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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사람 서울 나들이 ⑦] 창덕궁, ‘후원’을 품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by 낮달2018 202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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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 산책 ③ 가장 ‘한국적인 궁궐’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昌德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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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의 겨울 설경.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앞에 눈이 곱게 쌓여 있다. ⓒ 창덕궁 관리소
▲ 창덕궁 후원에 있는 사대부 살림집인 낙선재의 꽃담장 문양. ⓒ 창덕궁 관리소

창덕궁을 찾은 건 덕수궁과 창경궁을 들르고 난 이듬해인 2019년 2월이다.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내겐 서울의 고궁 가운데 가장 낯선 이름이 창덕궁이다. 창덕궁의 후원(後苑)인 ‘비원(祕苑)’은 알아도 창덕궁은 몰랐다. 아마 창덕궁보다 비원이라는 이름이 독립적으로 뉴스 같은 데 나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비원(祕苑)’으로 먼저 안 궁궐 창덕궁, 경복궁과 양궐 체제

 

비원은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들렀을 것이지만, 나는 그걸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과거 무분별하게 전면 개방해 왔던 비원은 훼손이 심하여 1970년대 후반에 복원사업을 시행해야 했다. 그 뒤, 일부는 비공개로 보존하다가 25년 만인 2004년 5월부터 옥류천, 관람정 등 후원 일부가 확대 개방되었다.

 

창덕궁을 찾은 건, 2019년 2월에 출판 문제로 서울에 왔다가 아들애에게 말미를 내 비원을 가보자고 요청하여 이루어진 나들이었다. 미리 창덕궁이나 비원 공부를 한 건 물론 아니었다. 비원에 가보자고 했더니 아이는 돈화문 앞으로 나를 안내했다. (*‘비원(秘苑)’이란 명칭은 1904년 <고종실록>에서부터 나타나지만 문화재청에선 ‘후원’으로만 쓴다. 후원의 명칭으로는 역대 왕조실록에 ‘후원·북원·금원(禁苑)’ 등이 보이는데 후원이라 부른 것이 가장 많다. )

 

나는 존재 자체도 잘 몰랐지만,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이다.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지만, 이후 임금들이 창덕궁에 머무는 것을 선호해왔고 특히 임진왜란 이후 법궁인 경복궁이 복구되지 못하면서 창덕궁은 고종 때까지 법궁 구실을 하였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의 정문인 인정문. 뒤에 안정전이 보인다.
▲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할 수는 없지만, 웅장한 중층 궁궐전각으로 당당하다.

왕조를 열면서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지었지만, 2대 정종은 개성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다. 3대 태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404년(태종 4) 다시 한양 천도를 결정하였고, 이듬해 새로 창덕궁을 건설하였다. 이로써 두 개의 궁궐을 동시에 운영하는 양궐 체제가 시작되었다.

 

마지막 대화재(1917) 이후 크게 바뀐 창덕궁

 

창덕궁은 임진왜란(1592) 때 소실된 궁궐 중 가정 먼저 복구에 들어갔는데, 이는 그전까지 임금들이 주로 거처하던 곳이 창덕궁이었으며, 경복궁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덕궁은 중건 약 10년 후 1623년 인조반정 때 외전 일부를 제외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고 말았다.

 

1647년에 복구한 뒤 1803년(순조 3)에도 대화재가 있었고, 창덕궁의 마지막 대화재는 국권을 잃고 난 1917년 11월에 일어났다. 이때의 재건공사가 창덕궁의 원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또 자동차 차고와 전등, 탁자, 의자, 커튼 등 근대식 설비와 가구의 도입 때문이었다.

 

창덕궁은 가장 오랜 기간 사용되면서 다양하고 복잡한 왕실 생활을 반영하고 있고,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로 평가받는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 잘 조화되고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조선 궁궐 중 유일하게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보물로 지정됐다.
▲ 2020년에 복원된 월대를 갖춘 돈화문. 2019년에 찍은 위 사진과 비교해보라. ⓒ 서울시

궁궐 대문 중 가장 큰 돈화문, 월대도 갖추다

 

경복궁이 법궁이고, 나머지 궁궐은 곁다리라는 선입관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뒤늦게 궁궐에 관해서 무지했음을 뉘우친다. 그러고 보니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보물)이 규모와 품위를 함께 갖춘 점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1412(태종 12)년에 건립된 돈화문은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月臺:왕조시대 궁궐의 위용을 과시하던 시설로 국가 의례가 펼쳐졌던 상징 공간)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월대가 복원된 것은 실제 2020년이었다.

