보았지만, 해인사는 말로만 듣던 절이었다. 부모님과 동네 어른들은 단체로 버스를 ‘대절(貸切かしき: 전세의 일본식 표현)’하여 ‘합천 해인사’ 구경을 가기도 했다.

 

스물둘에 만난 해인사, 46년 만에 다시 찾다

 

초등학교에서 팔만대장경을 소장한 법보사찰이라는 걸 배우면서 해인사는 우리와 좀 더 가까워졌다. 지금도 승용차로 가도 두 시간이 넘어 걸리는 곳이니 당시엔 훨씬 먼 곳이었을 텐데도 해인사를 멀지 않은 절이라고 여겼던 것은 같은 경상도에 있으니 심리적 거리로 이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해인사를 찾은 것은 스물두 살, 입대를 앞둔 봄이었다. 1977년 4월이었고, 애인과 함께 버스를 타고 들른 절 앞에서 우리는 산나물비빔밥을 먹었고, 학사대 전나무의 아름다움에 탄복했다. 그다음 달에 나는 입영열차를 탔고, 33개월간의 군대 밥을 먹었다. 그때의 애인은 지금 나와 함께 40년째 살고 있다.

▲ 해인사 학사대. 최치원이 대적광전 주변에 작은 정자를 짓고 지낼 때 자신의 벼슬 이름을 따 학사대라고 이름 붙인 곳이다.

해인사는 서기 802년 10월,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의상대사(625~702)의 법손인 순응 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 화상이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 자리에 창건하였다. 의상은 우리나라에 화엄 사상을 본격적으로 전하여 크게 융성시키고, 나아가 우리나라 불교 최초의 종파로 화엄종(華嚴宗)을 자리 잡게 하였기 때문에,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로 기려진다.


 ‘해동화엄초조 의상을 이은  ‘화엄십찰의 하나

 

의상 문하에서 수천 명의 제자가 배출되었다고 전하는데, 그는 전국에 ‘화엄십찰(華嚴十刹)’을 비롯하여 많은 절을 창건하여 불교의 융성을 가져왔다. 해인사도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하고자 세워진 화엄십찰 가운데 하나다. 화엄종은 개화기였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대사를 위시하여 고려의 균여, 의천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러 본격적인 종파로서 발전하였다.

 

해인사는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와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해(海)]에 비치는[인(印)] 경지를 이른다. 이러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창건 이후 해인사의 중창에 관한 기록은 최치원이 <신라 가야산 해인사 결계장기(結界場記)>, 고려 건국 초기의 <균여전> 등에 보인다. 조선 태조 때 장경판(藏經板)이 해인사로 옮겨지고부터 해인사는 법보종찰로 유명해졌다. 해인사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시기는 대체로 성종 12년(1481)에서 21년(1490) 사이라고 본다. 조위가 쓴 <해인사 중수기>(1491)에 1490년까지 많은 전각과 요사 등 160여 칸을 완성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러나 해인사에는 조선 숙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2백여 년간(1695~1871) 7차례나 불이 나서 건물 대부분이 타버렸고, 지금의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세운 것들이다. 지금 절에는 일곱 번의 큰 화재에도 피해가 없는 고려대장경판을 비롯하여 장경판전, 반야사지원경왕사비, 석조여래입상, 원당암다층석탑과 석등, 합천치인리마애불입상 등 국가지정문화재가 국보가 6, 보물이 18점에 이른다. [소장 문화재 참조]

▲ 해인사 소장 국가지정문화재. 자료 : 문화유산포털
▲ 해인사 경내 안내도. 해인사 누리집의 자료를 재구성했다.

