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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사람 서울 나들이 ⑤] 덕수궁, 망국과 격변의 시대를 지켜보다

by 낮달2018 2023.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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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 산책 ① 교과서에서 ‘석조전’으로 미리 만났던 덕수궁(德壽宮)

▲ 덕수궁 석조전. 서울이나 덕수궁을 가보지 못했어도 우리는 교과서로 배운 석조전 덕분에 덕수궁이 친근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서울의 고궁을 처음 가 본 건 아마 1960년대 초등학교 수학 여행에서였을 것이다. 그때도 경복궁이나 덕수궁을 들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복원 전의 창경궁에서 동물들을 구경한 게 애매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고교 시절에 친구들과 어울려서 고궁 한곳을 들렀는데, 거기가 덕수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곤 거의 수십 년을 건너뛰어 덕수궁을 찾은 게 2018년 5월이다. 시골 사람이 서울에 가는 건 가물에 콩 나듯 한 일이고, 간다고 해도 여유롭게 고궁 나들이를 할 만큼 한가롭지 못하다. 일부러 작정하고 찾지 않으면 사진으로나 고궁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5년 전에 찾은 덕수궁

 

5년 전인 2018년 5월에 아내와 함께 서울에 들렀다가 아들의 안내로 덕수궁을 들렀다. 표를 사서 대한문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머리를 주억거렸다.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집회나 행사 때마다 거치던 곳인데, 나는 그게 덕수궁의 정문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대안문(大安門)’이던 이 문이 ‘한양이 창대해진다.’라는 의미의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뀐 것은 1906년이었다. 원래 덕수궁 정문은 인화문이었는데,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도로 확장 등으로 궁궐 영역이 좁아지면서 대한문이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 덕수궁 대한문. 원래는 대안문이었고, 궁의 정문으로 인화문이 있었지만 궁역이 축소되면서 이 문이 정문을 대신하게 되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된 것은 임진왜란(1592)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行宮)로 삼으면서였다.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 행궁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慶運宮)’이라고 불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이른바 아관파천(1896)으로 러시아공사관에 가 있던 고종이 이듬해 여기로 옮겨 오면서였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고종은 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경운궁 전각들을 다시 세워 일으켜 세웠다. 고종 당시의 덕수궁 권역은 규모가 현재 궁역(宮域)의 3배에 가까웠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두 차례 궁궐로 쓰인 덕수궁

 

근대적 자주 국가를 위한 고종의 개혁은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고, 결국 강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 1907년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즉위한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올린 ‘덕수’라는 궁호(공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칭호)가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되었다. 덕수궁은 고종(1852~1919)이 승하한 이후 빠르게 해체, 축소되었다.

 

덕수궁은 개항 이후 서구 열강의 외교관과 선교사들이 정동 일대로 모여들면서 빠른 속도로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다. 덕수궁과 주변 정동에는 지금도 이들이 세운 교회와 학교, 외국 공관의 자취가 뚜렷이 남아 있다. 다른 궁궐들과 달리 덕수궁 안에 서양식 건축을 세운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였다.

▲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된 함녕전. 앞면 9칸, 옆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다. 지붕의 양쪽 귀마루에는 잡상으로 장식하였다.
▲ 덕홍전. 원래 명성황후의 혼전이었으나, 뒤에 편전(왕이 평소에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 단청하지 않은 2층집 석어당. 경운궁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 선조가 사용한 집, '옛날 임금의 집'이라 하여 석어당이란 이름이 붙었다.

사람들이 가 보지 않아도 덕수궁이 낯설지 않은 것은 궁 안의 서양식 건물 석조전(石造殿) 등을 초등학교 시절부터 배워 와서다. ‘덕수궁 돌담길’을 마치 걸어본 것처럼 느끼게 한 것도 같은 이름의 대중가요와 뉴스 등에서 만난 풍경이 낯설지 않아서다. 덕수궁을 찾기 전에 미리 공부할 생각도 내지 못한 것도 그런 식으로 머릿속에 고정된 이미지 탓인지 모른다.

