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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보길도, 잃어버린 젊음과의 조우(遭遇)

by 낮달2018 2019.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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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만에 다시 찾은 섬, 보길도

▲ 땅끝마을의 해돋이. 우리는 땅끝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보길도 가는 배를 탔다.

대저 여행의 묘미는 ‘떠남’에 있다. 그것은 일상과 그 책임으로부터, 삶과 일터의 갖가지 곡절과 그 완고한 도덕률로부터의 ‘이탈’이고 ‘격리’이다. 실명의 드러난 삶에서 익명의 숨겨진 삶으로의, 아주 자연스러운 자리바꿈이다. 차표를 사거나, 가방을 챙기고 승용차의 시동을 거는 순간, 낯익은 거리와 골목, 오래 알아 온 사람과 사람, 익숙한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일탈이 시작되는 것이다.

 

열여덟 해 전에 그랬듯, 아내와 함께 나는 보길도를 향해 길을 떠났다. 낡은 승용차에 내비게이션을 달고 딸애의 배웅을 받으며 익숙한 도시를 빠져나오면서 아내는 얼마나 설레었을까. 보리암, 향일암, 선암사, 보성 차밭 같은 목적지들과는 달리 보길도는 아내는 물론이거니와 내게 각별한 추억의 섬이다. 그 섬을 다시 만나는 것은 어쩌면 ‘잃어버린 젊음과의 조우(遭遇)’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1989년은 어떤 이에게는 80년대의 마지막 해겠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곡절 많은 시대로 그 아픔으로 기억될 게다. 그해 4월에는 문익환 목사가, 6월에는 ‘통일의 꽃’으로 불리는 임수경이 정부의 허가 없이(!)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통일운동의 새 물꼬를 텄으니 말이다. 5월 말에는 여러 난관을 뚫고 30여 년 만에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의 기치를 걸고 자주적 교원조직이 만들어졌다.

▲ 해남읍의 식당.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었다. 손님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우리는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땅끝에 가서 묵었다.

그해 내내 기승을 부린 매카시즘으로 일관한 나라 안 상황을 ‘공안정국’이라 불렀고, 그 얼어붙은 정국을 정면으로 돌파해 나간 이들이 6월부터 9월까지 학교에서 쫓겨난 1천5백여 명의 교사들이었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예의 ‘대학살’ 전후에 얽힌 이야기는 보따리를 풀면 능히 수십 권의 소설을 쓸 수 있으리라.

 

그해 8월 23일, 나는 동료 한 명과 함께 몸담고 있던 한 가톨릭 재단의 남자 고등학교로부터 해임 통보서를 받았다. 새삼 옛이야기를 시시콜콜히 하는 건 구차할 듯하다. 파면이 아니라 해임이어서 퇴직금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었다. 뗄 거 떼고 6, 7백만 원쯤 되었는데, 철없는 나이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부자가 된 기분이어서 기분이 묘했던 게 기억난다.

 

아이들은 어려서 큰 애가 일곱 살, 작은놈이 네 살, 어느 날 새벽에 깨어났는데, 잠든 아내와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사나…….’ 걱정이 밀려와서 바깥에 나가 줄담배를 피웠던 기억도 선명하다. 그러나 역시 젊었던 모양이다. 금방 기운을 차리고 조직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94년 복직할 때까지 조직을 떠나지 않았다.

 

같은 학교에서 해임된 친구는 같은 국어과의 장 선생이었다. 본관이 같은 인동(仁同)이었는데, 항렬로 치면 조항(祖行)이었다. 나보다 1살이 많았고 해학과 익살로 좌중을 흔드는 이였다. 조직관이나 생각들이 비슷해서 이후 복직할 때까지 어려움을 함께해 지금도 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 세연정의 동백꽃. 보길도에는 동백나무숲이 좋았다. 내륙에는 만나기가 드문 동백을 지천으로 만날 수 있는 것도 여행의 묘미다.