어렸을 때 어른들은 ‘합천 해인사’라고 부르곤 했지만, 해인사는 조선팔경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신령스러운 산‘가야산’(1,430m)에 깃들인 절이다. 가야산의 돌과 물, 붉은 솔숲은 다른 절이나 명산에서도 보기 힘든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해인사를 다시 찾은 때는 퇴직한 이듬해인 2017년 5월이다. 동네 도서관에서 여는 인문학 강좌로 지역의 명승을 답사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마침 해인사 탐방이 있었던 것이다. 15인승 승합차로 해인사에 닿았는데, 따로 강의 없이 자유 시간을 주어 절집을 돌아볼 수 있었다. 뒤늦은 답사기로 송림사 편을 쓰고 난 뒤에 해인사 편을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 해인사로 드는 길. 워낙 유명한 절이라 입구까지 아스팔트가 깔렸지만, 길가의 울창한 숲은 신록으로 싱그러웠다.
▲ 해인사 입구의 비림. 비석이 숲을 이룬 곳인데, 고승의 빗돌과 승탑 따위가 모아져 있다.
▲ 가야산 해인사의 산문(일주문).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일주문이다. 오른쪽에 당간지주가 보인다.
▲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 편액은 근대 서예가 해강 김규진이 썼다. 해강은 대적광전의 현판도 썼다.

승합차에서 내려서 성보박물관을 거쳐 산문으로 드는 건 함께였지만, 나머지는 저마다 두셋씩 짝을 지어 경내로 흩어졌다. 워낙 이름난 절집이니 산문 앞까지 포장도로가 났지만, 주변 숲은 5월의 무성한 신록으로 싱그러웠다. 승탑과 비를 모아놓은 비림을 지나자 저만큼 앞에 일주문이 나타났다.

 

명산 가야산에 깃든 법보사찰 해인사

 

설악산 신흥사나, 하다못해 구미 도리사에 비겨도 법보사찰 해인사의 일주문은 그저 소박하다 못해 소담스럽다. 산문 앞에 자연석으로 쌓은 나지막한 축대 위 양옆에는 당간지주가, 일주문은 또 다른 돌계단을 낸 축대 위에 서 있다. 근대 서예가 해강 김규진이 쓴 현판이 단정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봉황문과 해탈문을 거쳐 경내에 이르는 길 양쪽 수로 옆으로 고사목과 함께 아름드리나무가 깊고 두꺼운 그늘을 이루고 있었다. 봉황문의 처마 아래 달린 거대한 현판은 ‘해인총림(海印叢林)’이다. 맞다, 말사 172개와 부속 암자 16개를 거느린 해인사는 조계종 산하의 송광사·통도사·수덕사·백양사·동화사·쌍계사·범어사와 함께 ‘선원·강원·율원 등을 모두 갖춘 사찰’인 8개 총림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해인사의 만만찮은 전통과 역사, 위상과 이어진 지위일 터이다.

▲ 일주문에서 봉황문으로 가는 길. 오른쪽 수로 옆에 느티나무 고사목이 보인다.
▲ '해인총림' 편액이 붙은 봉황문. '천왕문', '금강문'으로도 불리는 문이다. 통로 양옆에 사천왕 탱화가 그려져 있다.
▲ 봉황문 앞에서 뒤돌아본 일주문. 통로가 꽤 길고 주변의 고목들이 연출하는 풍경이 아름답고 고즈넉하다.
▲ 해인사의 세 번째 문인 해탈문. 본당으로 들어서는 마지막 문으로 '불이문'으로도 불린다. '해동원종대가람' 편액이 걸렸다.
▲ 왼쪽이 범종각, 오른쪽 누각이 구광루다. 구광루는 1993년에 재건축하면서 누각 기능을 없애버려 좌우의 작은 쪽문으로 드나들어야 한다.
▲ 강당으로 쓰이는 구광루 앞은 대웅전 앞 경내처럼 별도의 공간이 있다. 구광루는 앞면 7칸, 옆면 4칸 규모의 중층 맞배지붕 건물이다.

봉황문까지는 평지지만, 해탈문은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처마 아래 ‘해동원종대가람(海東圓宗大伽藍)’이란 편액이 걸렸고, 해탈문 현판은 안쪽 서까래 아래에 걸렸다. 해탈문을 지나면 법보종찰 해인사 경내로 마침내 진입하는 것이다.

 

화엄 사찰 해인사의 ‘비로자나불’

 

트인 너른 뜰 저편에 앞면 7칸, 옆면 4칸 규모의 중층 맞배지붕 건물인 구광루가 서 있다. 해인사 개창 당시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지금의 건물은 1993년에 재건축하면서 누각 기능을 없애버려 좌우의 작은 쪽문으로 드나들어야 한다. 강당으로 쓰이면서 구광루 앞은 대웅전 앞 경내처럼 별도의 공간이 있다.

