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세계유산-한국의 사원] ⑥ 돈암서원, 호서 지역의 산림과 예학의 산실

by 낮달2018 2023. 4. 10.
728x90
SMALL

[세계유산-한국의 사원] ⑥ 충남 논산시 연산면 돈암서원(遯巖書院)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예학사상가 사계 김장생을 기려 세운 돈암서원의 설경.ⓒ 논산시청
▲ 돈암서원 강당인 양성당(왼쪽에서 두 번째 건물) 부근. 오른쪽 앞 맞배지붕 건물이 동서재, 왼쪽 뒤에 장판각이다.

2019년 소수서원 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돈암(遯巖)서원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 있다.(임3길 26-14). 일부러 찾지 않으면 들르기가 쉽지 않은 지방에 있는데도 돈암서원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아내와 내장산 단풍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서였다.
 

내장산 다녀오다 들른 논산의 돈암서원


2019년 11월 11일, 돌아오는 길에 정읍의 무성(武城)서원과 논산의 돈암서원을 들른다는 일정으로, 새벽밥을 먹고 길을 나서 내장산에 닿은 건 9시께였다. 오전에 내장산을 둘러본 다음, 점심을 먹고 무성서원을 거쳐 돈암서원에 닿으니 오후 4시가 겨웠다. [관련 글 : 늦지 않았다, 때를 지난 단풍조차 아름다우므로]
 
널따란 대지에 들어선 서원 건물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규모에 우선 놀랐다. 다닥다닥 건물이 들어찬 도산서원이나 단출한 병산서원만 보던 눈에 평지에 가까운 터에 널찍하고 큼직하게 세워진 건물들이 시원했다. 그것은 묘우와 강학당의 위계를 드러내려고 지형의 높낮이를 이용한 산자락의 서원과 한눈에 달라 보였다.

▲ 서원 담장 밖에 있는 문루 산앙루. 2006년에 세운 산앙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2층 맞배지붕 건물로 돌기둥 위 누각이다.

예학의 종장 사계 김장생을 기려 모신 돈암서원

 

돈암서원은 조선 예학(禮學)을 정비하여 한국 예학의 종장(宗匠)으로 불리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을 기려 세원 서원이다. 사계가 타계한 지 3년 후인 1634년(인조 12) 충청도 연산현 임리에 김장생을 주향(主享)으로 모셔 창건되었다.
 
1658년(효종 9) 사계의 둘째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1574~1656)을 추가 배향(配享)하였다. 김집은 아버지 김장생과 함께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하였으며, 송시열에게 학문을 전하여 기호학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다. 1688년(숙종 14)에 송준길(1606~1672), 1695년에는 송시열(1607~1689)을 각각 추배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사계와 김집의 문인이다.
 
현종 원년(1660)에 ‘돈암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서원이 자리 잡은 숲말 산기슭의 큰 바위를 돈암이라고 불렀는데, 이 바위의 이름을 따서 사액을 받았다고 알려졌으나 ‘돈암’의 돈은 원래 ‘둔(遯)’자로 주역의 둔괘(遯卦)와 관련이 깊으며 주자가 만년에 사용한 둔옹(遯翁)이라는 호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 옛 돈암서원의 강당이었던 응도당 대청에 걸린 돈암서원 현판. 송시열의 글씨라고 한다.

돈암서원은 1871년(고종 8)의 전국적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존되었다. 원래 현재 위치보다 서북쪽으로 1.5km 떨어진 하임리 숲말에 있었는데, 연산천 가까운 저지대라 홍수 때마다 서원 뜰 앞까지 물이 차므로 1881년(고종 17)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김장생,  <예학>을 자신의 학문으로 체계화하고 정리


조선 중기의 정치가, 유학자인 사계 김장생은 광산(光山)인으로 문묘에 배향된 해동 18현 중의 한 분이다. 13세 때는 송익필(1534~1599)에게 <예학>과 <근사록>을 배웠으며, 20세 때부터는 율곡 이이(1536~1584)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31세 되던 1578년(선조 11)에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관직보다는 학문과 저술 활동 및 후진을 기르는 일에 전념했다.
 