그해 9월, 무슨 바람이 불었나. 우리는 마누라와 함께 보길도를 다녀오기로 했다. 난데없이 웬 보길도였는지 모르겠다. 아마 우리가 국어과 교사여서일 것이다. 이름 붙이기를 좋아해서 ‘해직 기념 여행’이라고 둘러댔는데, 피차간 식구들 보기도 민망하니 위로할 겸 여행이나 다녀오자고 나섰던 것 같다.

 

요즘처럼 승용차가 흔할 때가 아니었다. 일행 넷은 대구에서 버스를 타고 광주로 갔고, 거기서 다시 해남행 버스를 탔다. 해남 대흥사를 들렀다고 하는데(이 친구에게 전화해 확인한바, 그 부인의 기억이다.) 거짓말같이 기억에 없다. 해남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완도에서 배를 탔다.

▲ 세연지(洗然池). 워낙 오래전에 다녀온 데라 정면 사진은 아무리 찾아봐도 마땅한 게 없다. <위키백과>의 사진이다.
▲ 세연정 서쪽의 연못은 인공으로 만든 회수담이다.자연 연못인 계담의 물이 세연정 옆 물구멍을 통해 인공 연못인 회수담으로 흘러간다.

이번 여행은 땅끝마을에서 배를 타고 귀로는 완도로 잡았다. 해남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인터넷에서 일찌감치 검색해 놓은 ‘주막 식당’에서였다. 정식을 먹었는데, 반찬이 정갈하고 맛이 있었다. 술을 들고 있던 손님들과 잠깐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영남에서 온 여행객을 대하는 이들은 친절했고 조심스러웠다. 땅끝에 가서 주무시고 일찍 배 타는 게 훨씬 낫지라.

 

보길도에 도착한 것은 10시께였다. 18년 전에는 오후에 도착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을씨년스럽게 비를 맞으며 세연정 유적지를 돌아봤고 트렁크에 가정용 LP가스를 장착한 낡은 택시를 타고 섬을 돌았었다. 하룻밤을 묵었던 예전과는 달리 12시 배를 타기로 하고 내처 세연정 쪽으로 차를 몰았다.

▲ 보길도 윤선도 원림(甫吉島尹善道園林)은 대한민국의 명승 제34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 세연정(洗然亭)은 고산 윤선도가 연회를 즐기던 정자로 제법 규모가 크다. 분합문이 높다랗게 걸려 있다.
▲ 세연은 '물에 씻은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상쾌해지시라'는 뜻. 세연지에 비친 동백 그림자와 낙화 .

보길도는 마치 고산 윤선도(1587∼1671)로 말미암아 존재해 온 섬 같다. 병자호란 이후 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리려 제주도로 가던 중, 상록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섬에 터를 잡았으니 바로 보길도였다 한다.

 

고산은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 하여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낙서재(樂書齋)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두어 차례 떠나 있기도 했으나 85세로 삶을 마칠 때까지 그는 이 섬에서 ‘오우가’, ‘산중신곡’, ‘어부사시사’ 등의 자연을 노래한 숱한 작품을 남겼다.

 

세연정(洗然亭)은 담양의 소쇄원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별서정원(別墅庭園, 세속의 벼슬이나 당쟁을 떠나 자연에 귀의하여 전원이나 산속 깊은 데 집을 지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려고 만들어 놓은 정원)이다. 조선조에 육지도 아닌 섬에다 이 정도 규모의 별서정원을 꾸밀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곧 해남 윤씨 종손이었던 고산의 경제력과 권력을 엿볼 수 있겠다.

▲ 복원 공사 중인, 서실을 갖춘 살림집인 낙서재(樂書齋) 앞의 버들강아지밭 .