 

앞뜰에는 왼쪽에 범종각, 오른쪽은 불사에 집회장과 법당으로 쓰이도록 설계된 불교회관 보경당이다. 1977년에 들를 때는 옛 누각 중앙을 통과했는데, 거기 기념품도 파는 서점이 있었었다. 나는 오동나무로 만들었다는 연필꽂이를 샀는데, 그건 지금도 내 서가 한쪽에 얹혀 있다.

 

왼쪽 쪽문을 지나 해인사의 중심 법당 대적광전 앞뜰로 오른다. 해인사는 화엄경 중심 사찰이기 때문에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신 대웅전이 없고 화엄 세계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 주 법당이다. 현 건물은 1817년(순조 17) 건립한 것으로 내부에 봉안된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상·보현보살상 등 비로자나불 삼존상은 보물로 지정됐다.

 

1996년 9월에는 비로자나불상 등에서 1326년(충숙왕 13)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 의복, 인도의 고승 지공이 고려의 제자인 각경에게 내린 계첩(불교의 수계식 이후에 계를 받았음을 증명하는 신표)인 <문수최상승무생계법>을 비롯한 여러 유물 등은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 전적이란 이름으로 일괄 보물로 지정됐다.

▲해인사는 화엄경 중심 사찰이므로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신 대웅전이 없고 화엄 세계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 주 법당이다.
▲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건립된 해인사 3층석탑. '정중탑'이라고도 불린다. 왼쪽이 구광루, 오른쪽이 궁현당이다.
▲ 건물은 1817년(순조 17) 건립한 것으로 내부에 봉안된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상 보현보살상 등 비로자나불 삼존상은 보물로 지정됐다.
▲ 대적광전의 오른쪽 측면에 붙은 금강계단. 금강계단은 불사리를 모신 곳으로, 불교에서 계를 수여하는 의식을 진행하는 의례 공간이다.
▲ 대적광전에서 내려다본 뜰. 관음전(왼쪽)과 궁현당 앞에 불두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 대적광전의 왼쪽 측면에는 '법보단' 현판이 붙어 있다.

대적광전의 현판과 동서쪽과 뒤편에 각각 걸린 현판 ‘금강계단(金剛戒壇)’, ‘법보단(法寶壇)’, 그리고 ‘대방광전(大方廣殿’ 현판은 모두 일주문 편액을 쓴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금강계단은 불사리(佛舍利)를 모신 곳으로, 부처님이 그곳에 상주하고 있다는 상징성을 띠는 곳으로 불교에서 계를 수여하는 의식을 진행하는 의례 공간이다.

 

대적광전 앞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3층석탑은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리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건립된 석탑이다. 정중탑이라고 하나 그 앞 석등과 함께 실제로는 대적광전의 중심축에서 오른쪽으로 비껴 있다.

 

앞뜰 동서에서 마주 보고 있는 관음전과 승가대학(강원)의 교사로 사용되는 궁현당(窮玄堂) 앞에 불두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깊고 오묘한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의 궁현당은 달리 ‘부처를 가려 뽑는 곳’이라는 뜻의 선불장(選佛場)이라 불리기도 한다.

 

추억의 학사대 전나무, 그리고 8만대장경을 보관한 장경판전

 

대적광전 왼쪽 장경판전 쪽의 축대 아래 비로전을 지나 뒤꼍으로 오르면 야트막한 언덕이 학사대(學士臺)고, 거기 선 수령 250년의 전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신라시대 최치원(857~?)이 대적광전 주변에 작은 정자를 짓고 자신의 벼슬 이름을 따 학사대라고 이름 붙인 곳이다. 그가 이곳에 지팡이를 꽂았는데 그게 자라 전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고운이 심은 전나무의 손자뻘이 되는 ‘합천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는 201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2019년 태풍으로 전나무가 부러지면서 그 생물학적 가치를 잃어 이듬해 문화재 지정을 해제하였다고 한다. 전나무 아래 ‘스승 없이 혼자서 깨친 성자(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獨聖閣)이 있다. 독성은 말세 중생의 복덕을 위하여 나타난다고 하여 복을 희구하는 불자들의 경배 대상이 되고 있다.

