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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함양 상림(上林)에서 최치원을 생각한다

by 낮달2018 2020.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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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8년 1월

▲  통일신라 진성여왕(재위 887∼897) 때 최치원 선생이 함양읍의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함양 상림의 풍경들.

겨울 여행을 다녀왔다. 쉰을 전후한 중년 사내 셋이 함께했다. 목적지는 경남 함양과 산청. 일행 중 한 친구의 고향이 함양 안의다. 그는 당연히 이 여행의 길라잡이 역을 맡았고, 가장 연하의 한 친구는 그 죄(?)로 운전을 맡았다. 나이 덕에 나는 조수석에서 느긋하게 연변 풍경을 즐기면서 필요하면 사진을 찍어댈 수 있었다.

 

중년 3인의 겨울 나들이

 

첫날은 용추계곡을, 이튿날엔 화림동 계곡의 정자들을 훑은 뒤, 정여창 고택을 거쳐 함양 읍내의 상림(上林)을 찾았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곳이 화림동 계곡의 정자와 함양 상림이었다. 물론 산청의 덕천서원 등 남명 조식의 유적지도 빼놓을 수 없다.

 

초등학교 이후 나는 죽 대구에서 공부했는데 그 시기의 대구의 살인적 더위를 잊을 수 없다. 그때만 해도 ‘도시 녹지’라는 개념이 따로 없을 때여서 대구는 살벌한 회색빛 콘크리트 일색이었다. 가끔 달력이나 잡지 등에서 군데군데 축복처럼 녹지가 펼쳐진 외국의 도시를 눈여겨 바라보면서 머리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한 30년쯤 흘렀다. 도시 녹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지방자치가 도입되면서 도시마다 녹지 늘리기에 골몰하는 시대가 되었다. 요즘 대구는 ‘가장 더운 도시’라는 예전의 악명을 벗고 있는 모양이다. 6, 70년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은 만큼 녹지 등 공원을 늘린 결과다.

 

예전에야 시가지 안에 자리 잡은 산이나 구릉 따위가 애물단지였겠지만, 요즘은 그걸 잘 가꾸어 주민들에게 휴식처로 돌려줄 수 있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다. 그러니 그런 천혜의 지형 조건을 갖고 태어나거나 원래부터 숲 따위를 끼고 발전한 도시가 있다면 그건 축복 이상이다.

▲ 함양 상림은 읍의 서쪽, 위천 가에 있는데, 천백 살이 넘는 사람이 조성한 숲으로 가장 오래된 숲이다.

함양읍 서쪽, 위천(渭川) 가에 있는 상림(上林)을 한 바퀴 돌면서 그런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숲의 내력이 심상찮다. 통일신라 진성여왕(재위 887∼897) 때 최치원 선생이 함양읍의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숲은 자그마치 천백 살이 넘는, 사람의 힘으로 조성한 숲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숲인 셈이다.

 

고운이 조성한, 천백 살이 넘는 오래된 숲

 

이 숲은 원래 대관림(大館林)이라고 불리었으나 숲 가운데 부분이 대홍수로 무너지고 그 틈으로 집들이 들어서서 상림(上林)과 하림(下林)으로 나뉘었다. 하림은 훼손되어 없어졌고, 지금은 상림만 남았다. 우리말로 하면 ‘윗숲’, 앞산 뒷산과 마찬가지로 아주 정겨운 이름이다.

 

천연기념물 154호로 지정된 이 낙엽 활엽수림은 규모도 놀랍다. 넓이는 3만6천 평, 100여 종 2만여 그루의 나무가 안정된 생태계를 보여준다. 숲을 이루고 있는 식물들로는 갈참나무·졸참나무 등 참나무류와 개서어나무류가 주를 이루며, 왕머루와 칡 등도 얽혀 있다 한다.

▲ 함양 읍성의 남문이었던 함화루. 정면 3 칸, 측면 2 칸의 2 층 팔작집이다 .

아쉽다. 우리가 상림을 찾은 때는 겨울의 한복판이다. 낙엽활엽수이니 잎은 다 지고 회백색 가지만이 찬바람 속에서 떨고 있었다. 숲속에 나 있는 길은 깊고 그윽하지만, 주변의 잎 벗은 나무들 사이에서 그것은 황량하고 외롭다. 겨울 여행이란 대체로 이런 것이다.

 

물론 겨울 풍경은 그것대로 아름답고 마땅히 아름다워야 한다. 겨울나무의 풍경은 삭막하고 황량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알몸의 헐벗음 속에 드높은 정직성과 진정성(眞情性)을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나 여전히 내공은 미치지 못해서 겨울 풍경 앞에서 마음 한복판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최 선생 신도비. 후손들이 1923년에 세웠다. 2019년 10월 사진.