사계는 송익필과 이이에게서 성리학을 배워 17세기 조선의 ‘예학’을 추스른 학자로 불린다. 예학은 유교문화를 의미하는 예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16세기에 양반 사회가 정착되면서 보편적 의례로 자리를 잡았다. 사계의 시대는 각종 사화와 반란,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 등 잦은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사계는 퇴계와 율곡 시대의 성과를 이어받아 <예학>을 자신의 학문으로 체계화하고 정리하였다. 예학에 대한 김장생의 학문적 관심과 집필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부친의 장례를 치르면서부터다. 35세 되던 해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상례’와 ‘제례’를 집안의 예법대로 따랐는데, 이듬해 김장생은 신의경이 편집한 <상제서>를 일반인이 쓰기에 편하도록 정리한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엮었다. 52세에는 관혼상제의 예를 연구한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했다.
 
예학은 성리학 이념만으로는 무너진 사회 기강과 윤리의식을 세울 수 없었던 이 시기의 수습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예학’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이념과 정치철학은 국가적으로 절실한 리더십이 되었고 사계는 이를 바탕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국가 정신과 사회발전의 방향을 정립할 수 있었다.
 
돈암서원은 호서 지역의 산림과 예학의 산실이자 본거지로서 17세기 내내 충청도 서인 계의 수(首) 서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사계의 예학은 서원의 사당인 ‘숭례사’ 앞 꽃담에 전서체로 새겨놓은 한문 12글자로 쓰인 교훈으로 남아 있다.

▲ 사당 숭례사 내삼문 담장에 기와 편을 활용한 상감기법의 전서체 한문 글귀 12 자가 씌어 있다. ⓒ 논산시청

지부해함(地負海涵)  대지가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는 만천(萬川)을 포용한다.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서일화풍(瑞日和風)  상서(祥瑞)로운 햇살과 온화한 바람
 

강당과 사우는 중심 축선에 배치됐으나 나머지 건물 등은 비대칭으로

▲ 돈암서원 배치도. 누리집 자료를 재구성함.

돈암서원의 배치는 약한 구릉지를 이용하여 전면에 강당을, 후면에 사당을 둔 전형적인 전학후묘 식 배치다. 담장 밖에 문루인 산앙루가 있고, 외삼문을 들면 강당, 내삼문, 사우(祠宇)가 중심 축선 상에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고, 그 좌우로 응도당, 장판각, 경회당, 전사청 등의 건물이 ‘비대칭’으로 자리 잡고 있으니 중심 축선 좌우에 대칭으로 건물을 배치한 서원 일반과는 배치가 다르다.
 
서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오자, 거의 평지에 가까운 너른 터에 넉넉하게 배치한 큼직큼직한 건물 등이 주는 첫인상이 시원했다. 그건 서원의 담장 밖에 독립적으로 세워놓은 호쾌한 규모의 문루가 충분히 외삼문과 떨어져 있어 문루가 사원의 주요 건물을 가리는 여느 서원과는 다른 배치 덕분인 듯했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2층 맞배지붕 건물로 돌기둥 위에 올린 누각인 산앙루((山仰樓)는 2006년에 세웠다.

▲ 돈암서원의 외삼문인 입덕문. 오른쪽 담장 아래 비석 군이 있고, 왼쪽 지붕이 보이는 건물이 응도당이다.
▲ 돈암서원 강당인 양성당과 좌우의 동서재. 양성당 앞의 비석은 돈암서원 원정비다.
▲ 양성당 뒤 쪽 서편에 있는 정회당. 사계의 부친인 김계휘가 강학하던 공간이다.

외삼문인 입덕문(入德門)을 들어서면 정면 가운데 강당인 양성당(養性堂)을 중심으로 동재 거경재(居敬齋)와 서재 정의재(精義齋)를 좌우 대칭으로 배치하였다. 양성당은 사계가 서재로 썼던 건물로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집이다. 양성당 앞에는 송시열의 글씨로 서원을 세우게 된 배경과 서원의 구조, 사계의 행적을 새긴 돈암서원 원정비(院庭碑)가 서 있다.
 