▲ 학사대 앞 독성각. 독성은 '스승 없이 혼자서 깨친 성자(나반존자)'를 모신 곳으로 독성은 불자들의 경배 대상이다.
▲ 학사대의 전나무. 최치원이 꽂은 지팡이에서 자랐다는 나무의 손자뻘인데, 2012년에 천연기념물이 되었으나 태풍 피해로 해제되었다.
▲ 장경판전. 앞면 15칸, 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 장경판전의 뒷 전각 법보전. 법보전에 모신 목조비로자나불 좌상과 복장유물은 국보가 되고, 복장 전적은 보물이 되었다.
▲ 마주 보고 있는 수다라장(왼쪽)과 법보전. 장경판전은 해인사에 남은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는데, 임진왜란에도 피해가 없었다.
▲ 13세기에 제작된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기 위해 지어진 목판 보관용 건축물 장경판전. 15세기에 건립되었다. ⓒ 위키백과

독성각을 지나면 비로전 뒤편에 길쭉하게 늘어선 전각이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 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이다. 처음 지은 연대는 알지 못하나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은 장경판전은 해인사에 남은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는데, 임진왜란에도 피해가 없었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어서 해인사는 ‘법보사찰’이 되었다.

 

앞면 15칸, 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칸마다 창을 내었고,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 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장경판전의 과학’, 세계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공기흐름과 지하 구조, 인공 설비 없이도 바람이 잘 통하고 습도가 자동 조절된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구조여서 지금까지 대장경판을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해인사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대장경판과 고려 각판을 포함하여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팔만대장경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각각 등재되었다.

 

해인사는 소속 승려들도 들어가지 못하는 장경판전 내부를 고려대장경 초조본(初造本) 판각이 시작된 1011년부터 1000년이 되는 2011년에 개방했었다. 장경판전은 칸마다 위아래에 하나씩 살창이 있는데 서로 크기가 다르다. 건물 앞면은 위 창이 작고 아래 창이 크고, 뒷면은 그 반대여서 밖에서 들어온 공기가 건물 내부를 한 바퀴 돌아 나가는 대류 현상이 일어나므로 인공 설비가 전혀 없는데도 통풍과 환기가 완벽하다는 게 증명되었다.

▲ 대적광전 옆 비로전. 이 건물은 2007년에 '대비로전'으로 세워졌는데, 2017년에는 '비로전' 현판이 달려 있었다. 왜?

글을 쓰면서 확인해 보니 경내 전각에도 변화가 있다. 대적광전 옆 비로전은 2007년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을 모실 전각 ‘대비로전’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마 개축한 듯한데, 이 전각에는 법보전 비로자나불과 똑같은 모습과 크기의 대적광전 비로자나불도 함께 모셔졌다.

 

대비로전은 각종 재난에도 불상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도록 최첨단 설비를 갖추었다고 한다. 화재에 대비한 열 감지기, 지진을 예견하는 진동 측정기 등 첨단장비가 설치돼 있어 유사시 지하 6m 깊이의 별실로 자동으로 내려보내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스무 장 이상의 사진을 골랐지만, 내가 쓴 해인사 이야기는 시작하다가 만 느낌이다. 말사 172개와 부속 암자 16개를 거느린 해인사의 산내 암자 중 유서가 깊거나 규모가 큰 것은 신라 왕실의 원찰(願刹)로 전해지는 원당암을 비롯하여, 고불암·고운암·금강암·길상암·백련암·보현암·지족암·희랑대·홍제암 등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아니 경내 전각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 해인사의 국가지정문화재들. 모두 24점에 이르니 해인사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 해인사를 나오다 만난 스님. 비구니인 듯한데, 기억이 아련하다.

그뿐인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24점의 국보와 보물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물론, 미리 공부하지도, 찬찬히 살펴보지도 않고 떠나고, 돌아와서야 뉘우치는 오래된 버릇 탓이다. 6년도 전의, 흐려진 기억을 되살리며 절집을 더듬는 일이 쉬울 리 없지 않은가.

 

언제쯤 단풍이 불타는 가야산의 가을을 만날 수 있을지는 기약하기 어렵다. 엄살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언제나 무한대인 것은 아니니 말이다. 여름의 막바지, 늦더위를 견디며 46년 전, 학사대 전나무 주변에 불던 선선한 봄바람을 생각해 본다.

 

 

2023. 8.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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