<보길도지>에 고산이 연못 중앙에 배를 띄우고 기녀들이 노래하고 춤추게 했다 하여 가난한 섬사람의 삶을 대비시키기도 하는데 한국의 전통정원에 관한 책(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 다른세상, 2005)을 통해 미술사학자 허균은 이를 유교적 세계관으로 설명한다. ‘시(詩)와 성(聲)·음(音)·악(樂)은 일치하는 것’이어서 고산에게 있어 ‘음악은 마음을 닦고 시정을 더욱 깊고 오묘하게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날씨는 올겨울 들어 가장 맵고 찼다. 사진기를 든 손이 시려 대충 셔터를 눌러댈 수밖에 없었다. 초행 때와 달리 윤선도 유적지 세연정 주변은 잘 정비되어 있었고,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비 내리는 세연정 주변을 돌면서 우리는 ‘고산의 부’를 비꼬았던 듯하다.

 

유적지를 둘러싼 울타리는 동백나무였다. ‘선운사 동백꽃’을 생각하고 나는 그게 3월 이후에나 피는 줄 알았는데 남도여서인가, 이르게 핀 동백꽃이 혹독한 날씨에 새파랗게 얼고 있었다. 한 바퀴 돌고 나오는데, 들어갈 때는 보이지 않았던 웬 할머니 한 분이 미역과 멸치 등 해산물을 늘어놓고 추위에 떨고 있었다. 양반님네들의 풍류는 내 것이 아니요, 삶은 이렇듯 고단한 것. 아내는 멸치 한 상자와 미역 두 장을 샀다.

▲ 예송리 바닷가. 활처럼 휘어진 검은 갯돌 해변과 천연기념물 상록수림이 바람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 예송리 해변 풍경. 몇 척의 배가 떠 있었고, 가까운 바다는 모두 그물 부표로 촘촘했다.

산 위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예송리 바다는 잔뜩 흐렸다. 몇 척의 배가 떠 있었고, 가까운 바다는 모두 그물 부표로 촘촘했다. 활처럼 휘어진 검은 갯돌 해변과 상록수림이 바람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부지런한 안노인 둘이 해산물 보퉁이를 안고 나오다 사란다. 저쪽 세연정에서 벌써 샀는데요. 아, 거기보다 이게 좋은 건게 사 가슈. 아내는 다시 다시마 몇 장을 샀다.

 

18년 전에 우리는 세연정 근처의 민박집에서 묵었다. 푸근한 인상의 주인 아낙 음식 솜씨가 좋아서 저녁과 아침을 달게 먹었던 기억이 뚜렷하다. 김 파래 자반 볶음이 아주 맛이 있었다. 선창으로 가는 길목에 보길도 중학교가 있었다. 마치 모교라도 찾아온 것처럼 목을 빼고 기웃거렸다.

 

초행 때의 기억 때문이다. 그때, 동행한 장은 길을 가다 학교만 나오면, ‘저기 학교 있어.’, ‘여기도 학교야.’ 하고 반색을 하곤 했다. 그것도 2박 3일, 여행 내내 그랬다. 10여 년을 나갔던 학교에서 쫓겨나 그런가, 대충 짐작만 하고 말았는데, 나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해직 5년 차, 내가 귀갓길에 떼 지어 하교하는 여고생들을 만나는 게 괴로워 일부러 길을 돌아다녔던 것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 완도-보길도 간 여객선. 18년 전과 달리 우리는 이 배에 승용차를 싣고 보길도에 들어갔다.

정오에 뜨는 완도행 배를 탔다. 배 위에서 우리는 멀어지는 보길도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황급히 다니느라 경황이 없었지만, 아내는 행복해했고, 즐거워했다.

 

1989년으로부터 어느새 스무 해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교사들이 모아주는 후원금으로 지급되었던 생계비 3, 40만 원으로 아내는 다섯 해를 버텨 주었다. 가난했지만, 자기 선택에 대한 충일감으로 살았던 시간이었다.