양성당 뒤쪽 서편으로는 판각을 보관한 장판각, 사계의 부친인 김계휘가 강학하던 공간인 정회당(靜會堂)이 있다. 원래 돈암서원 옛터의 강당은 응도당(凝道堂)이었으나 옮겨 짓는 과정에서 양성당이 먼저 강당 자리를 차지하였다.

 

보물로 지정된 옛 강당 응도당에 시선을 빼앗기다

 
응도당은 1880년 서원 이건 과정에서 옛터에 그대로 두었다가 1971년에 옮겨오면서 사당과 직각으로 서원 왼쪽에 배치하였다. 응도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ㅅ자 모양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는 모두 마루를 깔았고, 옆면에는 비바람을 막아주는 풍판(風板)을 달았으며, 풍판 아래에는 눈썹지붕(벽이나 지붕 끝에 물린 좁은 지붕)을 두었다.

▲ 옛 서원의 강당이었던 응도당. 1971년에 지금 자리로 옮겼다. 서원 건물로는 찾는 이를 압도하는 규모에다 측면에 눈썹지붕을 달았다.
▲ 응도당. 기단에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설치한 구조로 거대한 한옥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하다. 2008년 보물로 지정.
▲ 응도당 대청마루에 송시열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응도당은 1633년에 건립된 고대 예법을 따른 건물 양식이라고 한다.

응도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지만 서원 건물로는 찾는 이를 압도하는 규모에다 건물 형태도 특이해서 오래 사람의 시선을 붙잡는다. 화강석의 장대석(1단 또는 2단)의 기단에 원통형의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설치한 구조여서 거대한 한옥이 공중에 살짝 떠 있는 듯하다. 이 독특한 구조 덕분에 2008년 이 건물은 보물로 지정됐다.
 
기와에 쓰인 명문으로 1633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응도당의 ‘응도’는 ‘도(道)가 머문다’는 뜻이다. 응도당 대청마루 위에 걸린 커다란 ‘돈암서원’ 편액은 송시열의 글씨다. 응도당은 또, 사계가 <가례집람>에서 이론적으로 정리했던, 고대 예법에 따른 건물 양식을 실제로 적용한 사례라는 점이 특별하다.
 
양성당 뒤쪽 한 단 위에 사당인 숭례사(崇禮祠)가 자리하고 있다. 다른 건물과 달리 단청을 칠한 사당은 김장생을 주벽으로 하고 제자였던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배향하고 있다. 사당의 내삼문 좌우와 가운데에 기와 편을 활용한 상감기법의 전서체 한문 글귀 12자가 씌어 있다.

▲ 돈암서원의 사당인 숭례사와 내삼문. 삼문 가운데와 양옆 담장에 상감기법의 전서가 씌어졌다.
▲ 거의 평지에 가까운 터에 들어선 돈암서원은 기호 사림의 구심체로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돈암서원 누리집

돌아와 서원 누리집에서 내려받은 서원 전경을 바라보면서 새삼 돈암서원의 시원하고 넉넉한 배치를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돈암서원은 호서(湖西)는 물론 기호(畿湖) 전체에서 존숭 받는 서원으로서 사계 김장생을 제향한 서원 가운데 가장 비중 있고 영향력 있는 서원으로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기호 사림 전체의 구심체가 된 돈암서원은 마침내 2019년 소수서원 등 8곳의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23. 4. 10. 낮달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서(序)  한국의 서원(書院)’ 세계 문화유산이 되었다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① 소수서원, 서원도 사액도 최초였던 백운동서원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② 도동서원, ‘엄숙 정제의 예를 실현한 서원의 전형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③ 서원 건축의 백미 병산서원, 그리고 만대루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④ 남계서원, 서원 건축 배치의 본보기가 되다
[세계유산-한국의 사원] ⑤ 도산서원, 퇴계의 위상과 명성을 상징하는 공간

[세계유산-한국의 사원] ⑦ 무성서원-‘유교적 향촌 문화의 본보기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⑧ 평지 서원 필암서원, 소장 문서도 보물이다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탁월한 장서 관리, 서원과 독락당에 국보1점과 보물 9점을 남겼다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