상림 중심부에 3천여 평의 공설운동장이 있는데 그 가녘에 함양 읍성의 남문이었던 함화루(咸化樓)가 높다랗게 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팔작집이다. 원래 이름은 망악루였으나 이리로 옮겨오면서 함화루로 바뀌었다.

 

상림에는 함화루 외에 척화비, 함양 이은리 석불,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 등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시간 여유가 없어 한 바퀴 빙 둘러보고 나오느라 척화비는 놓쳐 버렸다. 이은리 석불은 이은리의 냇가에서 출토된 것을 옮겨 놓은 것으로 1.8m의 석조여래좌상이다.

 

육두품 최치원의 '시대와의 불화'

 

최 선생 신도비는 1923년에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다. 상림을 조성한 최치원의 업적을 기린 것으로 거북의 해학적 표정이 재미있긴 한데, 고작 팔십몇 년 전에 세운 거라는 걸 확인하면서 모두 좀 속은 듯한 느낌이었다.

 

경상도여서인가, 신라 말기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과 관련된 유적들이 주변에 제법 있다. 의성 고운사는 그의 자를 따 붙인 이름인데 그는 한동안, 이 절집에서 지냈다. 가야산 해인사에서는 말년을 지냈고, 부산 해운대도 그가 거쳐 간 인연의 땅이다. 그는 이 함양에서 태수를 지내면서 상림을 가꾼 것이다.

 

최치원은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 계급이었다. 성골과 진골 다음가는 높은 계급으로, 얻기 힘들다는 뜻에서 ‘득난(得難)’이라고도 불린 계급이다. 6두품 세력에는 유학 등에서 뛰어난 이들이 많았다. 화랑의 세속오계를 지은 원광이나 설총을 낳은 원효가 대표적인 6두품 신분이었다.

▲ 고운 최치원 (857 ~ ?)

그는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 18세 때 빈공과에 합격한다. 이후 10여 년간 그는 당의 관리로 살았고, 1만여 수에 달하는 글을 써 문명을 날려 <당서(唐書)>에도 그의 저서명이 수록되었다. 고려의 이규보는 <당서> ‘열전’에 그의 전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의 시기 때문일 거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 문명을 짐작할 만하다. 황소의 난 때 쓴 ‘토황소격문’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29세 때 최치원이 귀국했을 때 신라 사회는 붕괴를 앞두고 있었다. 지방 호족세력이 대두하고 국가 재정은 파탄 지경이었으며, 농민 봉기가 거세게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그는 신분적 한계를 학문을 통해 극복하려 했고, 유교적 정치이념을 내세우면서 골품체제에 반발하였던 육두품 세력과 함께 개혁을 시도한다.

 

최치원이 진성여왕 대에 올린 시무(時務) 10여 조가 바로 그거다. 그것은 10여 년 동안 중앙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목격한 귀족의 부패와 지방 세력의 반란 등 사회적 모순을 극복할 구체적 개혁안의 제시였다. 그러나 신라 하대의 모순은 그것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었고, 이들의 개혁 의지는 좌절하고야 만다.

 

이에 최치원은 40여 세 장년의 나이로 벼슬을 버리고 홀연히 은거의 길을 선택한다. 사회적 현실과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갈등하던 한문학자는 결국 ‘시대와 불화한 천재’가 되고 만 것이다. 다음 시는 그러한 자신의 심경을 직설적이고 자조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매억장안구고신(每憶長安舊苦辛) 장안에서 고생하던 일 생각하면
나감허척고원춘(那堪虛擲故園春) 어찌 고향의 봄을 헛되이 보내랴?
금조우부유산약(今朝又負遊山約) 오늘 아침 또 산 놀이 약속 저버리니
회식진중명리인(悔識塵中名利人) 뉘우치노라, 속세의 명리인 알게 된 것을.
   - ‘봄날, 벗을 초대했으나 오지 않아 짓다(春日激知友不至因寄絶句)’ 중에서

 

사회에 대한 그의 인식은 풍수지리설의 대가였던 도선(道詵)과 견주어지기도 한다. 그는 유학자라고 자처하면서 불교나 노장사상, 심지어는 풍수지리설까지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복합적 사상은 ‘신라 고대 문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상운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최치원이 말년에 소극적인 은둔 생활 끝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시대적 제약성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지식인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나말여초의 사회적인 전환기를 살다간 중세적 지성의 선구자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고운의 민족어, 표기법 인식