 

돈화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남향 건물로 좌우 협칸을 벽체로 막아 3문의 형식이다. 중앙은 왕의 전용 문이고, 좌우 문은 당상관 이상 높은 관료가 드나들던 문이지만, 3사(三司: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언관은 관직은 낮아도 좌우 문을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2층 문루에는 종과 북이 있어 정오(正午)와 인정(人定), 파루(罷漏)에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정오를 알리는 북이 오고(午鼓)라 하고,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은 28번 종을 치고,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파루는 33번의 종을 쳤다.

 

우리는 100명 단위로 입장하여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창덕궁과 후원 답사를 시작했다. 금천교(錦川橋)를 지나 진선문과 인정문을 거치면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이었다.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 정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진선문으로 걸어가는 일행. 영조 땐 여기 신문고가 설치돼 있었다. 저 멀리 숙장문이 보인다.
▲ 정면에 왕비전으로 가는 숙장문. 왼쪽에 인정전으로 가는 인정문이 보인다.
▲ 내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숙장문. 궁궐의 외조 권역에서 내전을 볼 수 없게 만든 문이다.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할 수는 없지만, 웅장한 중층 궁궐전각으로 세워진 인정전은 나도 정전이라고 주장하지 않아도 당당하고 의젓해 보였다. 1405년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여러 곡절을 겪었고, 현재의 건물은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한 것이다.

 

우리는 창덕궁의 편전(便殿), 즉 임금의 공식 집무실인 선정전(宣政殿)과 원래 침전이었다가 나중에 편전으로 쓰인 희정당(熙政堂), 그리고 정식 침전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인 대조전(大造殿)은 건너뛰었다. 그날 답사는 궁궐의 전각이 아니라, 후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인정전을 둘러보고 일행은 바로 숙장문(肅章門)을 지나 낙선재로 이동했다.

▲ 낙선재(樂善齋) 일원은 마치 여염집처럼 느껴지는 사대부 살림집 형식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 낙선재.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던 낙선재는 영친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한 곳이다.

사대부 살림집 본뜬 낙선재 일원

 

낙선재(樂善齋) 일원은 마치 여염집처럼 느껴지는 사대부 살림집 형식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24대 임금 헌종은 경빈을 맞이하여 1847년(헌종 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는데 단청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의 낙선재에서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친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 우리가 창덕궁을 모르면서 낙선재가 귀에 익은 이유다.

 

낙선재를 나와 해설사를 따라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담을 끼고 언덕을 넘으면 왕실 정원의 초입부 부용지 일원이다. 부용지(芙蓉池)는 300평 넓이의 사각형 연못인데 못가에 휴식과 학문적 용도로 쓰인 아름다운 건물들이 들어섰다. 연못 남쪽의, 활짝 핀 연꽃 모양의 정자 부용정(芙蓉亭)은 국왕이 사색하거나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공간이다.

▲ 부용지 동쪽의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정자 영화당. 국왕이 주최하는 연회나 각종 행사가 열렸던 장소다.
▲ 부용지 남쪽의 정자 부용정. 활짝 핀 연꽃 모양의 이 정자는 국왕이 사색하거나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공간이었다.
▲ 부용지 북쪽에는 창덕궁 후원에 어제와 어필을 보관할 목적으로 건립한 2층 건물 주합루가 높다랗게 들어서 부용지를 굽어보고 있다.

연못 북쪽에는 창덕궁 후원에 어제·어필을 보관할 목적으로 건립한 2층 건물 주합루(宙合樓)가 높다랗게 들어서 부용지를 굽어보고 있다. 동쪽에는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정자인 영화당(暎花堂)이 부용지와 잇닿아 있다. 영화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에 팔작집으로 건물 규모는 크지 않지만, ‘동궐(東闕)’로 불린 창덕궁이 법궁 역할을 하던 시기에 경복궁 경회루처럼 국왕이 주최하는 연회나 각종 행사가 열렸던 장소이다.

