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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영남루’, 촉석루와 함께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을 다투다

by 낮달2018 2023.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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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영남루(嶺南樓), 그 ‘야경’을 밀양팔경 제1경으로 올렸다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밀양 영남루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누각 중 하나다.
▲ 밀양팔경 가운데 제1경으로 꼽히는 영남루 야경. ⓒ 밀양시

밀양은 이런저런 사연으로 내게 친숙한 도시다. 입대를 앞둔 청춘의 어느 날, 아내와 함께한 짧은 여행으로 첫 인연을 맺은 이래, 한때 젊음의 열망을 함께 지폈던 벗이 거기 정착하게 되고 30년 전의 여제자가 거기 살고 있다는 사실 등으로 말미암아 밀양은 내 삶과 꽤 가까운 도시가 되었다. [관련 글 : 밀양, 2017년 11월]

 

스물에 처음 찾았던 밀양, 영남루는 그 40년 뒤에 만나다 

 

그동안 여러 차례 밀양을 찾았었다. 시내 항일운동 테마 거리와 밀양 의열기념관을 찾아 약산 김원봉과 석정 윤세주 선생의 흔적을 더듬었고, 박차정 선생의 묘소와 김상윤, 최수봉 의사의 빗돌을 찾았었다. 팬데믹 기간이었던 2020년에는 여제자의 안내로 영남루를 한 바퀴를 돌았었다.

 

2006년에 벗들과 함께 밀양에 들렀을 땐 밀양강 건너편에서 영남루를 먼빛으로만 바라보고 말았었다. 그 뒤에 언제 영남루를 들여다보았는지 어떤지는 기억에 없으니 2020년 6월이 내겐 초행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시간에 쫓겨 오래 머물지 못하고 사진만 찍고 서둘러 떠났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에 놀라워했었다.

 

2021년 가을에 진주 촉석루를 찾았다가 그 압도적 규모에 영남루를 떠올렸었다. 영남루는 촉석루와 같이 앞면 5칸, 옆면 4칸의 대형 누정(樓亭)으로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불린다. 규모뿐 아니라 빼어난 경관과 건축미가 조화를 이루어 촉석루와 함께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을 두고 다툰다.

▲ 밀양 영남루 전경. 도심에 자리한 영남루는 시민들이 언제든지 찾을 수 있어 사랑받는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 지역N문화
▲ 밀양 영남루 일주문으로 오르는 계단. 지그재그로 경사로를 만들어 휠체어나 전동차들이 오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고려 공민왕 때 김주가 지은 영남루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영남루 자리에는 신라 때부터 영남사(嶺南寺)라는 절과 금벽루(金壁樓)라는 작은 누각이 있었다. 고려 때 절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1365년(공민왕 14) 밀양 군수 김주(金湊)가 새로 누각을 지으면서 영남루라고 했다고 한다. 김주는 선산 사람으로 1392년(공양왕 4)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다가 망국의 소식을 듣고 발길을 돌리고 고국에 돌아오지 않았던 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1460년(세조 6)에 중수하면서 규모를 크게 넓혀 밀양도호부 객사(客舍)의 누정으로 손님을 접대하거나 주변 경치를 즐기면서 휴식하던 건물로 쓰였다.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1637년(인조 15)에 중수했다가 불탄 것을 1844년(헌종 10)에 밀양 부사 이인재가 영남루 건물과 양쪽 익랑(翼廊:건물의 측면이나 뒤편에 돌출되게 잇대어 붙인 행랑)인 침류각(枕流閣)과 능파각(凌波閣)을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제자의 승용차로 영남루 주차장에 차를 댔을 땐 정오가 가까웠다. 일주문으로 오르는 가파른 석재 계단은 휠체어나 전동차를 이용하는 이들을 위해 지그재그로 경사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자 널따란 마당 오른쪽에 영남루가 침류각과 능파각을 거느리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 일주문으로 오르다가 바라본 영남루. 오른쪽 침류각으로 내려가는 지붕은 여러 단으로 낮아지면서 연결된 독특한 형태이다.
▲ 영남루의 누마루. 영남제일루, 영남루, 강성여화 등의 편액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다.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 천장이다.
▲ 영남루에서 바라본 능파각. 능파각은 영남루 왼쪽 익랑(翼廊:건물의 측면이나 뒤편에 돌출되게 잇대어 붙인 행랑)이다.

