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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사람 서울 나들이 ⑧] ‘일제의 만행’ 지우고 되살린 ‘조선 제일의 법궁’

by 낮달2018 2023.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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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 산책 ④ 고난의 근대사 간직한 ‘조선 제일의 법궁’ 경복궁(景福宮)

▲ 강녕전 서쪽 연못 안에 조성된 국보 경회루는 말 그대로 '경사스러운 모임'의 장소다. 임란 때 소실되었으나 고종 4년에 중건되었다.

경복궁을 처음으로 찾은 건 1966년, 초등학교 4학년 때 6학년 언니들을 따라 수학여행을 갔을 때였을 것이다. 서울 수학여행을 6학년만으론 운영하기 어려웠던 시골 학교에선 형편이 괜찮은 4, 5학년들도 설득해서 데려갔는데, 나는 거기 낀 것이었다.
 
그러나 창경원 동물원에 갔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을 뿐, 내겐 경복궁이나 동물원에 관한 기억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다. 1974년 고3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서울로 갔을 때도 경복궁에 한 번쯤 들렀을 수도 있지만, 그 기억도 역시 가물가물하다.
 
서울에 어떤 연고도 없는 지방 사람이 상경하는 일은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경조사가 있거나, 또는 서울에서 공적 업무를 봐야 할 때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소관을 보고 나서 따로 고궁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내일모레 일흔을 바라보는 올 5월에야 아들의 안내로 아내와 함께 경복궁을 둘러볼 수 있었던 건 그런 까닭에서다.

 

조선 제일의 법궁, 역사에서 서술하는 ‘마지막 왕궁’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된 경복궁은 우리 역사에서 서술하는 마지막 왕궁이다. 북악산을 등지고 광화문 앞 널찍한 육조(六曹)거리(세종로)가 펼쳐진 왕도 한양 도시 계획의 중심이었던 경복궁은 흥선대원군이 500여 동의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으로 되살렸다.
 
광화문-흥례문-근정문-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으로 이어지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으로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통일성과 함께 변화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고 있다.
 
경복궁의 명칭은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지었으니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궁의 중건이 완료된 것은 1867년, 이듬해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열강의 세력다툼 끝에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었고, 왕은 옮아온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궁궐이 되었다.

▲ 월대 복원 공사 때문에 궁 안에서 바라본 광화문. 수문장 교대의식이 펼쳐지고 있다. 지붕 위로 보이는 고층빌딩의 모습이 부자연스럽다.

경복궁을 망가뜨린 일제의 ‘만행’

 

그리고 1910년 강점 이후 일제가 경복궁을 대상으로 저지른 짓은 말을 잃게 만든다. 일제는 궁 안의 전·당·누각 등 4천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팔고, 1917년 창덕궁의 내전에 불이 나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동행각·서행각·연길당·경성전·연생전·인지당·흠경각·함원전·만경전·흥복전 등을 철거하여 그 목재로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 등을 지었다. 궁전 안에는 겨우 근정전·사정전·수정전·천추전)·집옥재·경회루 등과 근정문·홍례문·신무문·동십자각 등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또한, 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 정면 앞에 매우 큰 석조건물인 총독부 청사를 지어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이 밖에 자선당 자리에도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건청궁(乾淸宮)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없애버렸다. 일제는 왕조의 유물조차 저들 임의로 처리하는 데 거리낄 게 없었다.
 

▲ 조선박람회(1929) 홍보 엽서

1915년에는 경복궁에서 ‘시정(施政)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다.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 것은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5년 동안 조선을 통치한 실적을 대내외에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해 조선총독부 박물관 건물을 준공했다. 1927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 준공했고, 광화문을 옮겼다.
 
경복궁의 전각과 수목들은 조선물산공진회 개최 때 이미 훼손하기 시작하였는데 1929년에는 통치 20주년을 기념하고자 ‘조선박람회’(1929.9.12.~10.31.)를 개최하였다. 전각들은 조선박람회의 여러 전시관으로 사용되었는데 조선물산공진회 때와 마찬가지로 경복궁 근정전은 조선박람회의 식장으로, 경회루는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다. 두 박람회는 관람객이 각각 100만 명이 넘었고, 이 과정에서 궁궐의 모습은 만신창이가 되었다.[민족문제연구소 회보 <민족사랑> 2023년 4월호 참조] 
 
1945년 광복 후 궁은 공원으로 개방되고, 총독부 청사는 정부종합청사로 활용되었다. 1971년에 궁 안 목조기와 건물 모양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에 든 국립박물관이,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을 고치면서 총독부 청사로 옮겨졌다. 옛 총독부 청사는 지어진 지 68년 만인 1995년 8·15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철거되었으며, 이 자리에 원래 있던 흥례문(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의 중문) 권역이 2001년 10월 복원되었다.
 