 

부용지를 뒤쪽에 다시 나타난 조그만 연못은 연꽃을 좋아했던 숙종이 못가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애련지(愛蓮池)가 되었다. 1827년(순조 27) 효명세자(1809~1830, 순조의 아들, 헌종의 아버지)는 애련지 남쪽에 의두합(倚斗閤)을 비롯한 몇 채의 건물을 짓고 담장을 쌓았다. 현재 ‘기오헌(奇傲軒)’이라는 현판이 붙은 의두합은 8칸의 단출한 서재로 단청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다.

▲ 연꽃을 좋아했던 숙종이 못가 정자에 '애련'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이 연못은 애련지(愛蓮池)가 되었다 .
▲ 애련지 남쪽에 효명세자가 지은 의두합. 현재 '기오헌'이라는 현판이 붙은 의두합은 8칸의 단출한 서재로 단청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다 .

또 하나의 사대부 살림집 형식 조선 후기 접견실 ‘연경당’

 

창덕궁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후원 숲속, 낙선재와 함께 궁궐 안에 사대부 살림집 형식으로 지은 조선 후기 접견실 연경당(演慶堂)이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1828년(순조 28) 신하들을 초대한 연회를 열어 국왕인 부친의 권위를 높이고자 창건했다. 그러나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연경당은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청하지 않았다.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는 연결되어있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99칸으로 규모가 제한되는 일반 민가와 달리 연경당은 120여 칸에 이른다. 사랑채 오른쪽의 서재 선향재(善香齋)는 청나라풍 벽돌을 쓰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 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인상을 풍겼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 사대부 살림집을 본뜬 연경당의 사랑채. 오른쪽에 동판을 씌운 지붕의 건물은 서재인 선향재.
▲ 연경당의 서재인 선향재. 건물 전면에 차양을 달았는데 차양의 지붕은 기와가 아닌 구리판으로 만들었다. ⓒ 나무위키
▲ 연경당의 안채. 건물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은근히 화려한 사대부집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좀 차분히 둘러보며 오래된 건축물을 감상하면 좋으련만, 일행은 시간에 쫓겨 해설사를 따라 연경당을 떠나야 했다. 제한 관람지역이라 개별관람은 불가능하고 관람시간표에 맞춰 해설사의 인솔 아래 회차별 최대 100명까지 입장하는 후원 관람은 거기까지다.

 

우리는 왕과 왕실을 보좌하는 궐내 관청인 궐내각사(闕內各司)를 거쳐 다시 정문으로 나왔다. 정확히 후원을 돌아본 시간은 1시간 남짓이었다. 아쉬움 속에 창덕궁을 떠나며, 돌아보지 못한 선정전과 희정당, 대조전을 찾으러 따뜻한 봄날에 다시 들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새 4년이 훌쩍 흘러버렸다.

 

“비정형적 조형미, 자연과 인간이 만든 완전한 건축의 표상”,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다

 

컴퓨터 파일 속에 재워 둔 창덕궁의 풍경을 끄집어내고 창덕궁을 공부하면서 이 궁궐이 스쳐 가듯 돌아보고 말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주요 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응봉 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한다고 평가되지만, 내가 본 것은 그 지극히 작은 평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연스러운 산세에 따라 자연 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 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 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 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창덕궁 관리소의 ‘세계유산 창덕궁’ 중에서

 

3년간이나 이어진 코로나19 팬데믹은 오는 30일부터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되기에 이르렀으나 여전히 세상은 이전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새봄쯤에 돌아보지 못한 경복궁을 찾으면 아쉽지만, 고궁 순례는 일단 마무리될 듯하다. 미처 들르지 못한 전각들도 둘러봐야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파일 속 창덕궁을 천천히 넘기면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봄을 기다리기로 한다.

 

 

2023. 1. 29. 낮달

 

[시골 사람 서울 나들이 ①] 난생처음 국립극장에 옛 연극을 보러 가다

[시골 사람 서울 나들이 ②]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모네와 피카소를 만나다

[시골 사람 서울 나들이 ③] 시화호와 대부도의 낙조

[시골 사람 서울 나들이 ④]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람회

[시골 사람 서울 나들이 ⑤] 덕수궁, 망국과 격변의 시대를 지켜보다

[시골 사람 서울 나들이 ⑥] 창경궁, 한때 ()’이었던 궁궐, 왕실 가족사도 애잔하다

[시골 사람 서울 나들이 ⑧] 고난의 근대사 간직한 조선 제일의 법궁 경복궁(景福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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