 

아내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보길도를 다녀와서, 그때가 어떤 형식으로든 내 젊음이 아퀴를 지었던 때였던 게라고 생각했다. 보성 차밭과 하동 평사리를 거쳐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우리의 여행에서 그 떠남과 일탈의 경계가 모호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여행의 전후를 구분 짓는 경계가 모호해질 만큼 현재의 삶에 무심해져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도 여전히, 떠난다는 것은 기쁘고 설레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2007. 2. 4. 낮달

 

 

그날의 댓글들

굴렁쇠 2007/02/05 10:11

전교조를 결성한 것을 두고 금방 온나라가 붉은 물이 들 것 같이 광풍이 몰아쳤던 일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지금이라고 해서 학교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친구 전교조 교사들로부터 듣고 있습니다만...그래도 참교육의 열정은 쉬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우리같은 사람덜은 늘 마음의 큰 빚 하나 지고 있는
심경입니다. 그 시절, 해직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보길도에 머물렀던 일이 있었군요.
세연정-얘기는 팬다님 블로그에서 짧은 내용이지만 새롭게 읽게되어 돛과닻님의 글과 
연결이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돛과닻 2007/02/05 20:39
아닙니다. 굴렁쇠님. 공연히 객쩍은 소리를 지껄인 것은 결혼 기념 여행으로 보길도를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또 객쩍다 함은 모두가 열심히 살았는데, 혼자 중뿔나게 산 것처럼 궁시렁댔기 때문입니다...
  
각골명심 2007/02/05 17:16
돛과닻님의 18년전 기억속에 교단의 역사가 고스란히 있군요. 그런 어려운 시간에 당당히 맞서 온전히 겪어내신 님같은 분이야 말로 진정한 '선생'입니다.....
  
"대저 여행의 묘미는 ‘떠남’에 있다. 그것은 일상과 그 책임으로부터, 삶과 일터의 갖가지 곡절과 그 완고한 도덕률로부터의 ‘이탈’이고 ‘격리’이다..." 첫 머리가 꼭 쟝 그르니에의 글을 보는것 같슴다...
  
흠...근데...혹, 가족과 함께 떠나셔서 ...별 감흥을 못느끼신건 아닌가요? 
웬지 '떠난다'가 아직 '설렌다'로 남아 있다는 건 분명 '일탈' 이란 짜릿함 때문일텐데...ㅎㅎ
  
돛과닻 2007/02/05 20:42
각골님, 아니올시다. 내 기억 속에 자리한 것은 1500분의 1에 해당하는 역삽니다. 
그르니에는 과찬. 사실은 아내를 위로하기 위한 여행이었습니다. 보길도가 아마 아내에게 가장 인상깊은 여행지였나 봅니다. 사실 아내에게 갚아야 할 빚이 아주 많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그걸 제대로 갚으리라고 마음 먹긴 하지만, 글쎄요...
  
팬다 2007/02/05 21:17
보길도 여행의 여운이 진하게 베어납니다.
그런 길이었으면 그저 가족간 피서의 기억인 길하고야 천지의 차인 게지요.
  
하물며 연륜 더한 여행이니 선생님 여행기 읽어내림이 
저로서는 마음이 하냥 뜨겁기만 합니다.
  
저도 옆지기 손잡고 중년의 어느 해 
보길도 재차 찾아 볼까 합니다. 선생님 기억에 묻어서요...
  
돛과닻 2007/02/05 21:41
공연히 무슨 척을 해 버린 듯해서 마음이 찜찜하네요. 사실은 은혼 기념 여행기의 일부였는데, 보길도를 아내가 그리 못잊어 해서 말이지요...

해를그리며 2007/02/05 22:22
'땅끝'이라는 독특한 지명과 '윤선도'라는 이름의 지명도 때문에 다녀왔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지난간 일이 기억나지 않는게 너무나 많습니다. 나이가 많지도 않은데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가기전에 어디선가 '세연정'이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글을 읽고 얼마나 아름다운가 보러갔었는데 잘 모르겠더군요.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면서 돌아왔습니다. 왜 아름답다는 느낌을 갖지 못했을까. 
지금가서 보면 어떻게 느낄지 그것은 알 수가 없겠지요.
  