 

서구식 건축을 받아들인 궁궐

 

대한문을 지나 광명문 오른쪽으로 들면 만나는 전각이 덕수궁의 침전으로 고종이 사용한 공간인 함녕전(咸寧殿)이다. 1897년에 지었는데 1904년 수리 공사 중 불에 타, 지금 있는 건물은 그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고종은 1919년 1월, 이 전각에서 세상을 떠났다.

 

규모는 앞면 9칸·옆면 4칸이며 겹처마 팔작집이다. 팔작지붕의 귀마루에는 잡상(雜像)으로 장식하였다. 잡상은 건축물의 추녀마루에 장식, 배열하는 작은 짐승 형상들로 소설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토지신(土神)을 형상화한 것이다.

▲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 정문 광명문. 고종 승하 후 1938년 강제 이건되었다가 2019년에 원래의 자리를 찾게 되었다.
▲ 대한문에서 시작된 왕궁 수문장 교대 의식 행렬이 광명문 앞을 지나고 있다. 이 의식은 고궁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행사다.

함녕전 왼쪽에 덩실하게 솟은 전각이 덕홍전(德弘殿)이다. 덕홍전은 원래는 을미사변(1895) 때 시해된 명성황후의 혼전(魂殿)으로 경효전(景孝殿)이라고 불렸는데, 뒤에 편전(왕이 평소에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1912년에 고종황제의 알현실로 고쳐 짓고서 덕홍전이라고 부르고 벽화 등을 설치하여 대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덕홍전의 왼쪽, 중화전(中和殿)의 뒤쪽에 있는 전각이 석어당(昔御堂)이다. 임란 때 경운궁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에 선조가 사용한 집인데, ‘옛날 임금의 집’이라 하여 석어당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석어당은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 불타버리고, 지금은 1905년에 새로이 중건한 건물이다. 단청하지 않은 이층집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석어당 왼쪽에 있는 건물이 인조가 즉위한 즉조당(卽阼堂)이다. 영조가 인조의 즉위를 기념하고자 ‘계해 즉조당(卽祚堂)’이라는 편액을 써서 걸게 하여 붙은 이름이다. 즉조당은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 불타버리고, 지금은 1905년에 새로 중건된 건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덕수궁의 중심 건물로 덕수궁의 법전인 중화전. 뜰에 품계석이 서 있다.
▲ 앞면 3칸,옆면 2칸, 팔작지붕으로 된 중화전의 정문 중화문. 고종은 중화전으로 황제의 권위를 대외에 과시하고자 했다.

석어당과 즉조당의 앞쪽에 있는 앞면 5칸·옆면 4칸의 팔작집이 덕수궁의 중심 건물로 왕이 하례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법전(法殿)’인 중화전이다. 전각 앞마당에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앞처럼 품계석이 줄지어 서 있다. 1902년에 지었으나 1904년 불에 타 버려 지금 있는 건물은 1906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덕수궁의 법전 ‘중화전’과 전각들

 

고종은 1902년 중화전을 지어 황제의 권위를 대외적으로 과시하고자 했다. 중화전(中和殿)은 열강들의 침략 가운데서 대한제국이 중심을 잃지 않고 독립과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는 고종의 바람이 담긴 이름이다. 중화전 앞에 서 있는 문이 앞면 3칸·옆면 2칸, 팔작지붕의 정문 중화문이다.