 

한편, 우리 한문학사의 서막을 화려하게 열어간 이 위대한 한시 작가의 민족어와 그 표기법에 대한 인식은 별로 개운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우리 고유의 향찰식 표기를 부끄러워했다. 그는 우리말을 이두식으로 적는 것을 일러 ‘문체가 새 발자국과 짝하게 되고 글자가 새끼줄 매듭을 면했다’고 표현하면서 중세 보편문어로서의 한문이라는 문자체계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가서 선진문화를 경험한 최치원의 이러한 언어 인식은 당시 육두품 계급에는 공통된 것이었던 듯하다. 이러한 인식은 결국 향가로 상징되는 민족어, 민족 시가의 쇠퇴를 불렀고 외래시가인 한시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최치원 등 당대의 엘리트들의 이러한 행위를 단순히 사대주의로 폄하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인식은 곧 고대 신비주의에서 중세 보편주의의 추구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정출헌(부산대) 교수의 견해다. 향가에서 한시로의 전환은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고대 시가 시대가 막을 내리고 합리적이고 서정적인 중세 시가의 시대가 열린 것’이라는 것이다.

 

한문과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보편주의로 나가자는 그들의 견해는 중국 문학에 뒤지지 않는 우리의 문학적 역량과 자부심이었다는 것도 그들을 단순히 사대주의나 모화주의로 매도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유야 어쨌건 선진문화를 체득한 지식인의 언어관이 민족어와 시가의 표기법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귀결되는 것은 그리 개운하지 않다. 영어과 관련된 온갖 논의로 시끄러운 현실과 그것이 겹치는 까닭이다.

▲가을날의 상림 . ⓒ 문화재청
▲ 군수현감 선정비군 ⓒ 문화재청

상림을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마음이 스산하다. 돌아와 인터넷 검색으로 만난 상림의 이미지 몇이 그나마 마음을 달래준다. 곳곳에 콘크리트 수로의 물길이 열려 있었고, 거기 흐르는 물소리가 살얼음 아래 숨죽이고 있는 봄기운을 아련하게 떠올리게 해 준다.

 

가을이 되면 상림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겠지만, 여행지에서의 기약이야 늘 그런 것이다. 해가 중천이었고, 서둘러 우리는 산청으로, 남명 조식 선생의 자취를 찾아 다시 길을 떠나기로 한다.

 

 

2008. 1. 29. 낮달

 


가을에 다시 찾은 상림

▲ 함화루
▲ 사운정

상림을 다시 찾은 것은 지난해 10월 중순이다. 무려 11년 만에 다시 함양으로 간 것이다. 2008년 함양 나들이에 길라잡이를 해 준 친구와 우리 2장 1박이 함께였다. 상림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남계서원(南溪書院)이 목표였는데, 친구가 가는 김에 어탕도 대접하겠다고 해서 이루어진 나들이였다.

 

남계서원을 거쳐 읍내에 들어와 우리는 유명한 함양 어탕으로 점심을 들었다. 그리고 곧장 상림을 찾았다. 계절 탓이었을까, 11년 전에 만났던 상림보다 다시 만난 가을의 상림은 훨씬 크고 훨씬 넉넉했다. 길도, 연못도, 나무와 숲도, 모두가 그랬다.

 

어찌 가을의 풍경을 나무와 숲이 헐벗은 겨울에 비기랴. 숲도 좋았지만, 사운정 옆에 길쭉하게 흐르며 주변의 풍경을 소담스레 담고 있는 연못을 한 바퀴 도는 기분은 각별했다. 그리고 겨울 방문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연지(蓮池)도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 상림의 연밭.  전체 넓이가 66,000㎡에 백련, 홍련, 황련, 분홍련 등의 연꽃과 수생식물 학습장으로 꾸며져 있다.

상림의 연밭은 전체 넓이가 66,000㎡에 백련, 홍련, 황련, 분홍련 등의 연꽃과 수생식물 학습장으로 꾸며져 있다. 연꽃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자연석 징검다리로 연밭을 가로질러 만나게 되는 낯선 수생식물이 예사롭지 않았다.

 

연꽃이 한창일 때 다시 상림을 찾을 만했다. 어탕으로 요기를 하고, 농월정 근처에서 계곡을 내려다보며 벗들과 밤 깊을 때까지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좋을 것이었다. 보수 중이어서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한 남계서원도 다시 찾고 싶었다. 이래저래 함양을 다시 내 여행지 목록에 올려두어야 할 듯하다.

 

 

2020.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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