돛과닻 2007/02/06 09:53
기억은 선택적이라더군요. 필요한 것만 기억하는 것은 주인조차 알 수 없는 몸이 가진 원초적 기제가 아닐까요... 
또 아름다움이란 지극히 상대적 개념이어서겠지요. 사실 우리는 덩달아 아름답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나의 눈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사물과 사람을 보는 데 아주 익숙해져서 말이지요...
  
메이 2007/02/06 00:39
화염병 시위가 있었기에 오늘의 촛불 시위가 있을 수 있듯이
해직된 선배님들이 계셨기에 편히 교직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해직 기념 여행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해학과 익살로 좌중을 흔드는 국어과 장선생 이라는 분
저... 혹시... 장남길 선생님은 아닌지요? 왠지 제가 아는 분과 흡사해서요... 
  
폴리네시아 2007/02/07 20:18
부인과 뜻깊은 여행이었네요.
  
3년 전에 가본 보길도 기억이 새록새록 나더군요.
세연정도 기억 나고요.
윤선도가 해남에선 왕처럼 살았다죠.
  
그래도 유적지로 남는 건 부와 권력의 흔적이니...

돛과닻 2007/02/08 11:08

그랬습니다. 2박 3일간의 짧은 여행으로 갑자기 신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세한도 2007/02/09 13:09
같은 학교 장선생일세. 해학과 익살은 다 쭈그렁방탱이가 되어서 몸과 마음이 다 낡았다네. 어젠 졸업식하고 오늘 종업식하고, 저녁엔 바닷가 가고. 많이 아픈 부모와 자식은 대구 남겨 둔 채, 오늘 저녁 아마 나도 어저께 자네처럼 거나한 목소리로 전화할지 모르네. 
졸업식 하는 날 허전한 마음에 아이들과 학부모 앞에서 한 줄 끄적인 것 읽어 드렸다네. 자네만 감상주의자가 아니라 한 풀 꺾이면 다 그런 모양이야. 
  
너희가 커서는 
  
청보리 같은 아이들이 떠납니다.
한 해 동안 많이들 밟혔다고 야단입니다. 
몸서리치게 쌀쌀맞아 추운 겨울 보냈다고 해방감에 젖습니다.
이제 봄비 내리고 나면,
따스한 햇살의 그 넘치는 기운을 받아
어깨 덩실거리며 자랄지도 모릅니다.
웃자라서 바람에 금방 넘어질지도 모르면서
불쑥불쑥 커서 떠나고 싶어 합니다. 
예전 어느 날, 아마 나도 역시 저랬을 것입니다. 
  
나이 드니 아쉽게도 이제야, 
느림이 눈에 보입니다.
한 겨울 그 꽁꽁 바람에 
대지의 울안에 잘 갈무리하여,
이 창창한 햇살 아래 천천히 잘 밟혀야만 
아, 
뿌리 깊이 내리나니,
땅심 넉넉히 받으리니,
  
그리하여,
잘 밟혀서 엄동의 시련을 잘 보내야만
청보리 싹 튼실히 틔워
풍성한 열매 맺는 느림의 뜻으로
한 해 동안 많이 밟았습니다.
  
청보리 같은 아이들이 오늘 떠납니다.
하나같이 싱싱한 빛입니다만 
어느 날에는
민중의 넉넉한 밥그릇에 한 가득 실한 밥알이 되기를
든든한 뱃살이 되고,
오래 가는 거름이 되었으면 합니다. 
  
2006학년도 3학년 졸업에 붙여

돛과닻 2007/02/09 13:19

그러게 말일세. '쭈그렁밤탱이'가 그중 마음에 드는 표현처럼 보이는군. 
나는 다음 주 수요일에 아이들을 떠나보내네. 읽어 줄 시조차 한 편 없으니, 자네 시로 대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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