 

중화문 앞으로 대한문에서 시작된 왕궁 수문장 교대 의식 행렬이 떠들썩하게 지나갔고, 석어당과 즉조당 앞 잔디밭에선 북청사자놀음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화전 뒤쪽 계단에 운집한 관광객들의 호응이 컸는데, 개중에는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덕수궁의 맨 안쪽, 복원된 중명전 앞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과 석조전(石造殿)이 있다. 석조전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음을 알리는 서양식 황궁이다. 석조전은 우리의 전통적 건축 재료인 나무나 흙이 아닌 돌로 만들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 서양식 황궁인 석조전. 1910년에 완공됐으나 일본에 나라를 잃어 활용되지 못했다. 현재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방되고 있다.
▲ 즉조당(왼쪽) 앞, 석어당(오른쪽) 옆 잔디밭에서 서양식 밴드가 연주하고 있다.
▲ 즉조당 앞 잔디밭에서 시작된 북청사자놀음. 중화전 뒤쪽 기단에 앉은 관광객들이 탈춤을 구경하고 있다.

고종은 석조전을 외국 귀빈들을 접견하는 공간으로 사용하려 했지만, 석조전은 1900년도에 착공하여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는 1910년도에 완공되어 정작 대한제국 시기에는 활용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광복 이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이곳에서 개최되었으며, 지금은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방되고 있다.

 

격변기의 역사 현장이 된 서구식 건축물들

 

석조전 말고 독특한 건물로 정관헌과 중명전 등이 있는데, 우리는 사전에 공부하지 못한 탓에 이들 건물을 따로 구경하지 못했다. 함녕전 뒤편에 있는 정관헌(靜觀軒)은 전통식 지붕 구조와 서양식 기둥 양식이 절충된 건물이다. ‘조용히 바라보다’라는 뜻의 정관헌은 휴식 공간으로 덕수궁이 한눈에 들어오는 덕수궁 후원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 덕수궁 후원 언덕에 세워진 전통식 지붕 구조와 서양식 기둥 양식이 절충된 건물인 정관헌. 우리는 여기 들르지 못했다. ⓒ 문화재청
▲ 1901년 소실된 뒤 3면에 회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재건된 중명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로 사용되었다.ⓒ 문화재청

1900년경 석조전 건축에도 참여한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정관헌은 기단 위에 인조석 기둥을 세우고 세 방향에 테라스를 설치했다. 기둥과 기둥 사이는 아치형으로 마감하고 기둥과 난간에는 화려한 문양을 가미한 독특한 형태가 인상적이다.

 

중명전은 1897년에 황실도서관으로 계획되어 미국인 다이(J.H.Dye)의 설계로 1층 서양식 건물로 지어졌으나, 1901년 소실된 뒤 정면과 양 측면 등 3면에 회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재건되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이후 황제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었고 고종이 신료와 일본 관료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중명전은 1905년 11월,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로 사용되었고,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외국인들의 사교 클럽인 경성구락부로 이용되었다. 근대화의 의지로 왕궁 안에 서구식 건물까지 지었지만, 사직의 멸망에 이르는 역사를 피해가지 못한 것이다. 전통 목조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함께 남은 덕수궁에 담긴 격변기의 역사는 씁쓸하기만 했다. 

▲'덕수궁 돌담길'로 잘 알려진 덕수궁길. 900m에 불과하나 도심의 대표적 산책길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이 길을 다 걷지 못했다.

시인 김수영은 고궁을 나오며 ‘왕궁’과 ‘왕궁의 음탕’을 노래(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하며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는 소시민의 삶을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21세기의 소시민은 이미 절멸한 왕조의 자취를 돌아보며 치욕적인 망국의 역사를 서글프게 되돌아볼 뿐이다.

 

우리는 오후 늦게 덕수궁을 나와서 덕수궁 돌담길로 알려진 덕수궁길을 잠깐 걸었다. 정동길과 함께 도심의 대표적 산책길인 덕수궁길은 900m밖에 되지 않으나 한국관광공사 야간관광 100선에 선정된 유명한 길이라 했다. 그 길을 온전히 걸어보지 못하고 야간에 개장하는 창경궁에 가려고 우리는 서둘러 남대문시장에서 갈치조림으로 이른 저녁을 들었다.

 

 

2023. 1.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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