영남루는 앞면 5칸, 옆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다. 기둥은 높이가 예사롭지 않고, 기둥과 기둥 사이가 넓어서 매우 크고 우람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건물 서쪽 면에서 침류각으로 내려가는 지붕은 여러 단으로 낮아지면서 연결된 독특한 형태였다. 천장은 서까래 등 천장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椽燈天障)이다.

 

우람한 외관, 고색창연한 누각, 편액의 사연도 많다

 

영남루는 밀양강을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남향으로 서 있다. 웅장하고 고색창연한 누각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처마 밑에 걸린 거대한 편액이다. 계단으로 오르는 가운데에 ‘영남루(嶺南樓)’, 그 좌우에 ‘교남명루(嶠南名樓)’ ‘강좌웅부(江左雄府)’라는 편액이 걸렸다.

 

‘영남루’ 편액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인데 촉석루 편액을 쓴 조선 후기 명필 조윤형(1725~1799)이 1788년(정조 12)에 썼다. ‘교남’은 영남의 다른 이름이고, ‘강좌웅부’는 ‘강의 왼쪽에 있는 아름답고 큰 고을’이라는 뜻인데 이 편액들은 영남루와 반대로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조선 후기 이유원(1814~1888)이 썼다.

 

왼쪽의 능파각으로 영남루에 올랐다. 누각 4면에 크고 작은 편액이 큼직하게 걸려 있다. 처마의 편액만큼 큰 글씨로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영남루(嶺南樓)’ ‘현창관(顯敞觀)’ ‘강성여화(江城如畵)’ ‘용금루(湧金樓)’라 씌어 있다. ‘현창관’은 ‘멀리 바라본다’라는 뜻이고, ‘강성여화’는 ‘강과 성이 마치 그림 같다’라는 의미다. ‘용금루’는 ‘높은 절벽에 우뚝 솟았다’라는 의미로 이들은 모두 영남루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영남제일루’는 이인재의 큰아들이 11살 때, ‘영남루’는 둘째 아들이 7살 때 썼다고 한다.

▲ 영남루의 편액들. 왼쪽 아래로 세 개는 영남루 전면 처마 밑에, 나머지는 누각 4면 여기저기에 걸린 편액이다.

절벽 위에 세워진 거대한 누정 아래로 밀양강과 다리, 그리고 밀양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계자각 난간을 두른 누마루의 바닥은 우물마루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니 마룻바닥이 반들반들 윤이 났다. 누마루에 서니 새삼 이 누정의 규모를 실감할 수 있었다.

 

유명 문인들의 시판, ‘영남 제일의 시루(詩樓)’

 

주변 풍광과 웅장하고 세련된 건축미와 더불어 영남루를 빛내는 것은 누마루 곳곳에 걸린 유명 문인들의 시판(詩板)이다. 대표적인 것이 목은 이색(1328~1396)의 시다. 당대의 것은 소실됐고 후대에 다시 새긴 시판이다. 이색의 시판은 그의 16세손이자 영남루를 새로 지었던 이인재가 새겨 걸었다.

 

영남루 아래 큰 강물 비켜 흐르고

가을 달과 봄바람이 태평스럽네.

문득 은빛 물고기가 눈앞에 가득하고

선비들 웃음소리 들리는 듯하네.

 

목은뿐 아니라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 문인들이 영남루에 올라 쉬면서 주옥같은 수백 수의 제영(題詠)을 남겼다. 고려의 대학자인 이숭인, 시인 임춘, 조선 초기의 대문장가인 권근과 하륜, 조선 중기의 김종직과 이황 등 숱한 시인 묵객들의 문장이 전한다. 선조 때 영남루에 걸린 시판이 300여 개에 달했을 만큼 영남 제일의 시루(詩樓)로 기려졌다.