한편, 일제가 훼철한 경복궁을 복원하는 공사는 1991년부터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20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40%가 복원되고,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졌던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우리가 동문으로 경복궁에 입장했을 때는 계조당(繼照堂) 권역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계조당은 경복궁에서 또 다른 중심이자 ‘작은 근정전’으로 꼽혔던 왕세자의 집무 공간이다. 왕세자가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국정을 논의하던 ‘궁궐 속 궁궐’은 1868년에 중건되었다가 1910년대 일제가 파괴하였고, 철거 110여 년만인 2020년에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었다.

▲ 경복궁 전각 배치도. 궁능유적본부의 관람코스 안내를 가공하였다.

경복궁 밖에서는 광화문을 무심히 지나치곤 했지만, 광화문 앞 월대 복원 공사 때문에 우리는 광화문을 궁 안에서만 바라볼 수 있었다. 문 앞에서 수문장 교대 의식이 펼쳐지고 있었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였는데 외국인 관광객이 태반이었다. 특히 한복과 관복 등을 빌려 입고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어쨌거나 그건 이제 서울 고궁 관광의 흐름이 된 것처럼 보였다.
 
두 시간 남짓 경복궁을 둘러보면서 우리는 그 정도론 이 고궁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만을 훔쳐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조선왕조의 정궁을 구성하는 전각들의 이름을 일별해 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경복궁은 전각과 시설을 ‘일원(一圓:일정한 범위의 지역)’이라는 개념으로 묶어서 관람코스를 안내하고 있었다. 복원 사업에서 쓰는 ‘권역(圈域)’이라는 개념과 비슷한 의미일 터였다.

▲ 광화문 근정문 사이 중문 흥례문. 일제는 이 문을 없애고 총독부 건물을 세웠고 정부는 총독부 건물을 허물고 이 문을 복원했다.

이름만으로 그 기능을 알기 어려운 전각들을 일원이라는 개념으로 구획하는 것은 관람객의 이해에 도움이 될 듯했다. 광화문에서 교태전까지 이어지는 일직선 축을 중심으로 그 얼개를 살핀 다음, 경회루와 자경전 일원, 향원정과 건청궁을 살펴보기로 했다.
 

광화문에서 교태전까지 대칭으로 조성된 전각들


광화문을 등지고 만나는 첫 번째 건물이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의 중문인 흥례문(興禮門)이다. 일제는 이 문을 없애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해방 뒤 50년이 지난 1995년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허물고, 2001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의 흥례문을 복원했다.
 
흥례문을 지나면 근정전의 남문으로 좌우에 행각(行閣:궁전에서 전각들을 둘러싼 통로 형태의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근정문(勤政門)이다. 임란 때 불탄 것은 고종 4년에 경복궁을 지으면서 새로 세웠다. 근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 정전의 남문 중 유일하게 2층 건물로 지어져서 법궁의 위엄에 맞게 조성되었으며, 궁궐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 ‘근정문과 행각’은 보물로 지정됐다.

▲가장 화려하고 권위 있는 건물로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 과거 및 외국 사절의 접견 등 국가의 공식 행사를 치르던 근정전.
▲ 근정전 오른쪽의 행각(行閣:궁전에서 전각들을 둘러싼 통로 형태의 건물) 앞을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들이 거닐고 있다.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라는 뜻의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국보다. 가장 화려하고 권위 있는 건물로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 과거 및 외국 사절의 접견 등 국가의 공식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근정전 건물 내부엔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병풍을 놓았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문무백관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경복궁의 중심 건물임을 드러낸다.
 
근정전 뒤쪽은 왕의 집무실인 편전(便殿: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궁전)으로 최고통치자인 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던 사정전(思政殿)이다. 보물로 지정된 사정전에서는 신하가 매일 임금을 뵙던 약식 조회인 상참(常參)을 비롯하여 경연(經筵: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연마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일), 윤대(輪對: 신하들이 차례로 임금에게 정치에 관한 의견을 아뢰던 일) 등 일상적인 국정운영이 이루어졌다.

▲ 사정문을 통해 본 왕의 집무실인 편전(便殿: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궁전) 사정전. 보물로 지정돼 있다.
▲ 왕의 일상생활 공간인 침전으로, 독서와 휴식 등 일상생활뿐 아니라 신료들과 편안히 만나 국정 현안을 의논하기도 한 강녕전.
▲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왕비는 유교의 법도에 따라 강녕전이 아닌 이곳에서 생활했다. 규모도 검소한 편이다.

사정전 뒤쪽의 강녕전은 왕의 일상생활 공간인 침전(寢殿)으로, 여기서 왕은 독서와 휴식 등 일상생활뿐 아니라 신료들과 편안히 만나 국정 현안을 의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비는 유교의 법도에 따라 이곳이 아닌 뒤쪽 교태전(交泰殿)에서 생활했다. 임금의 침전으로는 좀 작게 여겨지는 것은 조선의 왕들이 솔선수범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게 미덕이었기 때문이다.
 