▲ 영남루에서 내려다본 밀양강과 밀양 시가지. 누각 바로 밑에는 성곽이 이어지고 있다.
▲ 영남루 아래 흐르는 밀양강과 밀양시의 모습.
▲ 영남루 아래 대숲 주변에 있는 아랑의 사당인 '아랑사'. 흔히 아랑각이라 불린다.

여인의 ‘원귀 서사’가 서린 아랑사

 

능파각 아래 통로로 밀양강 쪽으로 내려가면 밀양 읍성으로 이어지는 언덕바지에 조선 명종 때 밀양 부사의 외동딸 윤동옥의 정절을 기리고자 지은 사당 ‘아랑사(阿郞祠)’가 있다. 아랑은 유모의 꾐에 빠져 영남루로 달구경을 갔다가 통인에게 겁탈당하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정절을 지켰다. 아랑의 사후, 밀양에 부임하는 부사마다 비명횡사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는 아랑의 원혼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집의 야담 책에서 여러 차례 읽은 이야기다. 담력이 뛰어난 신임 사또가 부임하여 원혼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유모와 통인을 처벌함으로써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밀양 사람들은 아랑의 넋을 위로하고 뭇 여성의 본보기로 삼고자 해마다 4월 16일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아랑사 서편 대숲에 ‘아랑 유지(遺址)’라 새긴 빗돌이 있다.

 

아랑의 전설은 귀신이 된 원혼이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며 스스로 원한을 푸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원귀(冤鬼) 서사다. 이 이야기는 가부장적 질서와 남성 폭력을 고발하고 비판하며, 귀신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는 공포와 두려움을 통해 남성 중심의 지배 질서에 균열을 냈다고 평가된다.

▲ 영남루 북쪽 맞은편에 있는 천진궁의 외삼문 만덕문.
▲ 조선 후기에 역대 8왕조의 시조의 위패를 봉안한 천진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 천진궁 오른쪽에 있눈 단군상과 태상노군, 칠원성군, 삼신제왕을 새긴 빗돌.

역대 8왕조의 시조 위패를 봉안한 천진궁

 

영남루 맞은편 북쪽, 만덕문(萬德門)으로 들어서면 조선 후기 역대 8왕조의 시조(단군, 부여·고구려·가야의 시조 왕, 고려 태조, 신라와 백제의 시조 왕, 발해 왕, 조선 태조) 위패를 봉안한 건물인 천진궁(天眞宮)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인데 본래 전패(殿牌:왕을 상징하는 일종의 위패)를 봉안한 공진관(拱辰館)의 부속건물로서 공진관을 대신하여 전패(殿牌)를 보관했던 객사(客舍)로 추정된다.

 

1910년에 나라를 빼앗기자, 전패가 땅에 묻히고 객사의 기능도 해제된 채 일본 헌병대의 감옥으로 사용하였다. 일제가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말살하고자 역대 시조의 위패를 땅에 묻고 감옥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천진궁은 민족의 수난사를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영남루 일원은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천진궁 앞에 시인 묵객들이 휴식하는 공간 영남루가 펼쳐지고, 그 아래 강가에는 억울하게 죽은 여인의 원혼을 달래는 아랑사를 품었다. 그러나 영남루를 찾는 시인 묵객의 풍류도 옛이야기가 되었고, 천진궁과 아랑사도 형식화된 제의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 영남루는 규모뿐 아니라 빼어난 경관과 건축미가 조화를 이루어 촉석루와 함께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을 두고 다툰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영남루는 그 야경을 밀양 8경 가운데 제1경에 올렸다. 굳이 8경이 아니더라도 도심에 자리한 영남루는 시민들이 언제든지 찾을 수 있어 사랑받는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산기슭 절벽 위의 이 아름다운 누정은 밀양강을 내려다보며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을 의연히 증언하고 있다.

 

 

2023. 5.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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