왕비의 생활 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인 아미산 굴뚝은 고종 3년(1866)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새로 만든 것으로 보물로 지정돼 있다. 아미산은 교태전 일곽 뒤뜰에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만든 작은 산[가산(假山)]이다. 굴뚝이 4갠데 6각형의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따위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 교태전의 아미산 굴뚝. 4개의 굴뚝에 여러 가지 무늬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문화재청 문화유산포털

광화문에서 교태전에 이르는 일직선 중심축을 중심으로 경복궁을 일별했지만, 궁내에는 중심축 좌우에 비대칭적으로 들어선 복잡하고 숱한 전각들도 오히려 촘촘하다. 국가지정문화재로만 한정해 봐도 국보로는 경회루, 보물로는 수정전, 자경전과 자경전 십장생 굴뚝, 향원정 등이 있다.
 
강녕전 서쪽 연못 안에 조성된 국보 경회루(慶會樓)는 말 그대로 ‘경사스러운 모임’의 장소다. 외국 사신과 군신 간 연회 장소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고종 4년(1867)에 중건되었다. 앞면 7칸, 옆면 5칸의 2층 팔작집인데,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 누각 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건축 문화재이다.

▲ 단일 평면으로 규모가 가장 큰 누각,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 누각 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낸 건축 문화재 경회루.
▲ 1867년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의 궐내각사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건물로 보물로 지정돼 있다. ⓒ 문화재청 문화유산포털

나머지 국가지정문화재들

 

근정전 서쪽, 경회루 남쪽에 자리 잡은 수정전(修政殿)은 고종 4년(1867)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의 궐내각사(闕內各司:궁궐 내의 설치된 여러 관청)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다. 세종 때에는 한글 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이 이곳에 있었다. 궐내각사는 수정전 앞에 밀집되어 있었으나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일제가 대부분 헐어버렸다.
 
자경전(慈慶殿)은 경복궁을 중건할 때 흥선대원군이 고종의 양모인 조대비(신정왕후 조씨)를 위해 지은 전각이다. 조대비는 헌종의 어머니로 철종 승하 후 왕위 계승자를 고종으로 결정한 인물이다. 자경전은 경복궁에 남은 유일한 대비의 침전으로 총 44칸 규모다.

▲ 경복궁을 중건할 때 흥선대원군이 고종의 양모인 조대비(신정왕후 조씨)를 위해 지은 전각인 자경전. 보물로 지정돼 있다.
▲ 보물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 중앙에 십장생 문양을 박아 넣었고, 위아래는 학과 불가사리 등을 배치하였다. ⓒ 문화재청 문화유산포털

자경전 주변에는 수십 채의 집과 담장, 문들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동안에 대부분 없어졌다. 지금은 장수를 기원하는 뜻의 글자와 꽃·나비·대나무 형태를 흙으로 구워 새겨 넣은 꽃 담장과 자경전 뒷담의 한 면을 돌출시켜 만든 굴뚝이 남았다. 굴뚝은 중앙에 십장생 문양을 구워 박아 넣었고, 위아래로는 학과 불가사리, 벽사 상 등을 배치하여 악귀를 막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는데 자경전과 함께 보물로 지정돼 있다.
 
향원정(香遠亭)은 고종 때 왕과 왕비의 처소로 이루어진 건청궁(乾淸宮)을 지을 때 경복궁 북쪽 후원에 있는 향원지 내의 섬 위에 건립된 육각형의 정자다. ‘향기가 멀리 퍼져 나간다’라는 뜻의 ‘향원’은 북송의 주돈이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의 ‘향원익청(香遠益淸)’에서 따온 말이다. [관련 글 : 향원익청(香遠益淸), 연꽃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

▲ 1873년에 고종이 건립한 건청궁의 왕의 처소인 장안당과 추수부용루(왼쪽)
▲ 경복궁 북쪽 후원에 있는 향원지 내의 섬 위에 건립된 육각형의 정자인 향원정. 보물로 지정돼 있다.

두 시간 남짓 경복궁을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보면서 느낀 것은 아무리 시골 사람이 짬을 내 들렀다 해도 이 수박 겉핥기에 그치는 답사가 용서받기는 쉽지 않겠다는 거였다. 제대로 사전 공부를 하여 봐야 할 곳과 그냥 스쳐 가도 될 곳을 정한다 해도 제대로 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긴 하다. 
 
나는 단풍이 고운 어느 가을날에 다시 제대로 준비해서 경복궁을 다시 찾으리라고 마음먹었다. 돌아와서 경복궁 공부를 새로 하면서 그 역사를 훑다 보니 개인적 소회는 건너뛰었다. 정작 들여다보지 못한 수정전이나 두 개의 굴뚝 등, 사진 여러 장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에서 가져올 수밖에 없었음도 밝혀둔다.
 
 

2023. 6. 6. 낮달

 

[시골 사람 서울 나들이 ①] 난생처음 국립극장에 옛 연극을 보러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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